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갱의 일상과 습격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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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북카페 2월 이사카 미션 도서인 명랑한 갱 시리즈. 난 전편인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표지보다 <명랑한 갱의 일상과 습격> 표지가 더 좋다. 좋아하는 파란색 배경에다가 톡톡 튀는 듯한 주인공들을 표현한 일러스트라 그런가 보다. 그런데 초 단위로 세상을 인지하는 유키코는 한눈에 딱 알겠는데 나머지 두 아저씨는 누군지 아직도 영 감이 안 잡힌다. 토끼옷을 입은 아저씨는 동물을 좋아하는 구온인가? 맨날 구온 청년이라고 하는데 토끼옷을 입은 아저씨의 얼굴은 좀 변태스럽다고나 할까? 이상한 걸 어깨에 걸고 있는 아저씨도 모르겠고... 리더인 나루세라 하기에 좀 뭔가가 애매하다. 누가 답을 안다면 좀 알려주시길... 10년 전부터 궁금했다고!!

책의 전반부는 갱 각자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들이 주인공이기보다는 그들의 주변인들이 겪은 이야기다. 시청 공무원 나루세가 부하직원과 지진 관련 강연을 들으러 가는 길에 만난 옥상의 인질과 괴한, 교노의 카페 단골손님의 환상의 여인 찾기, 유키노가 파견근무하는 회사 동료의 작은 미스터리, 구온이 우연히 공원에서 만난 아저씨의 목숨을 구해주는 이야기가 모이면서 큰 이야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사카의 책은 작은 것 하나하나 놓치면 안 된다.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기 때문.

"4분, 즉 240초 동안, 얌전히 계시기 바랍니다. 제가 약속합니다만, 만일 여기서 용기를 시험해보고자 반항을 꾀하는 분이 계시면, 그분은 권총을 맞고 바람직하지 못한 부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까닥 잘못했다간 평생 더불어 가게 될 부상을 입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반대로, 만약 여러분들이 모두 순순히 협조해주시면, 무사히 각자의 집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뿐 아니죠. '나는 은행 강도를 보았다'라고 아는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현명한 선택일까 모쪼록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부상을 입느냐, 아니면 재밌는 이야깃 거리를 가져가느냐. 우리들은 여러분을 헤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돈은 빼앗을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은행의 돈을 빌려 가는 것뿐입니다. 국가의 비호 하에, 이자는 올리지 않으면서 남의 돈 갖고 돈놀이를 해 제 주머니 불리는 은행의 돈을 말입니다."  ( P.194 )

이런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은행강도를 맞닥뜨리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릴 것만 같다. 진짜 요즘 이자는 넘 안 주니까!! 물론 내 계좌에 들어있는 돈의 양이 보잘것없어서 그런 건 다 안다만 그래도 가끔씩 넘 밉다. 숫자로만 존재하는 돈에 이자를 붙여주지는 못할망정 수수료는 얼마나 잘 가져가는지... 저런 명랑한 갱이라면 수다쟁이 교노의 말처럼 지인들에게 엄청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 수 있을 듯하다.

본편 보다 나은 속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마찬가지다. <명랑한 갱의 일상과 습격>은 훨씬 재미있는 속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명랑갱의 뒷이야기는 또 어떨지 궁금해진다. 3편도 있는 거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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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그림자 모삼과 무즈선의 사건파일
마옌난 지음, 류정정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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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읽은 <사신의 술래잡기>의 후속편이다. 모삼과 무즈선, 중국판 셜록 홈스와 왓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둘의 추리를 재미나게 읽었던 터라 이번에도 기대 만빵. 그리고 무엇보다 잔인한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L의 존재도 너무나 궁금했고...

<사신의 술래잡기>에 이어 L의 게임은 계속된다. 무즈선의 집에 함께 있던 모삼에게 도착한 택배,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분리된 권총이다. 중국 경찰에서 사용한다는 64. 그 총은 누구의 것인가? 간신히 피해자를 구해내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사건. 불탄 집에서 발견된 다섯 구의 시체, 그중에서 가장 어린 여자는 불이 나기 전에 이미 죽어있었다. 모범생에 예쁘기까지 한 그녀에게 악의를 품은 자는? 해당화 아래에 있던 눈 없는 시체, 건물의 옥상에서 발견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죽은 네 구의 시체, 살인사건을 신고하러 온 여자, 그러나 그녀가 말한 곳에는 이미 시체가 사라진 후였는데...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프랑스를 다녀오는 무즈선, 그를 태운 비행기는 폭발하고 만다. 그는 어디에? L이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나 자신을 그로 변화해보려고. 나와 L간의 가장 큰 차이는 그가 변태 살인마인데, 많은 일에서 우리보다 더 투철하다는 거야. 살인 사건이든, 정보든, 법률이든, 경찰청 내부의 일들까지. 많은 것을 손에 잡았어, 그중엔 나도 있어. 그런데 근본적으로 볼 때 난 그를 안다고 볼 수 없어. 우리는 그와 여러 번 접촉했지만 아주 진전도 없어. 이게 무엇 때문인 것 같아?"  ( p.94 )

