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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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베어타운>이란 제목과 서정적인 표지에 속아버렸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동화 같은 전작의 분위기일 거라고 착각했다. 곰돌이 푸우가 친구들과 하키라도 하는 내용인 줄만 알았다. 읽는 동안 먹먹해져서, 울화통이 터져서 눈물이 나는 책인 줄은 정말로 몰랐다. 오늘은 스포 없이 리뷰를 못 쓰겠다.

베어타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 쇠락해가는 마을에 유일한 자랑거리는 오로지 청소년 아이스하키 팀뿐이다.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이 전국 리그에서 우승만 하게 되면, 그래서 하키 아카데미가 들어서게 되면 베어타운은 활기를 되찾을 거라고 마을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다. 단순한 하키팀이 아니다. 모두가 응원하고, 사랑하고, 믿는 꿈의 무대였다. 소년들은 하키 선수가 되기를 갈망하고, 소녀들은 하키 선수들에 열광한다. 그중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은 베어타운의 스타였다. 실력은 그들의 지위였고, 또한 권력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불안했다. 실력만 있으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네 맘대로 할 수 있다고, 남을 비하해도 된다고, 전리품으로 취할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여성,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웃으면서 쏟아내는 것이 불편했다. 테스토스테론 가득한 그들의 라커룸을 떠올리는 것조차 답답했다. 그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준 건 누구일까? 그들이 존경하는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학교는 인재를 만든다고 한다.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학생들에겐 면죄부가 허용된다. 유능한 인재들에게 우리의 미래가 있는 것처럼 그들은 어떤 일을 저지르더라도 사회가 눈을 감아준다. 2015년에 의대생의 데이트 폭력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가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지고 얼굴이 엉망이 된 사건인데도 남학생은 아무런 문제없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의 미래를 걱정한 학교와 법원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들은 그를 안다. 그는 지금까지 선택받은 특별한 아이였고, 남다른 업적을 이룰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뒤에 응원군이 많으면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거의 다 믿게 되어 있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인다.  (p.395)

베어타운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천재 하키 선수이자 막강한 후원자의 아들인 캐빈은 구단장의 딸인 마야를 성폭행한다. 중요한 시합이 있던 날 케빈은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 앞에서 경찰에 연행된다. 마야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준 케빈, 그리고 케빈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준 마야. 사람들은 마야의 말을 믿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케빈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혹은 구단주가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왜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시합이 있는 이때냐고? 요 근래에 많이 듣던 얘기다. 김생민의 성추행 사건으로 시끌시끌했다. 10년 전에 있었던 성추행 사건을 왜 이제서야 꺼내냐고,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제서야 전성기를 맞이하는 그를 왜 괴롭히냐고... 가해자에겐 해 뜰 날이 올 때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태양의 빛이 짙어질수록 더 짙은 어둠 속에서 견뎌야 하는 걸 모른다. 피해자인데 오히려 미움을 받는다. 이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된다. 김생민 씨일 뿐일까? 영화 <한공주>의 모티브가 된 밀양사건은 또 어떠한가? 피해 학생에게 쏟아진 비난은, 가해학생들이 아직 파릇파릇한 학생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가벼운(혹은 그 조차도 묻지 않은) 형벌을 받았다. 그중에선 결혼해서 잘 사는 놈도 있고, 얼마 전엔 아프리카 티브이에 나와서 구설수에 오른 놈도 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가해자를 만든다. 잘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잘나면 물컵 따위 사람에게 던져도 된다고, 잘 나면 사람들이 알아서 나의 미래를 배려하게 된다고 가르치는 게 지금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싶다. 소설 속 마야는 그녀를 응원하는 든든한 가족과 친구가 있기에 그리고 그녀 자신이 강인하기에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그래서 고마웠다.

책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만 구분 짓지 않는다. 공동체와 개인, 네 편과 내 편, 우리와 너희, 옳은 것과 그른 것, 선과 악, 경제적 이해관계까지 아우른다. 읽고 나니 더 생각이 많아진다. 제대로 나의 뒤통수를 때려주신 프레드릭 배크만. 한결같이 인간에 대한 따스함이 있어서 좋고, 또 한결같이 않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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