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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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하기 전엔 책을 읽고 나서 덮으면 그만이었다. 때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났을 때 필사를 하기도 했지만 크게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고 시작하고 나의 부족함을 매번 마주한다. 분명 같은 책을 읽었는데 리뷰의 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욕심이 커갈수록 리뷰는 쓰기가 어려워졌다. 리뷰는 자기만족이지, 난 서평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쓸 수 있는 만큼만 쓰자~라고 맘을 먹지만 그게 맘먹은 대로 슝~ 비워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라니... 그럼 책 리뷰도 잘 쓸 수 있는 거지요? 더군다나 흑임자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이라니! 믿어본다.


누군가 물어본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냐고.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지만, 가끔 이렇게 대답한다.
잘 쓰려고 하지 않으면
쉽게 쓸 수 있다고.
잘 그리려고 하지 않으면
쉽게 그릴 수 있고,
잘 부르려고 하지 않으면
언제든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다.
나아지려고 하는 마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오히려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시간이 쌓이면 언젠가는 잘하게 될 테니
지금은 부담을 내려놓고 쉽게 쓰고 그려보자.   (p.p. 4~5) 


잘하고픈 욕심이 나를 힘들게 했다. 힘 빼고, 맘 편하게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는 대로 써볼란다. 그래서 아무래도 오늘의 리뷰는 의식의 흐름대로 쓸 것 같다.

김중혁 작가는 책상 위에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도구들을 소개해준다. '장인은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라고들 하는데 나는 장인이 아니기에 언제나 장비를 탓한다. 저렴한 코바늘을 사고 손가락이 아파서 뜨개질이 힘들었다며 누가 봐도 예쁜 코바늘 세트를 갖추고, 색상이 모자라서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림이 안 나온다며 전문가용 수채색연필을 갖췄다. 그런데 작가의 도구들이라니~ 심지어 이 책에 나오는 그림은 김중혁 작가가 다 그렸다는 사실! 모두 아이패드 프로 10.5에 애플 펜슬로 그렸다고 한다. 장비를 갖추고 싶은 내 마음이 설렌다. (<단순한 삶의 철학>에서 나온 지름신 방지 부적을 되뇌어본다. '허영심과 상의하기 전에 먼저 지갑과 상의하라!' 아 눼~ ㅜㅜ) 그리고 키보드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예쁜 키보드에 살짝 로망이 있는 난 책을 읽다가 키보드 검색을 하고... 글을 써보기도 전에 파산할 지도...


실제로 미술관에서 이보다 더한 걸로, 새하얀 캔버스 위에 가늘고 붉은 줄 하나를 세로로 찍 그어놓은 작품도 봤다.
헤어 실버맨에게 그 붉은 줄 그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런 건 나도 하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안 했잖아."  (p.283)


순간 아득해졌다. 뭔가를 이룬 사람들에게 시기 어린 질투를 하며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어!'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나. 그나마 책 리뷰는 블로그에 작성하기에 붉은 물감 정도는 팔레트에 붓지 않았을까 위로해본다. 수많은 선을 연습장에 긋다 보면 언젠가는 새하얀 캔버스에도 그릴 수 있을지 있겠지.

