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페미니즘
코트니 서머스 외 지음, 켈리 젠슨 엮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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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웹상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혐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곤 한다. 난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데 '재기해', '종현하라'라는 표현이 난무하는 혜화역 시위의 기사를 읽으니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페미니즘과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같은 게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다운 페미니즘은 무엇일까?

<나다운 페미니즘>은 44명의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엮은 책이다. 다양한 인종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고백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란 과연 뭘까?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인 1915년, <워싱턴 헤럴드>는 여러 사람에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한다. "페미니즘은 모든 성이 사회적, 법적, 정치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신조다."라는 답변이 나왔다고 한다. 이 정의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p.24) 이 명쾌한 정의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양쪽으로 나눠 싸움을 하게 하는지 의아하다. 서로 한남충과 메갈을 예를 들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진상은 그 어디에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좋은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고 하면 그곳의 진상은 바로 나!라고 하지 않는가? 남자만이 혹은 여자만이 살아남은 세상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재앙이다. 이상한 사람들의 말은 뒤로하고 멀쩡한 사람들끼리 얘기 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멀쩡할까?)

페미니즘에 정답은 없지만 남성을 배제하는 건 확실히 답이 아니다. 남성들도 여성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법을 찾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길 바란다. 남성들도 아내와 딸과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페미니스트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초대하자. (p.162)

우리나라의 경우 아무래도 군대 문제가 끼어있다 보니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는 여자들에게 남자들은 늘 군대라는 방패를 들고 대항한다. "그럼 너도 군대 가라!"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다. 양쪽 진영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는 여자도 군대를 가야 한다는 의견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까짓것(?) 군대 다녀오면 여자들이 요구하는 모든 걸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너그러운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못 가겠는가? 사실 난 군대를 자원하려고 했다. 고3 담임 선생님께서 묵직한 팩트를 날리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 체력장 점수 20점 만점에 18점 나온 거 아니? (대부분 만점을 받는데 18점이란 건...) 군대는 체력 떨어지면 못 들어간다." 내가 남자였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우리 집은 남자들도 군대를 못 가는 허약체질 집안이다. 쳇! 어쨌든 동일한 일에 동일한 임금을 받고,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며, 성추행과 성폭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깨어 있는 남자로서 나는 페미니즘이 내게도 이득이 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모든 젠더 고정 관념을 해제하고자 한다. '여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면서 '남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도 다시 정의한다. 남자들이 마음껏 감정을 표현하고, 사회가 정해 놓은 좁은 '남성성'의 틀에 스스로를 욱여넣지 않아도 되고, 본인의 고유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다고? 그게 페미니즘이라면, 나도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나는 자유롭고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두가 편안한 세상에서. 아무도 그늘에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아무도 조롱받지 않는 세상에서.  (p.p. 35~36)

나는 늘 꺽정씨가 안쓰럽다. 남자라는 이유로, 우리 집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다는 이유로 어깨가 가장 무겁다. 그래서 농담반 진담반 '내가 호강시켜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라고 말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하니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충고를 했다. 남자는 책임감이 그를 키운다고 말이다. 내가 못한다고, 힘들다고 매달려야 더 노력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알아서 척척해내니까 나에게 오히려 의지한다고 말이다. 여자는 책임을 안 져도 된다는 말은 한 걸까? 남자는 언제나 강한 존재여야만 하는 걸까? 왜 여자라는 이유로 할 수 있는데도 못하는 척을 해야 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울지도 못하고 강한 척을 해야 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고정된 성 역할이 아니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걸 하면 안 될까?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 여성이 약자라는 느낌을 더 이상 받지 않는 날이 온다면 남자들도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펜스룰 같은 건 신경 꺼도 된다는 말이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나타낼 수도 있고, 등 떠밀린 가장이 아닌 동등한 위치의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44명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의 대부분은 예상과 달리(?) 혐오가 아닌 사랑이었다. 나와 함께 페미니스트가 되어달라고 손을 내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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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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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에이자는 자신이 소설 속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레(이름 한번 길기도 하다. 읽다가 이게 무슨 병인가 검색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라는 세균이 언젠가는 그녀를 죽여버릴 거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에도 사로잡혀 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늘 가운뎃손가락의 굳은살을 찢고 피를 낸다. 스타워즈 팬픽을 쓰는 친구 데이지와 이야기하던 어느 날 억만장자인 러셀 피킷이 실종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에게는 10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달려있다. 에이자는 러셀의 아들 데이비스와 아는 사이였기에 러셀 피킷의 행방을 찾아 10만 달러를 나눠갖자는 계획을 세운다. 데이비스와 가까운 사이가 되어 그와 키스까지 하지만 세균이 감염될까 불안하여 전보다 더 강박적으로 소독에 집착하고 급기야 손 세정제를 마시기까지 하는데...

