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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이인웅 옮김, 외젠 들라크루아 외 그림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민음사에서 나온 <파우스트> 1,2권을 읽었는데 1권은 정말 재미있었지요. 근데 2권은 지루하고 졸리기도 하고 재미가 없는 거예요. 공통적으로 느꼈던 거지요. 늙으면 사람은 왜 다 그렇게 되는 거야? 하고 한 동무가 말했답니다. 1부는 괴테가 젊었을 때 썼던 거고 2부는 노년에 쓴 거니까요. 아직 우리가 젊어서 그런 걸까요. 1부는 파우스트가 지상에서의 욕망을 추구하는 이야기고 2부는 영원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파우스트의 노력이 담겨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 차이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아직 지상에서 우리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놀라웠던 점은 시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이었는데요. 마치 노래처럼 흥겨움이 묻어나오는 시들이었지요. 독일어로 썼다면 운을 맞춰 써야했을 테니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을까요. 그러면서 우리 나라의 시들은 왜 그런 형식이 철저히 사라져버렸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한시에도 서양의 시에도 일본의 하이쿠에도 그런 것들이 남아있는데 말이지요. 우리나라에는 간신히 시조가 그 맥을 잇고 있지만 너무 미약하지요. 아이들의 전래동요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동요에서 그 전통을 이어온 것 같지도 않구요. 아마 말장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동요에 있어서는요.
하지만 형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틀이니까요. 그 틀도 내용에 맞게 짜여지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그 틀에 걸맞는 내용이 있었다는 거겠지요. 지금은 그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서 틀 자체가 다시 짜여진 거라고 보아야 하겠구요.
괴테는 자신의 시에 작곡을 하지 말라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합니다. 자신의 시 자체가 노래이므로 그러니 자신의 시를 외울 때는 노래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지요. 그리고 노래가 되었다고 하지요. 슈베르트가 괴테의 시 마왕을 작곡했을 때 그래서 괴테는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가 가지고 있는 음악성은 수학적이기도 한 거지요. 그건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을 테구요. 아,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근데 이런 건 독일어로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걸테구요.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파우스트라기 보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인 것도 같은데요. 정말로 매력으로 똘똘 뭉친 현대적인 인물이더군요. 홀라당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더라구요. 악마만 아니라면 딱 제 스타일인 거예요. 악마인데 전통적인 개념의 악마가 아니라 자기 말로도 진화했다고 하지만요. 인류의 발달에 따라 익살꾼처럼 바뀌어진 악마인 거지요. 놀라운 화술, 본질을 꿰뚫어보는 천리안, 시들지 않는 유머감각, 마르지 않는 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들이지요. 그러니 앞다투어 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자 줄을 설 수밖에 없겠지요.
그는 왜 그렇게 매력이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왜 그렇게 그에게 깜빡 속아넘어갈까요. 현대는 어쩌면 수많은 메피스토펠레스들이 활동하고 있는 시대일 텐데요. 쉴 새 없이 사람들 귀에 너의 욕망을 추구하라고 속삭이고 있을 텐데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하고 말이지요. 그것도 아주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주면서 말이지요. 어떻게 보면 개인주의의 극단으로 사람을 몰고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고 하나의 개인도 그의 영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부름을 듣지 못하고 악마의 꾀임만을 듣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허용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면서 파우스트는 결국은 그 안의 선한 마음을 다시 찾아낼 거라고, 그 선한 마음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킬 거라고 믿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런 하나님의 믿음을 비웃으며 자신의 목적이 달성될 것임을 또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두 관점이 충돌하지요. 인간에 대해 이렇게 신과 악마가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고 또한 둘 다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나약하지만 또한 강인함을 지니고 있는,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이니까요. 우리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 어느 것을 따를 지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거라구요.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런 우리의 자유의지를 시험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더욱 매력이 있는 걸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를 살살 꼬드기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를 불러 일으키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복돋워주니까요. 거기에 저항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큰 힘을 우리 안에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메피스토펠레스는 결코 자신을 강력한 악의 화신으로 나타내지는 않으니까요.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빗물처럼 우리에게 젖어들려고 하지요. 달콤한 말로 쉴 새 없이 속삭이죠. 그러니 현대인들은 더욱 똑똑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깨어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지요. 그건 아마 그들이 구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매력을 뿜어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닌가 하구요. 괴테는 말하니까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올린다구요. 나쁜 남자에게 끌릴 때 내가 과연 메피스토펠레스를 이겨낼 자신이 있는 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겠더라구요. 그러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이 나쁜 남자를 택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여성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면 모두가 구원에 다다를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러나 누가 그런 삶을 원할까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원형으로써 그러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파우스트>에서도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에게 속고 버림을 당하고 가족도 죽고 아이도 죽이고 자신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요. 그러나 그레트헨은 파우스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파우스트의 영혼을 영원한 곳으로 이끌어가지요. 언젠가 라즈니쉬가 한 말이 제 가슴속에 남아 한동안 괴로웠던 적이 있는데요. 라즈니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성은 한 남자를 완전히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도에 이를 수 있다구요. 정확히 이 표현은 아니었지만 이런 뜻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화가 났더랬지요. 뭐야? 도대체 얼마나 더 하라구? 왜 여자만? 하는 심정이었던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싫어 무던히도 많이 싸웠더랬습니다.
근데 그런 것 같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정말 다른 존재더군요. 여성성과 남성성이 다르듯이요. 내 안에서 이 두 성을 조화롭게 할 수 있다면 삶에서도 그럴 수 있겠더군요. 그러나 이제 그레트헨의 시대는 갔습니다. 새로운 여성의 삶이 필요한 거지요. 그레트헨이 보여준 것이 여성성의 상징이라면 그것은 그저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인 거지요. 그러니 새로운 상징이 될 수 있는 여성의 삶이 필요합니다. 영원한 여성성을 드러내며 우리 모두의 삶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올려주는 새로운 삶의 양식 말입니다. 어디선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우리 눈에 들어오겠지요. 그들을 위하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