L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잔인한 변태 살인마라는 건 틀림없지만) 악이 아니라 악을 처단하는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머털 도사와 108 요괴> (이거 알면 최소한 30살 이상이려나?)에서 내기요괴를 꼬드겨서 요괴들을 잡아오게 하는 머털도사가 생각난다는 말이지. L은 중국 경찰들도 미처 연관성을 알지 못한 연쇄살인범의 비밀들을 모삼에게 던져주고, 모삼과 무즈선은 L이 준 단서를 따라 범인을 잡는다. L의 기가 막힌 정보력과 머리와 기술을 좋은 곳에 썼다면 어땠을까 가정을 해본다. 그러나 책의 결말처럼 L이 그럴 수 없었던 이유도 나오기에 어느 정도 납득은 된다만...

모삼과 무즈선 콤비의 이야기는 한동안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오랜 숙적 L과의 인연도 여기서 끝날 테니까. 살짝 열린 결말이라 후속편을 기대할 수 있지만, 나는 'L  더 비기닝'을 원한다네. <사신의 술래잡기>에선 꽃미남 무즈선의 매력에 빠졌지만 <사신의 그림자>를 읽고선 L의 과거가 더 궁금해졌다. 그의 눈으로 보는 범죄도 꽤나 흥미가 있을 것 같다. 이대로 그를 떠나보내는 건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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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동물학교 1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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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책을 만났다. 무지개다리를 건넌 동물들이 인간으로 환생하기 위해 학교에 다닌 이야기라니... 나는 아직 읽기 못한 <고양이 낸시>의 작가인 엘렌 심의 신작이다.

착한 동물들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 p.12 )

환생동물학교의 동물들은 이곳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배우며, 서서히 동물의 본성을 지워나간다. AH-27반의 새로운 담임이 된 주인공과 고양이, 강아지, 고슴도치, 하이에나 등 학생들의 이야기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잘 대해줬던 주인들을 그리워하며 인간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다. 고양이 쯔양의 주술 막대에 대한 추억(레이저 포인터)에선 웃음이 터졌다. "주인이 이것을 들면 어디선가 빨간 점이 나타나, 그 빨간 점의 무서운 점은 절대 눈을 뗄 수가 없다는 거야..."  ( p.62 ) 우리 '보리'도 그랬다. 레이저 포인터를 이리저리 돌리면 반드시 잡아야 하는 물건이라도 되는 양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몇 번을 해도 홀린 것처럼 잡으러 다녔는데... 어쩜 우린 고양이의 환생이라 프레젠테이션 때 레이저 포인터의 불빛을 끊임없이 뒤쫓는지도 모르겠다. 하이에나 비스콧의 이야기는 안쓰럽고 슬펐다. 주인이 준 선물이라며 늘 입마개를 하는 비스콧. 알고 보니 인간들이 하이에나를 길들이기 위에 좁은 동굴에 가둬 굼겼다가 죽기 직전에 주인이 될 사람이 구해준다. 그럼 하이에나는 그 사람을 생명의 은인으로 인식하고 평생 동안 충성을 한다는 거다. 주인을 사랑하고 따르는 건 하이에나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태어나고 길러진 반려동물들은 평생의 우정을 함께 하고자 하는데 인간들은 길들여놓고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떠올랐다. <동물농장>을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저 지겨워진 액세서리 버리듯이 쉽게 버리고 또다시 사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했던 반려동물들은 그 자리에서 한없이 기다리는데...

한없이 순수한 아이들을 보며 이 아이들이 오히려 인간답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다운 게 뭐냐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배려한다. 그런데 요즘 일상을 달구는 SNS 미투 운동을 보면 거기에 거론되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보며, 이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 같다, 아니 짐승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떤 동물이 환생동물학교에서 제대로 못 배워 저렇게 태어났을까? 전생에 사람이었다면 환생하지 못하고 일곱 지옥에서 헤매고 있을 텐데... 환생동물학교 아이들아, 너희들의 순수한 모습에 내가 다 부끄럽구나.

