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이인웅 옮김, 외젠 들라크루아 외 그림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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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나온 <파우스트> 1,2권을 읽었는데 1권은 정말 재미있었지요. 근데 2권은 지루하고 졸리기도 하고 재미가 없는 거예요. 공통적으로 느꼈던 거지요. 늙으면 사람은 왜 다 그렇게 되는 거야? 하고 한 동무가 말했답니다. 1부는 괴테가 젊었을 때 썼던 거고 2부는 노년에 쓴 거니까요. 아직 우리가 젊어서 그런 걸까요. 1부는 파우스트가 지상에서의 욕망을 추구하는 이야기고 2부는 영원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한 파우스트의 노력이 담겨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 차이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아직 지상에서 우리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놀라웠던 점은 시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이었는데요. 마치 노래처럼 흥겨움이 묻어나오는 시들이었지요. 독일어로 썼다면 운을 맞춰 써야했을 테니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었을까요. 그러면서 우리 나라의 시들은 왜 그런 형식이 철저히 사라져버렸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한시에도 서양의 시에도 일본의 하이쿠에도 그런 것들이 남아있는데 말이지요. 우리나라에는 간신히 시조가 그 맥을 잇고 있지만 너무 미약하지요. 아이들의 전래동요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동요에서 그 전통을 이어온 것 같지도 않구요. 아마 말장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동요에 있어서는요.

하지만 형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틀이니까요. 그 틀도 내용에 맞게 짜여지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그 틀에 걸맞는 내용이 있었다는 거겠지요. 지금은 그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서 틀 자체가 다시 짜여진 거라고 보아야 하겠구요.

괴테는 자신의 시에 작곡을 하지 말라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합니다. 자신의 시 자체가 노래이므로 그러니 자신의 시를 외울 때는 노래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지요. 그리고 노래가 되었다고 하지요. 슈베르트가 괴테의 시 마왕을 작곡했을 때 그래서 괴테는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가 가지고 있는 음악성은 수학적이기도 한 거지요. 그건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을 테구요. 아,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근데 이런 건 독일어로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걸테구요.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파우스트라기 보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인 것도 같은데요. 정말로 매력으로 똘똘 뭉친 현대적인 인물이더군요. 홀라당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더라구요. 악마만 아니라면 딱 제 스타일인 거예요. 악마인데 전통적인 개념의 악마가 아니라 자기 말로도 진화했다고 하지만요. 인류의 발달에 따라 익살꾼처럼 바뀌어진 악마인 거지요. 놀라운 화술, 본질을 꿰뚫어보는 천리안, 시들지 않는 유머감각, 마르지 않는 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들이지요. 그러니 앞다투어 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자 줄을 설 수밖에 없겠지요.

그는 왜 그렇게 매력이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왜 그렇게 그에게 깜빡 속아넘어갈까요. 현대는 어쩌면 수많은 메피스토펠레스들이 활동하고 있는 시대일 텐데요. 쉴 새 없이 사람들 귀에 너의 욕망을 추구하라고 속삭이고 있을 텐데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하고 말이지요. 그것도 아주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주면서 말이지요. 어떻게 보면 개인주의의 극단으로 사람을 몰고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고 하나의 개인도 그의 영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부름을 듣지 못하고 악마의 꾀임만을 듣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허용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면서 파우스트는 결국은 그 안의 선한 마음을 다시 찾아낼 거라고, 그 선한 마음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킬 거라고 믿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런 하나님의 믿음을 비웃으며 자신의 목적이 달성될 것임을 또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두 관점이 충돌하지요. 인간에 대해 이렇게 신과 악마가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고 또한 둘 다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나약하지만 또한 강인함을 지니고 있는,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이니까요. 우리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 어느 것을 따를 지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거라구요.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런 우리의 자유의지를 시험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더욱 매력이 있는 걸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를 살살 꼬드기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를 불러 일으키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복돋워주니까요. 거기에 저항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큰 힘을 우리 안에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메피스토펠레스는 결코 자신을 강력한 악의 화신으로 나타내지는 않으니까요.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빗물처럼 우리에게 젖어들려고 하지요. 달콤한 말로 쉴 새 없이 속삭이죠. 그러니 현대인들은 더욱 똑똑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깨어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지요. 그건 아마 그들이 구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매력을 뿜어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닌가 하구요. 괴테는 말하니까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올린다구요. 나쁜 남자에게 끌릴 때 내가 과연 메피스토펠레스를 이겨낼 자신이 있는 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겠더라구요. 그러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이 나쁜 남자를 택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여성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면 모두가 구원에 다다를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러나 누가 그런 삶을 원할까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원형으로써 그러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파우스트>에서도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에게 속고 버림을 당하고 가족도 죽고 아이도 죽이고 자신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요. 그러나 그레트헨은 파우스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파우스트의 영혼을 영원한 곳으로 이끌어가지요. 언젠가 라즈니쉬가 한 말이 제 가슴속에 남아 한동안 괴로웠던 적이 있는데요. 라즈니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성은 한 남자를 완전히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도에 이를 수 있다구요. 정확히 이 표현은 아니었지만 이런 뜻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화가 났더랬지요. 뭐야? 도대체 얼마나 더 하라구? 왜 여자만? 하는 심정이었던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싫어 무던히도 많이 싸웠더랬습니다.