책의 뒷부분은(거의 절반 가까이) 실전 그림 그리기와 대화 완전 정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 완전 정복은 언어영역처럼 지문이 있고 예상되는 대답을 맞추는 건데, 난 딱 한 문제 맞혔다. (이런!) 수능에서 언어영역이랑 외국어영역은 엄청 잘 봤는데 왜 이런 결과가? 책을 읽는데 이해력이 떨어지고, 관찰력이 부족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책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리뷰 쓸 때마다 골머리를 앓은 게 아닌가 자책도 해봤다. 결론은 그냥 내 맘대로... '사람마다 꼭 같은 걸 느껴야 하는 건 아니니까'라고 애써 위로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글쓰기 속에서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p.137)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작가도 글쓰기가 어렵단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실재하는 현실과 무척 닮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고... 블로거 흐링과 현실 속의 나와는 다르다.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고 싶고, 그래서 단어를 고르고 골라 키보드를 두드린다. 그러면서 깨닫는 게 있었다. 20대 초반까지의 나는 자존감이 낮았다. 왕따도 경험했고,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의 말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시간이 흘러 사랑하는 이도 만나고, 그를 꼭 닮은 아이를 낳고 생각이 변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나와는 다르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고민하고, 남은 느낌들을 글로 표현하면서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됐으니까. 앞으로 좋은 책과의 인연을 더 만들고, 여운을 적다 보면 더 나은 사람으로 내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긴다. 물론 그때도 글쓰기는 여전히 어려울 거다. 그래도 무엇이든 써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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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의 철학
엠리스 웨스타콧 지음, 노윤기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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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게, 단순하게 살고 싶다. 한편으로는 부유하게 또 바쁘게 살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 안에는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멈리스트가 늘 싸움질이다. 미니멀리스트는 '제대로 된 거 하나를 사라!'라고 말하고 맥시멈리스트는 '가격도 저렴하니 깔별로 모아보자!'라며 각각의 지름신을 나에게 인도한다. 현실은 '다음에~'를 외쳐야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마음이, 지갑이 편하진 않다.(온전히 지름신을 영접한 날도 불편하긴 마찬가지) 마음속의 보관함은 늘 온갖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로또라도 당첨되는 날에 지를 대기목록에 가깝다.
 
<단순한 삶의 철학>의 부제는 '세상의 스크루지들을 위한 철학의 변명'이다. 저자인 엠리스 웨스타콧은 가족들이 인정한 구두쇠라고 한다. (변기 솔 거치대를 구입하는 대신 우유팩을 사용한다고 하니... 김생민씨도 울고 갈 정도다.) 그는 단순한 삶의 가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글로만 채우지는 않았다. 소박함의 철학을 반대하는 주장들도 함께 다룬다.

우리는 단순한 삶을 미덕으로 여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가 소형차를 타고, 혹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존경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일 뿐이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미니멀리즘, 근검절약을 꿈꾼다) 스타들의 화려한 일상과 그들이 가진 풍요로움을 부러워한다.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은 현재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소크라테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간디 등이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나 씨알도 안 먹힌다.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르겠으나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말이 있는데 대부분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 나만 해도 '뭐 이딴 선택지가 다 있어?'라고 화를 내 후에 옆에 3번이라 쓰고 재벌 2세를 적을 것 같다. 땅콩만 안 던지면 되는 거 아닌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게 더 쉬운 목표일 듯. 하지만 소비가 세상을 움직이는 만큼 모두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는 사야 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익으로 누군가는 또 살아간다. 결과적으로 돈을 쓰되 넘치게 쓰는 게 아니라 덜 쓰고, 물건은 더 사용하자는 거다. 그렇다고 오래만 사용하는 것 또한 능사는 아니다. 최신형 에어컨은 전기세 팍팍 잡아먹는 에어컨보다 전기 세도 훨씬 더 적게 나온다. 단순하게 사용하는 것 또한 머리를 쓰고 발품을 팔아야 한다.