뽀삐야, 보리야 너네들은 환생하지 말고 나 죽걸랑 마중 나와 있어줄래? 오랫동안 못 봐서 너무나 보고 싶구나.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때 그 시절로 한 번만이라도 돌아가 너희들을 다시 안아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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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
아이라 바이오크 지음, 김고명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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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책상 위에 있는 걸 보고 꺽정씨가 대뜸 "사랑해요~"라며 고백을 했다. 꺽정씨의 고백처럼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할 말들은 독기가 서려 아프게 하거나, 남탓을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랑해, 고마워, 용서해줘, 용서할게... 잠들기 전에 듣고 싶은 말들은 바로 이런 말들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의 저자인 아이라 바이오크는 40년 넘게 호스피스를 하고 있는 전문가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알려주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중한 네 마디를 용기를 가지고 한 뒤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이다. 우리 가족 그러니까 꺽정씨와 밤톨군과는 자주 하는 네 마디 말이다. 뜬금없이 '사랑해!'를 말하기도 하고, 내가 저녁식사를 내놓았을 때, 꺽정씨가 쓰레기봉투를 버렸을 때, 밤톨군이 먹는 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놨을 때 우린 '고마워~'를 연발한다. 밤툴군은 심지어 "고맙다고 해야지!!"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그리고 '미안해!', '괜찮아!'도 자주 말한다. 신혼을 시댁에서 시작했기에 어르신들 눈치 때문에 맘껏 못 싸운(?) 게 버릇이 되었고, 밤톨군에게 모범이 되는 부모가 되고 싶기에 노력하기 때문일 거다. 아직까지 우리 가족에겐 가정을 밝히는 네 가지 말이다. (사람 인생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아직까진 유효하다.) 가족을 포함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뜬금포 고백과 감사는 자주 표현하지만 '용서할게, 용서해줘'라는 아직까지 참 힘들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용서의 '감정'이 있어야만 용서를 '베풀'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용서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용서는 수년간 복기로 쌓인 마음의 고통을 단번에 청산해버리기 위해 지불하는 일회성 비용이다. 용서는 금융투자에서 일회성 손실을 감수하는 것과 같다.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상처에 복리가 수천 번 붙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그 상처가 부정적인 감정의 에너지를 먹고 불어나는 것을 평생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계속 빚쟁이로 살겠다는 것이다.  ( p.83 )

정말 내일이 나의 마지막이라면 어쩌면 조금은 쉽게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내 용서를 받을 자격이 되든 그렇지 않든, 일단 난 홀가분하게 떠나야 하니까... 내가 마음의 짐을 덜고자 용서한다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오히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네가 용서를 하냐고 화를 낼지, 아니면 나도 미안했다고 눈물로 사과를 구할지... 또 용서를 받았다며 기고만장해서 또다시 나에게 상처를 줄지 알 수가 없다. 무례한 사람들은 계속 무례하니까. 용서한다고 말을 해보기도 전에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내가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증거일 거다. 끝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용서하기가 쉬울 것만 같은데... 회사 다닐 때 내 뒤에서 날 꽤나 씹던 차장님이 있었다. 의도적으로 프로젝트에서 날 배제하고, 같은 파트임에도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그가 다른 사람을 욕할 때 내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우린 같은 라인이라며 좋은 관계였으니까... 마지막 회식 때 술김에 그 차장님을 불러 세워서 "당신을 용서하노라~"라고 여왕이 기사 작위 내리듯 팔로 허우적거렸다. 술 때문에 내가 참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 싶었다. 후에 그가 다른 이에게 그때 그가 내 용서로 고마웠다는 말을 했다는 걸 알고는 홀가분했다. 그런데 그건 내가 그 회사에서 그를 볼 며칠 안 남은 시기에 가능했던 거다.

내가 언제 죽는지 알게 된다면 나를 힘들게 했던(그리고 현재진형형인 그들을) 편하게 용서를 할 거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거다. (만약에 내가 미혼이라고 가정을 해본다면 카드론을 왕창 당겨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생명보험으로 퉁쳐서 갚았을 거야. ㅋ) 그러나 내 인생은 아직 남았고, 언제나 마지막 날이라는 가정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오늘을 위해 크고 작은 일을 해야 하고, 내일을 위해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 용서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지만 정말 어렵다. 최소한 남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고, 또 바로 사과하면서 사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최선인 것 같다. 살아생전 진심 어린 용서는 저승세계 프리 패스라는데('신과 함께'에서 말이지...) 내가 죽기 전엔 한 번은 하지 않을까? 그날이 가기 전엔 꼭 할 기회가 생기기를... '용서해요.'라고...

