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비틀 Mariabeetle - 킬러들의 광시곡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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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판 1쇄 본을 이제서야 읽었다. 나오자마자 서점에서 샀던 걸로 기억하는데 책장에만 꽂아두고 열어보지도 않았다. 새삼스럽게 책에 미안해졌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문제는 이런 책이 한두 권이 아니라는 거. 올해는 책장에 고이고이 모셔둔 책들 좀 읽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아니, 다짐만 해본다.

복수를 다짐하며 신칸센 열차에 오른 남자 기무라. 그는 전직 킬러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의 아들인 와타루(고작 여섯 살)가 옥상에서 누군가에 떠밀려 의식 불명이 된 이후로 그는 술도 끊고 복수하기 위해 신칸센 열차를 올라탄다. 그의 복수 상대는 이제 중학생인 오우지(왕자)다. 성인 남자가 중학생을 상대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이놈이 가장 나쁜 놈이다. 아이의 천진난만함이라는 가면을 무기로 끊임없이 인간을 조정하려고 든다. 악의로 가득 찬 놈이다. 열차에는 미네기시의 아들과 돈이 든 트렁크를 무사히 전달해야 하는 레몬과 밀감이라는 콤비 킬러도 타고 있다. '토마스와 친구들'을 사랑하는 레몬과 진중한 성격의 밀감은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 같아도 서로에 대한 끈끈한 신뢰가 있다. 그리고 트렁크를 훔쳐 오라는 임무를 맡은 불운의 아이콘 나나오. 그를 보면 프랑스 영화인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가 떠오른다. 그리고 스티븐 시걸도 떠오른다. 불운한 남자가 가볍게 목을 부러뜨리는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기차가 목적지를 향해 갈수록 시체도 쌓인다. 이 기차엔 코난이 타고 있음이 틀림없다.

소설은 기차라는 밀폐된 그리고 이동하는 장소에 판을 벌린다. 기차라는 특성상 등장인물들은 앞뒤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도망갈 곳도, 피할 곳도 없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난 졸졸졸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기차라는 공간은 설명이 없어도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기에 바로 몰입을 할 수 있으니까.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기차의 문이 수시로 열리고 닫힌다. 그때마다 사고가 발생하고... 킬러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잔인하고 진한 피비린내를 자랑하는 소설은 아니다. 그렇다고 유쾌 상쾌 통쾌한 이야기도 아니다. 빠져들어 읽고 싶은데, 이놈의 왕자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확 마! 하지만 재미는 보장한다. 열차가 철도 위를 달리듯이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도 속도가 붙는다.

'킬러들의 광시곡'이란 부재를 가진 <마리아비틀>은 <그래스호퍼>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작에 나왔던 인물들이 양념처럼 잘 버무려져 있다. 문제는 그래스호퍼를 읽은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게 문제다. 소설도 읽고, 만화책으로도 읽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래스호퍼>를 읽지 않았다고 해서 <마리아비틀>을 즐기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대사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은 낯익으니까 계속 신경 쓰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 읽어둘 걸 그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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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JOB 다多 한 컷 - 고생했어, 일하는 우리
양경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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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내 도서 담당을 맡은 적이 있었다. 매달 팀에 필요한 책을 구매하고, 책 대여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번 달은 무슨 책을 살까?' 신나게 고민하던 내게 눈에 띄던 책이 있었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는 화끈한 제목의 책이었다. 이렇게 직설적인 책이라도 괜찮을까 걱정을 하다가 그냥 사버렸다. 솔직히 매번 나에게 보람찬 일을 하니 얼마나 좋냐고, 네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아냐고, 입술에 침도 안 바른 채 거짓말하는 차장님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책도 참 안 읽던 우리 팀에서 이 책은 언제나 인기였다. 사람 마음 다 비슷한 거지. 결과적으로 난 팀장님에게 찍힌 것 같았지만...

그림왕치기 양경수 작가가 이번엔 <잡다한 컷>(JOB 多 한 컷)으로 돌아왔다. 양경수 작가의 그림을 볼 때마다 이분은 정말 라임 학원이라도 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멋진 말장난이 수두룩하다. 말장난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상은 너무 웃프다. 그래서 공감이 갈 수밖에 없다.

"꿈이 뭐니?"라는 말을 많이 듣기고 하고, 많이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각종 자격증을 따고,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자원봉사 등으로 이력서를 빼곡하게 채운다. 그렇게 해서 꿈을 이루는 사람도 있고, 현실과 타협해서 적당한 직장에 취업하기도 한다. 높다랗게 쌓은 스펙 혹은 학자금 대출로 이룬 꿈은 결국은 사노비 혹은 공노비인 경우가 많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번 달 매출로 어떻게든 메꿔놓은 돈으로 월세를 내야 하는 가게 주인이거나...