근데 그런 것 같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정말 다른 존재더군요. 여성성과 남성성이 다르듯이요. 내 안에서 이 두 성을 조화롭게 할 수 있다면 삶에서도 그럴 수 있겠더군요. 그러나 이제 그레트헨의 시대는 갔습니다. 새로운 여성의 삶이 필요한 거지요. 그레트헨이 보여준 것이 여성성의 상징이라면 그것은 그저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인 거지요. 그러니 새로운 상징이 될 수 있는 여성의 삶이 필요합니다. 영원한 여성성을 드러내며 우리 모두의 삶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올려주는 새로운 삶의 양식 말입니다. 어디선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우리 눈에 들어오겠지요. 그들을 위하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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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그림의 비밀 -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잉에 브로흐만 지음, 심희섭 옮김 / 섬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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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몸 속도 그렇고 마음 속도 그렇다. 어른들끼리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다. 말이란 걸 조리있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 마음이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고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내 몸이 지금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이 그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게 조금은 가능한 편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어떤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더더욱 상상이 풍부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의 말을 현실적인 우리의 생각으로 해석해내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아기때부터 아기의 울음소리 하나만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아이의 욕구 또는 갈망을 해석해내야 하는 어려운 수련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때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 연결되어 있던 때라  직관적으로 그것을 알아차리곤 했던 것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연결의 끈은 느슨해지고 아이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변해간다. 엄마 되기, 아빠 되기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건 아이 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아이가 아픈데도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아이의 성장에 문제가 있는데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왔다. 아이가 제대로 말할 때까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잉에 브로흐만은 아이들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성장을 겉으로 드러낸다고 말이다. 보아주기를 바라면서,  부모가 할 일은 단지 아이에게 종이와 색연필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곁에 앉아 조용히 할 일을 하면서 아이를 지켜보는 것뿐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별다른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아이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는 성장하는 존재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자라고 변화한다. 무언가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가 아이 안에서 꿈틀대며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흘러 넘쳐서 자국을 남기길 원한다. 그걸 표현하지 못할 때 아이들은 괴로워하고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는 거다. 그러나 일단 아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놀라운 집중력으로 그림들을 그려낸다. 아이의 손 아래서 무언가 형태가 나타나는 걸 지켜보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아이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려지는 형태들은 단순한 끄적거림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어떤 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태내에서 또는 머나먼 우주에서 유영할 때의 기억들을 추상적 형태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원시인들이 동굴 속에서 자신들의 경험과 기억을 그려낸 것처럼. 그들의 그림은 그래서 무척이나 닮아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의 신체가 어떻게 발달하고 있는지도 그려낸다고 한다. 먼저 머리와 몸통 그리고 내부의 기관들, 팔과 다리가 어떻게 자리잡고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아팠던 곳, 아픈 곳까지도 정확하게 그림에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신체 뿐만 아니라 내적인 부분들도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아이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는지도 그림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학교에 갈 준비가 되었는지, 땅에서 제대로 굳건하게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이다.

이런 그림들은 전세계 어린이들이 보편적으로 그려내는 일정한 발달의 단계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아이들의 발달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을 통해 아이들의 발달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단지 아이가 정상인지 아닌지, 우리 아이가 제대로 발달 단계를 밟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이를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고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세상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세상이 좀더 평화롭고 안정되고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다. 아이의 그림에서 우리는 세상의 힘이 아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이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걸 깨우치고 있다. 그러면서 부모로서의 자각이 생기게 된다. 세상의 일부로서 부모는 아이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세상의 아이인 것이다. 부모가 할 일은 그 아이를 지켜보고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가꿔나가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책은 그런 걸 가르쳐 준다. 배운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다. 특히나 꼭 알아야할 걸 가르쳐주는 책은 정말 소중하다. 지금 시대에서 부모 되기란 얼마나 힘겨운가. 그러나 우리가 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면, 그들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 힘듬 속에서도 진정한 기쁨이 솟아나온다. 부모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조금은 쉬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실용서라고 볼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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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1 시튼 동물기 1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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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변두리 도시다. 서울에서 살다 이사왔을 때 저녁이 되면 너무나 깜깜해져서 깜짝 놀랐었다. 집들에는 모두 마당이 있고 거기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다. 마치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아침이 되면 새가 고요히 운다. 호잇 호잇 하고 우는 새도 있고 비 비쫑 비 비쫑비쫑 하고 우는 새도 있다. 공기엔 향기가 감돈다.