"'내가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살기엔 남은 시간이 아까워.'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골똘히 생각한 끝에 말씀하셨어요. '쟤한테까지 물려줄 수는 없어.' 이제 18개월 된 우리 아들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었죠. 아이는 바닥에서 블록 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고 마냥 행복하게 말이죠.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나쁜 건 끊고 좋은 것만 물려주면 돼. 우리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구나,'"   ( p.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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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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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는 불과 서른여섯 살,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하루에 열네 시간 동안 수련을 하며 이제서야 원하는 삶을 그리던 바로 그때 폐암 판정을 받은 폴 칼라니티의 이야기다. 이미 그 안타까운 끝을 알고 있기에 함부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암 판정을 받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그의 글이 더 마음에 아팠다. 왜 하필이면 나냐고, 왜 나일 수밖에 없냐며 신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화를 냈다면 오히려 읽기가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암 판정을 받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죽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며 마지막의 그날이 오기까지 계속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수술실로 복귀하여 최고참 레지던트의 업무량을 감당하고, 그동안 미뤘던 아이도 갖기도 한다. 암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의사의 길도 포기하고, 만삭의 아내 곁에서 죽음과 싸운다. 그의 딸 케이티가 태어나고 8개월 후 소생 치료를 거부하고 가족 품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루시가 이 책의 에필로그를 남긴다.

읽으면서 아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빤 간과 폐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집안 내력에 아빠의 오랜 흡연 습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다. 아빠의 죽음 이후로 막연히 아빠 나이에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아빠는 오십 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는 그 나이도 멀게 느껴졌는데 이제 십 년 정도 남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십 년 후에 밤톨군은 겨우 고등학생이다. 밤톨군의 나이를 생각하면 죽기엔 나에게 오십은 너무 아까운 나이다. 삶에 욕심이 생겼다. 아빠도 그랬겠지. 그때 나와 내 동생은 턱걸이로 20대에 들어섰다. 우리가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우리의 아이들을 보고 싶으셨을 텐데... 아빠는 아이들을 참 좋아하셨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만 울어버렸다. 주머니마다 들어있던 작은 사탕들... 그렇게 꿈꿨던 아빠의 손주들에겐 사탕을 주실 수가 없었다. 가끔씩 철없던 나를 탓해본다. 아빠는 여전히 아빠였는데, 우리 가족에게 아빤 더 이상 아빠가 아니라 돌봐야 할 암 환자였을 뿐이다. 아빠가 원했던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조금이라도 우리와 더 오래 있길 바라며 아빠의 시간이 이대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랐다. 아빠의 시간을 암 환자라는 존재로 가뒀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죄송해서, 속상해서 컥컥대며 울었다.

이 책은 아픈 이를 떠나보낸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아프기도 한 책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현직 의사들이 읽기를 바란다. 저자는 암 환자로 숭고한 삶을 살기도 했지만, 앞서 그는 훌륭한 의사였다. 뛰어난 기술만을 가진 기술자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고 기분이 나빠질 때가 꽤 있다. 그들 앞에서 나와 가족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일로만 대할 때가 그렇다. 매일 반복되는, 아픈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는 게 힘들다는 건 충분히 안다. 하지만 우린 서류나 물건이 아니다. 첫아이를 유산했더랬다. 떨리는 마음으로 심장 소리를 듣고자 갔던 병원에서 의사는 "아기가 심장이 안 뛰네요. 흔한 일이에요. 수술 날짜는 언제로 잡아드릴까요?"라며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흔한 일이겠지만 나에겐 처음이었다. 잠시만의 위로조차 없었다. '깨진 그릇은 치우자.'라는 말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완전 공감해서 나와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어달라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내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주길 바랐다.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죽음을 가까이하는 의사라는 직업으로의 그와 그리고 죽음에 다가가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영원히 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 수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매일 한 발자국씩 죽음을 향해 걷다가 언젠가는 죽음과 나란히 걷는 날도 올 것이다. 그날까지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시간은 이제 나에게 양날의 검과도 같다. 지난번에 병세가 악화되어 심하게 축난 몸 상태는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암이 재발하게 될 테고, 그러다가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다. 죽음은 예상보다 느리게 올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것보다는 분명 빠르게 닥쳐올 것이다. 이런 지각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명백한 반응은 정신없이 움직이려는 충동일 것이다. 즉, 여행도 하고, 근사한 식사도 하고, 여태껏 접어둔 많은 소망을 성취하면서 '삶을 만끽하는' 것이다. 하지만 암은 무자비하게도 시간뿐만 아니라 기력까지 빼앗아버려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크게 줄었다. 마치 경주하다 지친 토끼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설사 기력이 있더라도 나는 거북이의 방식이 더 마음에 든다.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고 깊이 명상하는 방식 말이다. 물론 그냥 어떻게든 버티는 날들도 있다.

남편이 숨을 거두기 몇 주 전, 함께 침대에 누워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내가 당신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어도 숨 쉴 수 있어?"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이게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폴과 내가 서로의 삶에 깊은 의미가 될 수 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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