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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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는 불과 서른여섯 살,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하루에 열네 시간 동안 수련을 하며 이제서야 원하는 삶을 그리던 바로 그때 폐암 판정을 받은 폴 칼라니티의 이야기다. 이미 그 안타까운 끝을 알고 있기에 함부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암 판정을 받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그의 글이 더 마음에 아팠다. 왜 하필이면 나냐고, 왜 나일 수밖에 없냐며 신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화를 냈다면 오히려 읽기가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암 판정을 받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죽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며 마지막의 그날이 오기까지 계속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수술실로 복귀하여 최고참 레지던트의 업무량을 감당하고, 그동안 미뤘던 아이도 갖기도 한다. 암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의사의 길도 포기하고, 만삭의 아내 곁에서 죽음과 싸운다. 그의 딸 케이티가 태어나고 8개월 후 소생 치료를 거부하고 가족 품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루시가 이 책의 에필로그를 남긴다.

읽으면서 아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빤 간과 폐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집안 내력에 아빠의 오랜 흡연 습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다. 아빠의 죽음 이후로 막연히 아빠 나이에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아빠는 오십 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는 그 나이도 멀게 느껴졌는데 이제 십 년 정도 남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십 년 후에 밤톨군은 겨우 고등학생이다. 밤톨군의 나이를 생각하면 죽기엔 나에게 오십은 너무 아까운 나이다. 삶에 욕심이 생겼다. 아빠도 그랬겠지. 그때 나와 내 동생은 턱걸이로 20대에 들어섰다. 우리가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우리의 아이들을 보고 싶으셨을 텐데... 아빠는 아이들을 참 좋아하셨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만 울어버렸다. 주머니마다 들어있던 작은 사탕들... 그렇게 꿈꿨던 아빠의 손주들에겐 사탕을 주실 수가 없었다. 가끔씩 철없던 나를 탓해본다. 아빠는 여전히 아빠였는데, 우리 가족에게 아빤 더 이상 아빠가 아니라 돌봐야 할 암 환자였을 뿐이다. 아빠가 원했던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조금이라도 우리와 더 오래 있길 바라며 아빠의 시간이 이대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랐다. 아빠의 시간을 암 환자라는 존재로 가뒀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죄송해서, 속상해서 컥컥대며 울었다.

이 책은 아픈 이를 떠나보낸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아프기도 한 책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현직 의사들이 읽기를 바란다. 저자는 암 환자로 숭고한 삶을 살기도 했지만, 앞서 그는 훌륭한 의사였다. 뛰어난 기술만을 가진 기술자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고 기분이 나빠질 때가 꽤 있다. 그들 앞에서 나와 가족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일로만 대할 때가 그렇다. 매일 반복되는, 아픈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는 게 힘들다는 건 충분히 안다. 하지만 우린 서류나 물건이 아니다. 첫아이를 유산했더랬다. 떨리는 마음으로 심장 소리를 듣고자 갔던 병원에서 의사는 "아기가 심장이 안 뛰네요. 흔한 일이에요. 수술 날짜는 언제로 잡아드릴까요?"라며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흔한 일이겠지만 나에겐 처음이었다. 잠시만의 위로조차 없었다. '깨진 그릇은 치우자.'라는 말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완전 공감해서 나와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어달라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내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주길 바랐다.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죽음을 가까이하는 의사라는 직업으로의 그와 그리고 죽음에 다가가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영원히 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 수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매일 한 발자국씩 죽음을 향해 걷다가 언젠가는 죽음과 나란히 걷는 날도 올 것이다. 그날까지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시간은 이제 나에게 양날의 검과도 같다. 지난번에 병세가 악화되어 심하게 축난 몸 상태는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암이 재발하게 될 테고, 그러다가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다. 죽음은 예상보다 느리게 올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것보다는 분명 빠르게 닥쳐올 것이다. 이런 지각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명백한 반응은 정신없이 움직이려는 충동일 것이다. 즉, 여행도 하고, 근사한 식사도 하고, 여태껏 접어둔 많은 소망을 성취하면서 '삶을 만끽하는' 것이다. 하지만 암은 무자비하게도 시간뿐만 아니라 기력까지 빼앗아버려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크게 줄었다. 마치 경주하다 지친 토끼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설사 기력이 있더라도 나는 거북이의 방식이 더 마음에 든다.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고 깊이 명상하는 방식 말이다. 물론 그냥 어떻게든 버티는 날들도 있다.

남편이 숨을 거두기 몇 주 전, 함께 침대에 누워 내가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내가 당신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어도 숨 쉴 수 있어?"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이게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폴과 내가 서로의 삶에 깊은 의미가 될 수 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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