서울에 살 땐 이런 걸 느끼지 못했다.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건 비둘기와 사람들이 안고 다니는 개, 그리고 고양이가 기껏이었다. 비둘기는 우리의 친구라기보다 귀찮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싸대는 똥에 집은 지저분해지고 창문도 열어놓을 수가 없었다. 개와 고양이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도 삶이란 게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동물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웃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일 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동물들도 사람만큼 열심히 살고 있다.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도 도시생활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경쟁적으로 살고 있다. 그들도 진화한다. 그들은 더이상 자연의 존재가 아니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 사람이 도시에서 자연과 멀어지고 있듯이 도시의 동물들도 자연과 멀어지고 있다.

시튼 동물기에 나오는 동물들은 아직은 자연의 존재인 채로 사람들과 만나는 경계지점에 서있다. 그들은 서서히 자신의 본능을 사람들과 살아가기 위해 발달시켜 가고 있었다. 늑대왕 로보는 더욱 더 지혜로워지고  잔혹해져야 했다. 산토끼 리틀워호스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까마귀 실버스팟은 사람들을 예의주시해야 했다. 그리고 속임수를 쓸 줄 알아야 했다. 빙고는 자신의 야성을 죽이고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그렇게 했을 때 동물들은 불행해졌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종만이 지배자가 되었다. 동물들은 패배감을 간직한 채 죽어가야 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영악했고 잔혹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진화해온 것일까? 

고대에 사람과 동물은 형제였다. 사람과 동물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며 사랑을 나누었다. 심지어 동물을 신으로까지 생각했다. 자연 속에서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사람은 동물을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사람이 자연에서 떨어져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동물들에겐 비극과 굴욕의 역사가 시작되는 때였다. 시튼은 동물들에게도 감정과 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튼이 이를 깨달았을 때는 자신이 놓았던 덫에 자기 자신이 걸리고 나서였다. 덫에 걸린 늑대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느끼겠지 하는 상상력으로부터 시튼은 동물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눈으로 동물을 바라보았기에 시튼은 진정한 동물의 삶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 책을 읽는 우리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동물들의 삶이 그렇게도 비극적이기에 진한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극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니까. 절망 속에서도 삶을 지키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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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의 등에서
조지 맥도널드 지음,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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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의 등에서>라는 제목은 늘 내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동문학 이론서인 <어린이문학의 즐거움>을 읽다가 지나치는 것처럼 제목만 보았을 뿐인 그 책은 웬지 묵직한 존재감을 가지고 내 안으로 들어와버렸던 것이다. 북풍의 등에 업혀 하늘을 날아가는 아이의 그림은 뭔지 모를 아련함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그때는 책이 번역되어 나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단지 상상 속에서만 그 모습을 그려보고 그리워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서서히 잊혀져 갔고...

얼마 전에 동무들과 얘기를 하다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작가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죠지 맥도널드란 사람이었다. 아마도 켈트계일 것이다. 이름에 맥이 들어가는 걸 보니. 그건 누구누구의 자식이란 뜻으로 붙는 이름이라고 하던데. 그러니까 도널드의 자손이란 뜻이다. 도널드는 뭘 하던 사람이었을까?

아마도 켈트족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영국엔 특별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많다. <북풍의 등에서>도 그런 환상적인 이야기이다.  <북풍의 등에서>라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데에는 헤로도토스가 한 몫을 한 듯 하다. 그리스에는 북풍의 등에 있는 나라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있었던 듯 한데 그곳은 지상낙원과도 같은 곳이라 사람들이 너무 지겨운 나머지 물에 빠져 죽는 곳이었다고 한다.

헌데 죠지 맥도널드는 그 곳, 북풍의 등에 있는 나라에 한층 상상력을 불어넣어 무언가 고차원적인 비밀이 존재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니 묘사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곳은 우리의 인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곳이기에. 묘사할 수 없는 것은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곳에 다녀온 사람은 누구나 풍성한 지혜로 무장되어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어린 다이아몬드가 그랬다. 이름마저도 특별한 다이아몬드는 착하고 순수하고 순종적인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절망적인 현실 앞에 놓여 있는 작은 촛불과도 같았다. 하지만 북풍은 이 아이에게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고 북풍의 등에 있는 나라에 다녀오게 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는 세공되었고 빛이 나게 되었다. 원석과도 같았던 아이가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눈부시게 빛이 나는 아이가 되어 세상을 구원할 지혜를 퍼뜨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아이를 달갑게 여기지만은 않는다.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내뿜는 빛에 놀라워하며 찬탄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빛을 덮어버리느라 바쁘다. 왜냐하면 그 빛을 내뿜는 것은 너무나 큰 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 힘을 내기가 어렵다. 그 힘은 내적으로 강한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힘의 근원은 북풍의 등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바보로 여긴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세상의 인식에 굴하지 않고 하늘의 인식을 구한다. 그것이 끝까지 그를 빛나게 하는 점이다.