책에는 큼지막하게 붙어놓으면 좋을 글귀들이 많다. 한 푼 아낀 것은 한 푼 번 것이다, 입이 호사스러우면 의지가 약해진다. 바보는 잔칫상을 차리고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먹는다, 허영심과 상의하기 전에 먼저 지갑과 상의하라, 지나치게 지루하지 않다면 단순한 인간관계와 단조로운 일상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한다(쇼펜하우어) 등 지름신을 막는 부적이 꽤 많다. 하지만 자린고비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소박하면서도 부유하게 누리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 내 지인 중에 하나는 집에 필요 없는 물건이 거의 없다. 자신이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혹은 버린다. 서울시 땅값을 생각하면 0.1평이라도 온전히 자신이 즐겨야 한다는 거다.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았다. 꼭 필요한 걸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닌 물건들이 자리 차지하고 앉아 내게 돌아오는 좁은 공간은 짜증스럽다. 예쁜 몸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재료로 만든 적당량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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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
J. 라이언 스트라돌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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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책을 읽는 게 취미였던 적이 있었다. 일단, 영어로 적힌 요리책은 영어 단어를 많이 몰라도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맛깔나게 찍힌 음식들의 사진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무슨 맛이 날까 상상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끔씩 한번 해볼 만하다 싶은 음식들은 상상력을 십분 발휘해서 만들어보기도 했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만들어보는 건 일종의 작은 모험이다. 때로 그런 나의 모험 때문에 고통(?) 받는 가족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놀랍게도 예민한 미각을 가진 에바와 달리 미맹 수준이기 때문이다. 소량의 소금과 설탕의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 (덕분에 학창시절 집에서 나의 별명은 '살인주방장'이었다) 반대로 엄마와 남동생은 한번 먹어보면 에바처럼 들어간 재료들을 대략 맞추고 맛도 비슷하게 구현해낸다. 대신 나에겐 뭐든 맛있게 먹는 재능이 있는 걸 위안을 삼아본다.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은 천재적인 미각을 가진 괴짜 소녀가 미국의 최고의 셰프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음식 이름을 모티브로 한 각 장마다 다른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에바가 화자인 '초콜릿 아바네로'를 제외하면 에바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그녀를 알게 되고 에바라는 여운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없이 추락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우리도 에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린 누군가를 만나고 알게 되면서 그들에게 '나'라는 여운을 남긴다. 너무나 미미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도 있고, 누군가의 인생에 커다란 흔적을 남길 때도 있다. 우린 서로에게 무의식적으로 혹은 교묘하게 영향을 주곤 하니까. 각 장의 화자들은 릴레이 경주를 하듯이 바통을 이어받아 에바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성장기를 스토커처럼 따라붙어 알고 싶어 하는 나에겐 그런 점에서 좀 아쉽기도 했다.

여덟 개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건 첫 장인 '루페피스크'였다. 요리사이자 딸바보인 라르스 토르발은 이제 생후 4개월이 된 에바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먹이고 싶어 안달이다. 아기에게 다진 땅콩이 들어간 당근 케이스를 먹여도 될지 걱정이 돼서 의사까지 찾아간 라르스. 항정살이 들어간 퓌레는 두 살이 되면 먹이라는 말에 자신의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고 한 그를 보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귀여운 아저씨의 이야기로만 책을 채워도 좋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얼마나 속상하던지... 작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를 왜? 왜?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에는 아무래도 부엌들의 이야기라 많은 요리들이 나온다. 레시피를 읽어보는 게 재미있었다. 요리의 이름들만 들으면 나로선 알 수가 없으니... '서코태시'는 처음 들었을 때 감도 못 잡았다. 무슨 사자성어인 줄... ㅡ.ㅡ;;  책에 레시피가 나오지 않은 요리들은 검색을 해보며 읽었다. 배고플 때 읽어서는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였다. 오늘은 나도 라르스와 에바에 빙의해서 건강한 재료를 가지고 정성이란 조리법으로 사랑을 양념 발라 저녁을 준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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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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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신과 함께>를 봤다. 한국적인 저승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매력적인 차사들이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염라대왕의 말이었다. '이승에서 진심으로 용서를 받은 죄에 대해서 저승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진심 어린 용서를 받는 것이 깐깐하다 못해 촘촘한 저승법을 통과할 정도라면 얼마나 받기 힘든 것일까.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둘러보던 날이었다. 그리고 발견했던 카드 뉴스. 성폭행 피해자와 가해자가 TED에 나와서 강연을 했다는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유튜브를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분위기는 고요했다. 'Our story of rape and reconciliation'이란 제목이었는데 차분하면서도 확고한 어조로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1996년 겨울, 열여섯 소녀가 교환학생으로 아이슬란드에 유학 온 열여덟 살 호주 소년, 심지어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녀는 버림을 받는다. 그 후로 섭식 장애, 알코올 의존, 자해 등 그녀는 자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어느 황량한 오후에 연인과 싸운 후 흐느끼며 카페에 들어가 낙서를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던 중 자기 자신이 한 낙서를 보게 된다. 놀랍게도 '나는 용서하고 싶어.'라는 문장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6년 겨울 이후로 모든 것을 망가지게 한 그 남자를 용서라니!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강간했던 남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무시나 부정이 아닌 후회와 참회로 가득한 답장에 놀란다. 그 후로 8년간 30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사건의 매듭을 풀고자 직접 대면하기로 결심한다. 2013년 봄, 각자 살고 있는 아이슬란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간 지점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만나기로 한다. 강간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성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일주일 동안 그들은 케이프타운을 둘러보며 서로를 치유하며 용서와 화해를 하게 된다. 이 책은 그 둘의 일주일 기록이다.