에이자(Aza)라는 이름은 알파벳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우른다. 그녀가 뭐든 될 수 있다고 믿는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소용돌이처럼 에이자의 이름도 그렇다. 이름이 정체성을 말하는 건 분명 아니지만 에이자는 소용돌이에 갇혀 빙글빙글 돌아간다고 느낀다.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걸 느끼기 위해 상처를 내고 고통을 느낀다.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일 리는 없다.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도 달라지고 기억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같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서 우리는 달라지며 또 그대로 존재한다. 반복되는 것이 두렵고 끔찍한 에이자에게 절친인 데이지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체의 역사에 대해 연설하고 끈으로 관객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었어. 그러자 뒤에 앉은 할머니가 손을 들고 말했지. '잘 들었습니다, 과학자 선생님. 하지만 사실 지구는 거대한 거북이 등에 세워진 평평한 땅이랍니다.'
과학자는 할머니를 골려 주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물었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거대한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답했지. '더 거대한 거북이가 있죠.'
이제 과학자는 화가 나서 물었어. '그럼 그 거북이 밑에는 뭐가 있나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지. '선생님, 이해를 못 하시네요.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가 있는 거예요.' 
나는 깔깔 웃었다. "그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구나."
"거북이들만 존나 있는 거야, 홈지. 넌 맨 밑에 있는 거북이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왜냐하면 아래로 계속 거북이들이 있으니까." 나는 영적 깨달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p.268)

할머니의 거북이 지구 받침대 설처럼 우리는 오늘도 거북이를 한 마리 올리고, 또 한 마리를 올릴지 모른다. 나라는 지구를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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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 고대 가요.향가.고려 가요 편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하태준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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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쉽고 친절한 교과서 속 문학 작품을 읽어주는 책이라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낯익은 문학들을 다시 접했다. 집에도 수능 대비랍시고 이런 문학작품들과 수능에 출제될 만한 것들이 종합선물세트(선물은 반갑기라도 하지) 같은 전집이 있었더랬다. 중학생이었을 땐 내가 수능을 볼 수 있는 나이만큼 나이를 먹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그저 로맨스 소설과 무협지만 주구장창 읽었다. 막상 고등학생이 되니 집에서 커다란 등받이 쿠션을 대고 부스럭거리며 과자를 먹으며 책을 읽기엔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학교에서 읽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소설을 딱 끊는 듯한 단호함을 보여서 엄만 내심 걱정이 되셨나 보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못 보던 책들이 책장에 쫘르륵 전시가 되어있었다. 부모님의 19금 책까지 눈에 보이는 족족 읽던 활자 중독자는 지루하든 말든 책장에 있는 책들을 꺼내 하나둘씩 읽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근데 이 책과 차이점이 있었던 건 참 재미가 없었다. 가뜩이나 로맨스도 없고, 장풍을 쏘는 사람도 없는데 그림은 더더욱 없던... 국어 교과서만큼이나 지루하고 딱딱했던... 아직도 친정집에 그 전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내가 저걸 어떻게 다 읽었을지 신기할 정도다.

어렸을 때 가장 안타까운 건 고려가요 편이었다. 조선시대의 유교 사상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작품이 사라졌다. 솔직하고 직선적인 조상님들의 러브스토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사라졌으니 말이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그리 야하지도 않는데... '쌍화점'에서 손목을 쥐는 것이 뭣이 그리 야하다고! 손목만 잡은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 같은 가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고,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글은 표현 방법은 지금과 다를 뿐 감정은 그들과 똑같았다. 겨우겨우 읽었던 글이 아니라 그림과 함께, 차근차근 옆에서 설명해주는 글을 함께 읽으니 느낌이 달랐다. 왜 이런 글을 주입식 교육으로 배웠던 걸까? 조금 더 친절하게 이렇게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혼자 아쉬워해본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수능 걱정이 태산이 고등학생까지 두루두루 읽기 좋은 책인 것 같다. 친절할 설명 덕분에 옛 문학의 진입 장벽을 낮춰준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시리즈가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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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메이커
에르네스트 판 데르 크바스트 지음, 임종기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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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아이스크림이 그리는 강력한 삶의 연금술이라는 설명을 가진 책을 만났다. 언뜻 생각해보면 도무지 연결고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재미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소설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여든 살 생일을 앞두고 사랑에 빠진 것으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지붕에 위성방송 수신기를 설치하자 천 개가 넘는 채널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리모컨만 돌리던 어느 날 런던 올림픽에서 붉은 머리의 해머던지기 선수에게 첫눈에 반해버린다. 이탈리아 최북단 골짜기 마을인 베나스 디 카도레에서 주인공인 조반니 틸라미니는 태어났다. 아이스크림이 이 골짜기에서 발병됐다고 믿는 사람들. 최초의 아이스크림을 만든 사람은 조반니의 할아버지인 주세페 틸라미니다. 베나스 골짜기의 아이스크림 장수들은 매년 봄이 되면 집을 떠난다. 돈을 벌러 네덜란드로 떠나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하고 겨울이 되어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대대손손 아이스크림 제조하는 가업을 잇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조반니, 루카 형제는 아이스크림 장수 외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 조반니는 '리처드 하이만'이라는 사람을 만나 시를 알게 된다. 그는 후에 세계 시 축제의 디렉터로 세계 여행을 하며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동안, 동생 루카는 가업을 이으며 그만의 아이스크림을 만드는데 열중한다. 조반니는 자유를, 시와 자유를 얻는 대신에 가업을, 그가 첫눈에 반해버린 소녀를 포기해야 했다. 그 소녀는 동생의 와이프가 되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동생 부부에겐 아이가 없었다. 동생인 루카의 정자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 가업을 이을, 아내가 그토록 원하는 아이를 낳기 위해 루카는 형에게 은밀한 제안을 하는데...