꽤 두툼한 책이지만 때로는 웃으며 아주 가끔은 눈물 지으며 읽어내릴 수 있는 간만에 만난 좋은 책인 것 같다. 좋은 책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여운을 오래오래 남긴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바 좋은 책은 실용적인 지혜를 준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다이아몬드가 사는 마구간에는 여러 가족이 살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는 술주정뱅이 마부가 살았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돌아온 마부는 마누라를 때리기 시작했다. 갓난아기는 놀라 깨어 울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는 이 소리를 듣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찾아간 게 아니라 조심조심 들어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 술주정뱅이 마부한테 쓴소리를 잔뜩 늘어놓을 것이다. 똑바로 살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마누라한테 이런저런 교훈이 실려있는 책을 집어던지며 이런 책이나 좀 읽으라고 잔소리를 해댈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다이아몬드는 그러지 않았다. 곧바로 울고 있는 아기한테로 다가가 아기를 안아올리고 얼르기 시작했다.

곧 아기의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다. 다이아몬드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울고 있던 마누라도 마음이 안정되고 술에 취해 졸고 있던 마부도 무언가 모를 슬픔과 후회의 감정에 젖어들었다. 집안은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졌다. 처음 상황보다 좋아졌지 나빠지지 않았다. 다이아몬드에게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지혜와 행동력이 있었다. 모든 순간에 그럴 수 있었다.

난 이런 게 생활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배울 수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죽도록 배우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더 나빠지지 않도록 그 상황을 쥐어틀 수 있는 힘을 기르려고 한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북풍이 내 방에도 창을 내지 않을까. 나도 언젠가 북풍의 등에 업혀 바람과 함께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머나먼 그 곳 북풍의 등에 있는 나라에 가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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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 카이에 소바주 1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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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관심을 가진 지 일년 정도 되었다.  신화 공부를 하려 한다니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해준 책이 바로 나카자와 신이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였다. 그 가운데서도 <곰에서 왕으로> 를 적극 추천했다.

바로 <곰에서 왕으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책인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부터 읽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의 글 속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을 듯 하다. 그래서 그걸 찾아 헤매게 만드는 거다. 읽는 이를 때로는 약올리고 때로는 추켜세우고 때로는 심사숙고하게 만든다.

신화는 인간이 세상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야기라고 나카자와 신이치는 얘기한다. 인간이란 그래서 특별한 존재라고. 하지만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고 말하는 거다. 말하자면 세상이 특별한 거지.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서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데렐라를 특별하게 다룬다. 모든 여성의 꿈이며 동시에 경멸의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신데렐라는 어디서 나타나게 되었을까?를 추적한다. 신데렐라의 어머니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이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이루어진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 깊숙한 곳에까지 그 발길이 이어진다. 현대의 디즈니 만화에서부터 고대의 중국 신화까지 그 시선이 던져진다. 그래서 찾아낸 신데렐라의 원형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신데렐라의 어머니는 샤만이고 무녀고 사제였다. 신데렐라는 왕자의 짝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것과 연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였고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다리였고 사람과 동물을 중개하는 존재였다.

우리나라의 콩쥐팥쥐가 바로 신데렐라 이야기의 한 지류인데 원전을 살펴보면 이 이야기와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신데렐라 이야기에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이 이야기 하나가 다 포괄하기 때문일 것이다. 뭐냐하면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이야기 뒤에는 거대한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는 거다. 거기에는 오래된 역사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형적 사고가 존재한다는 거다.

하지만 현재 알려지고 유행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알맹이가 빠져버린 형식에만 그치는 감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원래의 뜻을 잃어버린 채 상업적인 요구에만 따라가느라 왜곡되고 변질된 모습이 되어버린다는 거다.

우리, 인류는 사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최초의 인간조차도. 그렇게 나카자와 신이치는 말한다. 우리에게 지성이란 것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랬다고. 지금 우리에게 지성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사유해야 할 것이다. 왜 고대의 지혜를 우리는 잃어버렸는가를. 왜 우리는 그것을 되찾고자 하지 않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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