"네가 날 눕힌 자리에서는 바로 눈앞에 시계가 보여서 똑똑히 봤어. 형광 시계여서 캄캄해도 보였어. 나는 머리는 활짝 깼는데 몸은 여전히 꼼짝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뒤척이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어. 할 수 있는 거라곤 일이 끝날 때까지 일분일초를 세는 것 밖에 없었어."
창밖에서 바람이 처참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두 시간은 7200초야." 내가 덧붙였다. p.189


그 7200초는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무력하게 받아들였다. 사건 이후로 그녀는 누구와도 안정된 관계를 맺기 어려워했다. 그리고 섭식 장애, 알코올 의존, 자해까지...  토르디스는 성폭행 피해자라고 그녀를 말하지 않는다. 성폭행 생존자라고 말한다. 가해자가 성폭행 후 피해자를 죽이는 경우를 보면 이 표현은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피해자라고 하는 건 과거에 발이 묶이는 것이나 생존자라고 하면 현재와 미래를 염두에 두는 것이니까. 그녀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새장의 열쇠를 발견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아이슬란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왔음에도 톰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은 안전해.' 푸른 눈은 그대로지만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는 걸 애써 생각해내야 했다.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저렇게 흔들려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번 주에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하다 보니 나를 묶고 있던 무겁고 오래된 사슬이 다시 나타나 둔중한 쇳소리를 내며 나와 그날 밤 사건 사이의 간격을 팽팽하게 조여왔다.
순식간에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p.89


그는 열여덟 살 때 저지른 일을 애써 부인하면서 살았다. 좋은 집에서 반듯한 교육을 받는 그는 그가 그런 사악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거짓된 믿음으로 덮어버렸다. 회피 시스템은 잘 유지되었지만 때때로 그녀가, 아이슬란드가, 그날의 장소인 웨스트먼 제도가 생각날 때면 '강간범'이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그를 심연 속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었고 결심했다. 강간범, 위선사, 가해자라는 딱지가 표면에 올라올지라도 그 용기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어떤 활동보다 더 강력한 힘을 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옳은 편에 서고 싶었다.


"자기 행동을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최선을 다해 보상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으면 넌 어떻게 해? 가만 앉아서 그들을 비판해? '와,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있나'라고 생각해?"
"아니, 그러지는 않아."
"바로 그거야. 반대로 말해보자. 실수를 진심으로 후회하는 사람이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네가 그 사람이 되어봐." p.141


그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렇기에 그녀도 그를 (그나마)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성폭행이라고 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와 뻔뻔하게 변명을 하거나 큰 소리로 부인하는 가해자만이 떠올랐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나왔던 소라넷 편이 기억났다. 술 취한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도 그녀들이 강간당한 의식이 없기에 자신은 강간범이 아니라고 했던 남자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했던 사람들. 그리고 영화 <한공주>. 강간 생존자였던 여성이 힘들게 살고 있는 반면 가해자들은 오늘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그중에 몇몇은 결혼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톰 스트레인저의 후회와 참회는 (당연한 것임에도) 대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꼬마들끼리 작게 투닥거려도 우리는 '미안해',와 '괜찮아'를 가르친다. 그런데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사람들의 뇌구조는 어떤 걸까.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스스로 용서하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몰라.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이니,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구애받지 말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시간을 갖길 바라. 하지만 내가 오르는 산은 네 것과 달라. 그리고 난 정상에 아주 가까이 와 있어. p.p. 47~48


그녀는 트라우마가 자신을 집어삼키기 않도록 하기 위해 용서를 해야 했다. 용서를 하기 위해 만난 톰이지만 때때로 그에게 날이 서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피하지 않았다. 자기 안으로 숨으려 드는 그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대등하게 맞선다.