그 은밀한 제안이 나오기까지는 사실 좀 지루하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시인인 주인공이 시인들과 시에 관해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내가 못 알아들을 뿐... 초반의 지루함을 이겨내며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그때부턴 속도가 붙는다. (그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야지!)

다들 먹고사는 걸로 고민을 한다. 나도 그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끔씩은 우리 부모님이 엄청 잘 나가는 가게를 하셔서 내가 가업을 이으면 어떨까? 아니면 음식 솜씨 좋으신 시어머니가 국숫집을 하셔서 그걸 내가 이어받는다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내가 지키고 이어나갈 무언가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착한 딸도, 착한 며느리도 아닌 내가 잠자코 그 일들을 물려받을 리 없다는 건 잘 알지만...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는 거예요! 절 틀 안에 가두려고 하지 마세요! 하며 냉큼 도망갔을거다. 안 봐도 뻔하지... 수의사였던 아빠는 동물을 좋아하는 나와 동물병원을 개업하고 싶어 하셨으나 난 과학을 못했다. 어린이집을 함께 하고 싶으셨던 엄마는 나와 어린이집을 차리고 싶어 하셨지만 난 애들을 싫어했다. 근데 무슨 가업이냐. 난 애초에 루카같은 인생은 살 수 없는 사람이었나 보다.

소설은 에로틱하고 유머러스하다고 뒷장에 적혀있는데 내가 아는 에로틱은 아니었다. (뭘 기대한 건가?) 하지만 그보다 좋은 느낌으로 남았다. 화자가 시인이라 같은 표현을 해도 뭔가 있어 보인다. 아이스크림이 혀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듯한 부드러움과 달콤함처럼 말이다. 책을 덮고 남은 여운이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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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를 그만두는 날
가키야 미우 지음, 고성미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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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에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소설을 읽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 읽었던 터라 그저 재미있는 발상이라고만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서야 알았다. '비독점적 다자연애' 이런 말 따위는 던져두고 여주인공인 인아는 보살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한 남자와 결혼했을 뿐인데 나에게 다른 세계가 열였다. 무려 시월드... 시월드는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또 결혼해서 시월드를 하나 더 가지겠다고? 그렇다고 이 책이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이란 제목만큼 사이다인 건 또 아니다. 며느리란 자리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또박또박 할 수 없는 자리가 결코 아니니까.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데(그것도 옛말이고 요즘은 장서갈등이 장난 아니라지?) 아직도 우리나라는 며느리는 무보수 백년종년쯤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나마 옛날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우리가 시부모가 되는 시대가 되기 전에는 반드시 없어지기를...

남편이 죽었다. 도쿄로 출장을 갔다는 사람은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뇌졸중으로 죽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무정했던 남편이었던지라 가요코는 그리 슬프지도 않았다. 자식이 없어 적은 액수의 보험금, 남편의 사망으로 갚지 않아도 된 주택 융자금, 그리고 무가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동안 벌 수 있는 월급이 가요코에게 남았다. 처음에는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곧 시어머님은 가요코의 집에 남편의 불단을 주문해 놓고 수시로 그녀의 집에 들락날락 거린다. 게다가 남편에게 분향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사오리라는 청순한 여자가 집에 와서 기도를 한 후에 기념으로 남편의 유품인 잠옷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가요코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은 시어머니, 치매 증세가 보이는 시아버지, 히키코모리인 시누이까지 가요코는 떠맡을 이유가 없었다. 의무만 남은 며느리 자리를 말이다. 가요코는 인척관계종료신고서를 제출하기로 하는데...