 

예전엔 몰랐다. 차곡차곡 쌓아서(그래도 위태로운) 내 이력서 아래엔 언제나 부모님이 계셨다는걸... '아빠가 있잖아... 엄마는 괜찮아...'말의 뜻을 몰랐다. 내가 잘나서 쌓고 올라간 줄만 알았다. 남들에 비해 부족한 스펙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조차 엄마, 아빠의 희생으로 쌓은 건지 몰랐다. 울컥했다. 내가 엄마가 되어서야 저 그림이 보여주는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딸자식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서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초라한 어깨에, 굽은 등에 쌓인 무게를 막상 그림으로 대하자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 내 어깨에, 등에 밤톨군을 올려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은 영심이 같은 우리 밤톨군.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올려놓은 꺽정씨.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구두굽이 다 닳을 정도로 일하는 꺽정씨가 오늘따라 더 고마울 뿐이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내가 호강시켜줄게요.

 

 

 

책 제목처럼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의 그림들이 있다. 택배 기사님, 소방공무원, 스튜어디스, 사회복지사, 은행원, 미용사 등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기 쉬운 평범한 사람들이다. 내가 그분들의 신발을 신고 그 삶을 대신 살아본 적이 없어 무심코 지나갔던 그들의 일상을 접하니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들이 덧대요 졌다.

요즘 물컵 대신 쓰나미를 맞이하고 있는 대한항공의 조현민 전무 기사를 자주 보게 된다. 그녀의 악다구니가 넘치는 동영상 속의 목소리를 듣고 기함을 토한다. 갑질 하는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당하기만 한다고 분통해한다. 우리는 갑질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소유물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갑질은 우리 주변에서 늘 볼 수 있다. 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식당에서, 콜센터에서... 보통 사람이 보통 사람에게 갑질을 한다. 큰 금액도 아닌 백원, 천 원, 만원 때문에... 평일에 오는 산타인 택배 기사님이 받는 돈은 건당 700원 정도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본인의 차량 유지비, 차량 관리비, 통신비 등은 다 기사님이 부담하신다고 한다. 게다가 택배 분실이나 파손, 변질 등의 문제도 기사님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큰 기쁨을 주시는 택배 기사님이 부재 시마다 보내주시는 배송 완료 문자에 무신경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늘 감사하다고, 좋은 하루 되시라고 문자를 남겼지만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다. 만나 뵐 때 음료수라도 꼭 전해드려야겠다. 그리고 더 밝은 얼굴로 꼭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

오늘도 일상을 채워주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자녀이자, 형제자매이자, 부모며, 친구니까. 그들이 아프면 우리에게도 아픔이 돌아온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자주 하던 어깨 안마처럼 동그랗게 둘러앉아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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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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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가 나오는 책은 늘 괴롭다. 음악이 나오는 책은 함께 들을 수 있지만, 요리가 나오는 책은 나를 맛있는 곳에 함께 데리고 가질 않는다. 나의 식욕만 자극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걸 상상으로 맛을 그려내면 더 괴로워진다. 그래서 이 책은 밥 먹고 난 뒤에만 읽었다. 그래야만 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푸드 칼럼니스트를 목표로 뉴욕대 대학원에 입학한 티아 먼로. 그녀의 우상인 헬렌 란스키의 인턴십을 따내고 싶어 한다. 신입생 환영회에 가져갈 다쿠아즈 드롭을 한가득 들고나간 날, 그녀의 인생을 꼬아버릴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바로 '뉴욕타임스' 레스토랑 평론가인 마이클 잘츠. 헬렌과 연결해주겠다고 메일을 보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인턴십을 하게 된 곳은 매디슨 파크 타번이라는 고급 레스토랑의 업장 관리 및 고객 휴대품 보관 담당을 맡게 된다.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그녀에게 다시 나타난 마이클. 사실 마이클은 몇 달 전부터 미각을 잃은 상태라고 한다. 그녀에게 그의 혀가 되어달라는 은밀한 제안을 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떠올랐다. 뉴욕이 배경인데다가 이름만 들어보거나 아니면 아예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명품 브랜드의 향연이었기 때문이다. 뉴욕은 브랜드 안 입으면 못 가는 건가요? 그렇다면 나는 아마 영원히 뉴욕에는 발을 못 붙일 듯... 흑. 난 명품을 잘 모른다. 디자인을 입는다는 것보다는 욕망을 입는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고 있을 때의 은근한 만족 같은 것 말이다.

