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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페미니즘
코트니 서머스 외 지음, 켈리 젠슨 엮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요즘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웹상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혐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곤 한다. 난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데 '재기해', '종현하라'라는 표현이 난무하는 혜화역 시위의 기사를 읽으니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페미니즘과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같은 게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다운 페미니즘은 무엇일까?
<나다운 페미니즘>은 44명의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엮은 책이다. 다양한 인종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고백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란 과연 뭘까?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인 1915년, <워싱턴 헤럴드>는 여러 사람에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한다. "페미니즘은 모든 성이 사회적, 법적, 정치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신조다."라는 답변이 나왔다고 한다. 이 정의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p.24) 이 명쾌한 정의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양쪽으로 나눠 싸움을 하게 하는지 의아하다. 서로 한남충과 메갈을 예를 들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진상은 그 어디에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좋은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고 하면 그곳의 진상은 바로 나!라고 하지 않는가? 남자만이 혹은 여자만이 살아남은 세상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재앙이다. 이상한 사람들의 말은 뒤로하고 멀쩡한 사람들끼리 얘기 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멀쩡할까?)
페미니즘에 정답은 없지만 남성을 배제하는 건 확실히 답이 아니다. 남성들도 여성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법을 찾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길 바란다. 남성들도 아내와 딸과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페미니스트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초대하자. (p.162)
우리나라의 경우 아무래도 군대 문제가 끼어있다 보니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는 여자들에게 남자들은 늘 군대라는 방패를 들고 대항한다. "그럼 너도 군대 가라!"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다. 양쪽 진영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는 여자도 군대를 가야 한다는 의견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까짓것(?) 군대 다녀오면 여자들이 요구하는 모든 걸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너그러운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못 가겠는가? 사실 난 군대를 자원하려고 했다. 고3 담임 선생님께서 묵직한 팩트를 날리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 체력장 점수 20점 만점에 18점 나온 거 아니? (대부분 만점을 받는데 18점이란 건...) 군대는 체력 떨어지면 못 들어간다." 내가 남자였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우리 집은 남자들도 군대를 못 가는 허약체질 집안이다. 쳇! 어쨌든 동일한 일에 동일한 임금을 받고,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며, 성추행과 성폭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깨어 있는 남자로서 나는 페미니즘이 내게도 이득이 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모든 젠더 고정 관념을 해제하고자 한다. '여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면서 '남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도 다시 정의한다. 남자들이 마음껏 감정을 표현하고, 사회가 정해 놓은 좁은 '남성성'의 틀에 스스로를 욱여넣지 않아도 되고, 본인의 고유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다고? 그게 페미니즘이라면, 나도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나는 자유롭고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두가 편안한 세상에서. 아무도 그늘에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아무도 조롱받지 않는 세상에서. (p.p. 35~36)
나는 늘 꺽정씨가 안쓰럽다. 남자라는 이유로, 우리 집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다는 이유로 어깨가 가장 무겁다. 그래서 농담반 진담반 '내가 호강시켜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라고 말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하니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충고를 했다. 남자는 책임감이 그를 키운다고 말이다. 내가 못한다고, 힘들다고 매달려야 더 노력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알아서 척척해내니까 나에게 오히려 의지한다고 말이다. 여자는 책임을 안 져도 된다는 말은 한 걸까? 남자는 언제나 강한 존재여야만 하는 걸까? 왜 여자라는 이유로 할 수 있는데도 못하는 척을 해야 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울지도 못하고 강한 척을 해야 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고정된 성 역할이 아니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걸 하면 안 될까?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 여성이 약자라는 느낌을 더 이상 받지 않는 날이 온다면 남자들도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펜스룰 같은 건 신경 꺼도 된다는 말이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나타낼 수도 있고, 등 떠밀린 가장이 아닌 동등한 위치의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44명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의 대부분은 예상과 달리(?) 혐오가 아닌 사랑이었다. 나와 함께 페미니스트가 되어달라고 손을 내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