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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 전에 <신과 함께>를 봤다. 한국적인 저승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매력적인 차사들이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염라대왕의 말이었다. '이승에서 진심으로 용서를 받은 죄에 대해서 저승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진심 어린 용서를 받는 것이 깐깐하다 못해 촘촘한 저승법을 통과할 정도라면 얼마나 받기 힘든 것일까.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둘러보던 날이었다. 그리고 발견했던 카드 뉴스. 성폭행 피해자와 가해자가 TED에 나와서 강연을 했다는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유튜브를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분위기는 고요했다. 'Our story of rape and reconciliation'이란 제목이었는데 차분하면서도 확고한 어조로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1996년 겨울, 열여섯 소녀가 교환학생으로 아이슬란드에 유학 온 열여덟 살 호주 소년, 심지어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녀는 버림을 받는다. 그 후로 섭식 장애, 알코올 의존, 자해 등 그녀는 자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어느 황량한 오후에 연인과 싸운 후 흐느끼며 카페에 들어가 낙서를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던 중 자기 자신이 한 낙서를 보게 된다. 놀랍게도 '나는 용서하고 싶어.'라는 문장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6년 겨울 이후로 모든 것을 망가지게 한 그 남자를 용서라니!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강간했던 남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무시나 부정이 아닌 후회와 참회로 가득한 답장에 놀란다. 그 후로 8년간 30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사건의 매듭을 풀고자 직접 대면하기로 결심한다. 2013년 봄, 각자 살고 있는 아이슬란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간 지점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만나기로 한다. 강간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성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일주일 동안 그들은 케이프타운을 둘러보며 서로를 치유하며 용서와 화해를 하게 된다. 이 책은 그 둘의 일주일 기록이다.
"네가 날 눕힌 자리에서는 바로 눈앞에 시계가 보여서 똑똑히 봤어. 형광 시계여서 캄캄해도 보였어. 나는 머리는 활짝 깼는데 몸은 여전히 꼼짝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뒤척이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어. 할 수 있는 거라곤 일이 끝날 때까지 일분일초를 세는 것 밖에 없었어."
창밖에서 바람이 처참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두 시간은 7200초야." 내가 덧붙였다. p.189
그 7200초는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무력하게 받아들였다. 사건 이후로 그녀는 누구와도 안정된 관계를 맺기 어려워했다. 그리고 섭식 장애, 알코올 의존, 자해까지... 토르디스는 성폭행 피해자라고 그녀를 말하지 않는다. 성폭행 생존자라고 말한다. 가해자가 성폭행 후 피해자를 죽이는 경우를 보면 이 표현은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피해자라고 하는 건 과거에 발이 묶이는 것이나 생존자라고 하면 현재와 미래를 염두에 두는 것이니까. 그녀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새장의 열쇠를 발견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아이슬란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왔음에도 톰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은 안전해.' 푸른 눈은 그대로지만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는 걸 애써 생각해내야 했다.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저렇게 흔들려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번 주에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하다 보니 나를 묶고 있던 무겁고 오래된 사슬이 다시 나타나 둔중한 쇳소리를 내며 나와 그날 밤 사건 사이의 간격을 팽팽하게 조여왔다.
순식간에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p.89
그는 열여덟 살 때 저지른 일을 애써 부인하면서 살았다. 좋은 집에서 반듯한 교육을 받는 그는 그가 그런 사악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거짓된 믿음으로 덮어버렸다. 회피 시스템은 잘 유지되었지만 때때로 그녀가, 아이슬란드가, 그날의 장소인 웨스트먼 제도가 생각날 때면 '강간범'이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그를 심연 속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었고 결심했다. 강간범, 위선사, 가해자라는 딱지가 표면에 올라올지라도 그 용기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어떤 활동보다 더 강력한 힘을 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옳은 편에 서고 싶었다.
"자기 행동을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최선을 다해 보상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으면 넌 어떻게 해? 가만 앉아서 그들을 비판해? '와,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있나'라고 생각해?"
"아니, 그러지는 않아."
"바로 그거야. 반대로 말해보자. 실수를 진심으로 후회하는 사람이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네가 그 사람이 되어봐." p.141
그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렇기에 그녀도 그를 (그나마)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성폭행이라고 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와 뻔뻔하게 변명을 하거나 큰 소리로 부인하는 가해자만이 떠올랐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나왔던 소라넷 편이 기억났다. 술 취한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도 그녀들이 강간당한 의식이 없기에 자신은 강간범이 아니라고 했던 남자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했던 사람들. 그리고 영화 <한공주>. 강간 생존자였던 여성이 힘들게 살고 있는 반면 가해자들은 오늘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그중에 몇몇은 결혼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톰 스트레인저의 후회와 참회는 (당연한 것임에도) 대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꼬마들끼리 작게 투닥거려도 우리는 '미안해',와 '괜찮아'를 가르친다. 그런데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사람들의 뇌구조는 어떤 걸까.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스스로 용서하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라.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이니,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구애받지 말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시간을 갖길 바라. 하지만 내가 오르는 산은 네 것과 달라. 그리고 난 정상에 아주 가까이 와 있어. p.p. 47~48
그녀는 트라우마가 자신을 집어삼키기 않도록 하기 위해 용서를 해야 했다. 용서를 하기 위해 만난 톰이지만 때때로 그에게 날이 서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피하지 않았다. 자기 안으로 숨으려 드는 그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대등하게 맞선다.
"사람들이 선생님께 한 짓을 용서할 수 있으세요?"
해괴한 질문도 다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이제껏 들어본 것 가운데 가장 진심 어린, 천진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폭포처럼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내게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물론이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다 용서했어요. 그래야만 다음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p.278
로벤섬에서 오랫동안 갖은 핍박을 받은 죄수였던 가이드가 그들에게 건네준 단순하지만 강력한 진리에서 해답을 찾는다. 진심으로 톰을 용서한 토르디스. 그녀는 마음에 평화가 깃들고 가슴에서 무거운 짐이 치워졌다. 그리고 그도 자유함을 가질 수 있었다. 용서란 그런 것인가보다. 이제 그들은 강간 반대 시위(slut Walk-옷차림이 강간을 초래한다는 편견에 저항하고자 참가자들이 노출 수위가 높은 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한다)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다닌다. 가이드의 말처럼 용서는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너는 성장하고 사랑하고 도전하다가 길도 잃겠지만 다시금 길을 찾아서 언제나 그래왔듯 또 다른 미치광이 목적지를 향해 떠날 거야. 그건 변함이 없을 거야. 절대로.' p.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