"사람들이 선생님께 한 짓을 용서할 수 있으세요?"
해괴한 질문도 다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이제껏 들어본 것 가운데 가장 진심 어린, 천진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폭포처럼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내게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물론이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다 용서했어요. 그래야만 다음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p.278


로벤섬에서 오랫동안 갖은 핍박을 받은 죄수였던 가이드가 그들에게 건네준 단순하지만 강력한 진리에서 해답을 찾는다. 진심으로 톰을 용서한 토르디스. 그녀는 마음에 평화가 깃들고 가슴에서 무거운 짐이 치워졌다. 그리고 그도 자유함을 가질 수 있었다. 용서란 그런 것인가보다. 이제 그들은 강간 반대 시위(slut Walk-옷차림이 강간을 초래한다는 편견에 저항하고자 참가자들이 노출 수위가 높은 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한다)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다닌다. 가이드의 말처럼 용서는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너는 성장하고 사랑하고 도전하다가 길도 잃겠지만 다시금 길을 찾아서 언제나 그래왔듯 또 다른 미치광이 목적지를 향해 떠날 거야. 그건 변함이 없을 거야. 절대로.'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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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앤디 위어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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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몽실러들 사이에 핫했던 책 <아르테미스> 덕분에 마크가 죽도록(?) 감자 캐는 이야기인 <마션>까지도 덩달아 유행이었다. 난 <마션>은 예전에 읽어서 패스하고, 알라딘에서 하루 동안 10년 대여로 이북 판매하길래 잽싸게 구입. 밤마다 야금야금 아껴 읽었더랬다.

달에 생긴 최초이자 유일한 도시 아르테미스.  지구인이라면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주인공인 재즈 바샤라는 짐꾼(포터)로 일하며 살고 있다. 재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게 그녀의 삶의 철학이다. 가끔씩 밀수도 하고 가벼운 범법 행위는 저지르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에 굳건한 이슬람교도인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술도 즐기도 자유로운 성생활도 한다. 전남친들이 게이, 아동성애자라는 흑역사도 덕분에 따라붙긴 하지만... 어느 날 달에서 가장 부자인 트론이 엄청난 거금을 걸고 은밀한 제안을 하면서 재즈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돈의 유혹 앞에 제안을 받아들인 재즈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산체스 알루미늄사의 수확기를 파괴하려 몰래 잠입하는 건 성공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계획은 실패하고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녀에게 제안한 트론마저 살해되면서 그녀는 킬러에게 쫓기는데...

<마션>을 엄청 재미있게 읽었었다. 과알못이라 아주 쉽게 재미있게 설명해줘도 하나도 못 알아 들었지만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달에서 살아남으려고 감자 심고 캐고 먹는 거니까. 앤디 위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화성이 아닌 달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그리고 현재가 아닌 70년 후의 미래. <마션>이 첫 작품임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기에 아마 부담감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아르테미스>는 어린 수학 천재의 좌충우돌 모험기라 할 수 있다. 앤디 위어는 재즈란 인물에 자연스럽게 사우디 아라비아인이 떠올랐다는데 난 표지의 경쾌한 이미지 때문인지 주황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소녀가 떠올랐다. 아마 영화 <마션> 때 화이트 워싱이 워낙 논란이 되어서 정확하게 인종을 밝힌 게 아닐까 한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는 많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정말 가능할지 증명하며 읽을 수 있어서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나 과알못인 나는 그런가 보다 하며 읽어도 재미없거나 어렵지 않았다. (원래 무식하면 질문 자체도 없는 법이 아닌가) 재즈가 달의 중력을 설명할 때는 궁금해졌다. 지면을 가볍게 통통 튀는 느낌은 어떨지... 관절염이 걱정의 대부분일지도 모르는 70년 후엔 나도 달나라로 여행을 갈 수 있을지... 난 SF 소설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아무래도 상상력이 점점 빈곤해지다 보니 내가 구축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가 한계가 있기 때문일 터. 그럼에도 이 소설은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고 넘나 재미있다. 재즈가 어떻게 될지 (물론 해피엔딩임을 알고 있지만)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가 영화화된다고 한다. 주인공은 누가 될지, 중력을 어떻게 표현할지, 많은 부분이 궁금해진다. 빨리 읽고 싶었던, 그러나 재미있는 만큼 아껴읽고 싶었던 아르테미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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