아가 雅歌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약간 모자른 지능 지수에 약간 모자른 운동 신경. 약간 뛰어난 예지 능력을 갖춘 당편이를 향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이 아니라 비 장애인 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수에 반하는 소수의 이질적인 그 무엇이 출현했을때 먼저 다가가기 쉽지 않은건 방어 본능때문인가, 익숙하지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그 무엇도 아니다. 단지, 다수의 소수에 대한 횡포일 뿐이다. 감상을 늘어놓기 전에 경험담부터 늘어 놓는것이 좋을 것 같다.

대학시절. 멋모르고 따라간 봉사 활동. 정동진에 위치한 '늘 사랑의 집'이란 곳이었다. 치매 노인과 정신지체 아동을 보호하는 시설이 었는데, 약 보름간의 일정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정동진이라는 위치적 유혹도 있었고 봉사활동에 대한 어줍짢은 경외심도 있었기에 별 망설임없이 선뜻 나서게 되었다. 그래, 아무생각없이 나섰다고 하는게 제일 적당할 것 같다.

그룹은 둘로 나뉘어 반은 치매노인들과 함께, 반은 정신지체 아동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물론 나와 정신적 교감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정신지체 아동쪽을 택했다.^^;

방문을 열기 전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직접 대면하는 비 장애인. 문을 열자,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는듯 보였다. 다수의 정신 지체인들은 소수의 비 정신지체인(이라고 분류되어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들이 다수였다. 게다가 우리들을 신가하다는듯 만져보기 시작했다. 다수는 소수를 신기해했다.

그러나 이미 다수의 삶을 몇십년씩 살아온 우리들은 소수를 동정하고 있었다. 무조건 잘해줘야한다는 강박관념에라도 쌓인듯. 어르고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정의 근원은 상하 관계 정립에서부터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지극히 개인적인 고정관념이라 해도--;) 한쪽의 우위적 위치가 다른 한쪽의 하위적 위치에 대해 품고 있는 불쌍한 마음. 동정 따위는 필요없다.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다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 생각에 흠집 따위는 내고 싶지 않다.

솔직히 나는 그들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 따위는 품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부자유한 몸때문에 하기 불편한 일들을 거들어 주면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보름동안 한 일은 그들의 놀이문화에 흡수되어 놀아준 것밖에 없는 것 같다. 한아이가 나를 잡으러 오면 나도 잡으러 갔고, 나를 꼬집으면 나도 꼬집었고--;노래를 부르면 같이 따라 불렀다.

이문열의 아가를 읽으며, 당편이에 관한 추억을 접하며, 그때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던 건, 아마도 당편이를 향한 주변인의 시각이 정상인의 입장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묘사된 것이 아닌 그저 이웃에 살고 있는 모자란 녀석쯤으로 담담히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 속의 당편이는 남들보다 조금 둔한 운동신경덕에 뒤뚱뒤뚱 걷느라 물 한동이를 길어와도 반이상은 흘려버리는, 그래서 [당편이 물 이고 오나마나]란 우스갯 소리의 장본인 이며, 남들보다 조금 둔한 이해력 덕이 좋은 것 나쁜 것 구별 못하느라 조 밭을 매라하면 잡초는 남겨두고 조를 뽑아 버리는, 그래서 [당편이 조밭 맬 듯 말 듯]이란 우스갯소리로 놀림 받는 인물이지만, 결코 동정의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이용당하고 놀림 당하는 쪽에 가깝다면 모를까. 그러나 그들의 놀림 속에는 악의가 아닌 정의(情意)가 숨쉬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여 정상인이라 자부하는 이들마저도 우왕자왕하던 시절, 소수의 입장에서 다수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치도 약삭빠름도없이 그야말로 소수만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겪다 간 당편이의 삶이 오히려 기특해 보이는 건 이문열의 마른날 소나기와도 같은 필력 때문이었을까.

당편이는 지금쯤 어느시대 어느 구석에서 당편이 하나마나한 짓들을 하고 있을런지....

기억에 남는 글귀
[고통은 의식이며 그것도 주관적인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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