여긴 뉴욕이다. 모델, 디자이너, 백만장자 셀러브리티들이 잔뜩 모여 있는 욕망의 도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거리를 잠깐만 걸어도 공기 중에 떠다니는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p.40)

미아가 입는 옷이 고급스럽게 바뀔수록 미아의 권력도 강해짐을 느낀다. 마이크의 고스트라이터일 뿐이지만 그녀가 느끼는 것이 글이 되고, 글은 권력이 된다. 칼럼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사람들은 칼럼에 따라 레스토랑을 이동한다. 레스토랑의 흥망성쇠가 그녀의 손에 달린 거다. 하지만 미아는 어쩐지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녀가 무너뜨린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누군가는 또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이며 대출금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아가 악마와 한 거래에서 악마는 무엇을 제안했을까? 단지 무료로 먹을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와 휘황찬란한 명품이 다였을까? 미아와 달리 나였다면 악마가 주는 달콤한 유혹에, 권력에 눈이 멀어 끊임없이 헤매고 있지 않았을까? 비록 가짜 권력일지라도 말이다. 반짝반짝하게 윤기를 머금은 빛만 바라보면 그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단지 뉴욕의 맛>이 영화로도 나왔으면 좋겠다. 총기 가득한 사회 초년생의 사회 적응기도 기대가 되지만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요리들의 향연이겠지. 유튜브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서비스처럼 책을 읽는 도중에 언제라도 맛이 궁금하면 맛볼 수 있는 서비스 같은 게 나왔으면 좋겠다. 배고프다. 꼬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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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It Up! - Music Craft Studio, 남무성·장기호의 만화로 보는 대중음악만들기
남무성.장기호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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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빨간 표지의 책을 만났다. 표지에 나온 인물들 속에서 낯익은 이들을 만나는 게 너무 기대됐다. 박치임에도 흥이 많아 노래 부르는 걸 넘 좋아하는 나에게 딱 일 것만 같은 느낌!! 근본 없이 음악을 들어재끼는 나 같은 사람에게 뭔가 대중음악에 관한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줄 것만 같은 느낌!! 게다가 만화다. 안 읽을 이유가 없다~

만화는 뭔가 개론적인 걸 설명해 주나보다~라고 생각할 무렵 한 재즈 카페에서 공연이 시작되는 걸로 시작된다. '사자'라는 밴드가 'Blue gonna blue'라는 곡을 들려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튜브로 찾아봤다니 진짜 있다. 노래를 들으며 나도 함께 재즈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 깔끔하게 생긴 알바는(흰 티에 청바지를 자주 입는 걸 보니, 외모가 보통이 아닌 듯하다. 이렇게 입고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연예인 밖에 못 봤거든.)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다. 될 성싶은 자는 하늘이 알아주는 법. 누가 봐도 만렙처럼 생긴(미국의 작곡가 겸 기타 연주자인 프랭크 자파와 닮았다.) 외상 부자인 아저씨가 무공비급서를 무심히 휙 던져주고 간다. 제목 또한 찰지다. <강아지도 작곡할 수 있게 되는 실용음악의 정석> 꽃미남 알바와 같이 읽어볼까?

학창시절 라디오는 야자시간의 친구였다. 특히 지금도 방영 중인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가요만이 아니라 다양한 팝 음악을 들려줘서 음악 폭을 많이 넓혀주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덕분에 레코드 가게 알바까지 할 수 있었다. 사장 아저씨의 음악 부심으로 좋은 노래도 많이 들었고, 그 당시 유행했던 최신 가요도 엄청나게 들었더랬다. (그땐 지긋지긋하기만 했던 노래들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요 르네상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역시 근본은 없어서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언제나 꿀 먹은 벙어리였다. <POP IT UP!>에선 만화 속 주인공들이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하니까 한눈에, 그리고 한 귀에 들어오더라. 궁금한 곡이 나올 때마다 유튜브에서 들어보면서 읽었던 것도 한몫했을 거다. 게다가 작가님의 깨알 같은 패러디와 인물 묘사로 순간순간 웃을 수 있는 것도 포인트~

 

 

같은 도넛이라도 이름이 제각각인 것처럼 모드가 다르다는 말에 한 번에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름만 다르고 맛은 거의 비슷한 도넛 같은 요즘 아이돌 음악이 떠오른 것도 사실.