남편이 죽고 나서 나는 이제 누구의 아내도 아니 자유의 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카세 집안의 며느리'인 것이다, 그것도 남편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시집살이를 하면서... (p.104)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우아하고 본받고 싶은 시어머니가 남편이 죽고 나선 집착의 화신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나마 가요코의 시어머니는 남편이 살았을 땐 시집살이도 별로 안 시킨 것 같던데... 에휴. 말을 말자. 난 안 봐도 뻔하겠구나. 난 그동안 시댁의 호구였다. 내가 약간 츤데레 스타일이라 툴툴거리면서도 어머님 혼자 명절 준비하실까 봐 명절 연휴 전날부터 가서 일을 했더랬다. 그래도 늘 시부모님은 당연하게 생각하셨다. 이번에 어머님께서 수술하셔서 옆에서 병간호를 했다. 그때 어머님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난 그저 든든한 호구였던 거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내 탓을 하셔도 어머님이 속상하셔서 그러려니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다. 그래서 대학교 때 배웠던 i-messege를 시전했다.

"네가 어떻게 느꼈는지, 얼마나 싫었는지, 무엇이 슬펐는지, 그런 것들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돼. 과장해서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주눅 들어서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할 필요도 없어. 상대에게 휘둘리지 말고 너만의 세계에서 말하면 되는 거야." (p.226)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많이도 참아왔었다. 친정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엄마가 욕을 먹거나 칭찬을 들으니 잘 해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솟구쳤다. 가요코는 며느리를 그만 두기 위해 인척 관계 종료 신고서를 제출했고, 난 그런 서류가 있는지 몰라(우리나라도 있나?) 며느리를 그만두기 위해 아내도 그만 둘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그동안 쌓였던 걸 얘기했다. 참고 살다가 나중에 밤톨군의 아내에게 내 한풀이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으니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족을 이루는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왜 이런 상하관계가 생겨야하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한 사람을 믿고 그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것 뿐인데 말이다. 나 뿐이 아니라 오늘도 며느리라는 자리 때문에 한숨 쉬고 눈물 흘리는 사람을 많다. 시집 살이 이야기를 들으면 막장 드라마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그나마 나는 할 말은 하고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만 효자 아들과 산 우리 엄마는 그조차도 못했다.

어렸을 때는 며느리 자리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난 엄마의 시댁 식구들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난 만나 뵌 적 없지만 증조할아버지는 후처를 보신 탓에 나에겐 아빠 보다 젊은 할아버지들이 몇 분 있다. 덕분에 명절엔 촌수 낮은 엄마와 작은엄마들은 좁은 부엌에서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고 하루 종일 제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같은 ○씨들과 젊은 할머니들은 지루해하며 시간만 때웠다. 그땐 촌수가 낮으니, 그리고 며느리니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엄마의 부엌데기 시절은 아빠가 암 선고를 받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대신 엄만 부엌 대신 아빠 병실 옆을 지켜야 했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흘러 엄만 할아버지들 중 한 명에게 내 동생 결혼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전화를 거셨다. 그때 전화에서 들렸던 할아버지의 호통소리. "자네가 사람이가?" 이게 무슨 말인지? 할아버지는 엄마가 아빠 돌아가신 후 명절에 와서 일을 안 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순간 눈이 돌아버렸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엄만 그 젊은 할아버지들의 며느리도 아니었고, 할아버지보다도 엄마 나이가 더 많았는데 엄마에게 반말로 지껄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맨날 양반 타령하던 양반들이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엄마의 전화를 빼앗아들고 할아버지에게 엄마가 그동안 참아왔을 소리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다시는 전화 같은 거 하지도 않을 거고 하지도 말라고 소리 지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엄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지만 표정은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엄마의 시댁 인연은 내가 끊어드린 게 되었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내가 며느리가 된 후에도 엄마는 이 집안 며느리였다니... 일본처럼 인척관계종료신고 같은 게 있다면 진작해드렸을 텐데 죄송스러웠다.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 리뷰를 써야하는데 개인사만 계속 떠오른다. 아무래도 며느리라는 단어에 너무 감정이입이 됐기 때문일거다. 가족간에 있어서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없다. 이 소설도 그렇다. 다들 자기 입장이 있을 뿐... 나도 내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이번 명절엔 시댁을 이 책에 가져가봐야 하나 살짝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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