<POP IT UP!>에 나와있는 '빌보드 선정 시대를 대표한 팝 히트곡 1970~2016'의 목록의 노래들을 듣고 느끼며 신나게 책을 읽었더랬다. "필청!"이라는 말풍선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라디오를 점점 안 듣고부터 모르는 노래도 많아졌다. '이게 음악이지~ 이게 정답이지'라고 강요할 순 없지만 명곡들도 분명 있으니까~ 찾아보니 작가님의 다른 책 <PAINT IT ROCK>도 있던데 마음만은 로커(몸은 아이돌이고 싶지만)인지라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실용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딱 맞는 음악 실용서인 <POP IT UP!>을 감히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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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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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베어타운>이란 제목과 서정적인 표지에 속아버렸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동화 같은 전작의 분위기일 거라고 착각했다. 곰돌이 푸우가 친구들과 하키라도 하는 내용인 줄만 알았다. 읽는 동안 먹먹해져서, 울화통이 터져서 눈물이 나는 책인 줄은 정말로 몰랐다. 오늘은 스포 없이 리뷰를 못 쓰겠다.

베어타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 쇠락해가는 마을에 유일한 자랑거리는 오로지 청소년 아이스하키 팀뿐이다.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이 전국 리그에서 우승만 하게 되면, 그래서 하키 아카데미가 들어서게 되면 베어타운은 활기를 되찾을 거라고 마을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단순한 하키팀이 아니다. 모두가 응원하고, 사랑하고, 믿는 꿈의 무대였다. 소년들은 하키 선수가 되기를 갈망하고, 소녀들은 하키 선수들에 열광한다. 그중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은 베어타운의 스타였다. 실력은 그들의 지위였고, 또한 권력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불안했다. 실력만 있으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네 맘대로 할 수 있다고, 남을 비하해도 된다고, 전리품으로 취할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여성,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웃으면서 쏟아내는 것이 불편했다. 테스토스테론 가득한 그들의 라커룸을 떠올리는 것조차 답답했다. 그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준 건 누구일까? 그들이 존경하는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학교는 인재를 만든다고 한다.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학생들에겐 면죄부가 허용된다. 유능한 인재들에게 우리의 미래가 있는 것처럼 그들은 어떤 일을 저지르더라도 사회가 눈을 감아준다. 2015년에 의대생의 데이트 폭력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가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지고 얼굴이 엉망이 된 사건인데도 남학생은 아무런 문제없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의 미래를 걱정한 학교와 법원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들은 그를 안다. 그는 지금까지 선택받은 특별한 아이였고, 남다른 업적을 이룰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뒤에 응원군이 많으면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거의 다 믿게 되어 있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인다.  (p.395)

베어타운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천재 하키 선수이자 막강한 후원자의 아들인 캐빈은 구단장의 딸인 마야를 성폭행한다. 중요한 시합이 있던 날 케빈은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 앞에서 경찰에 연행된다. 마야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준 케빈, 그리고 케빈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준 마야. 사람들은 마야의 말을 믿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케빈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혹은 구단주가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왜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시합이 있는 이때냐고? 요 근래에 많이 듣던 얘기다. 김생민의 성추행 사건으로 시끌시끌했다. 10년 전에 있었던 성추행 사건을 왜 이제서야 꺼내냐고,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제서야 전성기를 맞이하는 그를 왜 괴롭히냐고... 가해자에겐 해 뜰 날이 올 때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태양의 빛이 짙어질수록 더 짙은 어둠 속에서 견뎌야 하는 걸 모른다. 피해자인데 오히려 미움을 받는다. 이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 김생민 씨일 뿐일까? 영화 <한공주>의 모티브가 된 밀양사건은 또 어떠한가? 피해 학생에게 쏟아진 비난은, 가해학생들이 아직 파릇파릇한 학생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가벼운(혹은 그 조차도 묻지 않은) 형벌을 받았다. 그중에선 결혼해서 잘 사는 놈도 있고, 얼마 전엔 아프리카 티브이에 나와서 구설수에 오른 놈도 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가해자를 만든다. 잘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잘나면 물컵 따위 사람에게 던져도 된다고, 잘 나면 사람들이 알아서 나의 미래를 배려하게 된다고 가르치는 게 지금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싶다. 소설 속 마야는 그녀를 응원하는 든든한 가족과 친구가 있기에 그리고 그녀 자신이 강인하기에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그래서 고마웠다.

책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만 구분 짓지 않는다. 공동체와 개인, 네 편과 내 편, 우리와 너희, 옳은 것과 그른 것, 선과 악, 경제적 이해관계까지 아우른다. 읽고 나니 더 생각이 많아진다. 제대로 나의 뒤통수를 때려주신 프레드릭 배크만. 한결같이 인간에 대한 따스함이 있어서 좋고, 또 한결같이 않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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