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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불났어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한기욱 옮김 / 창비 / 1998년 2월
평점 :
절판
아리엘 도르프만 ‘우리집에 불났어’
- 오래된 독재와 새로운 만남
읽은 지 꽤나 오랜 소설책 한 권이 유난히 생각나는 요즘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무렵은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이 바뀌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였고 IMF 한파로 사람들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90년대 후반.
칠레 출신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단편들은 내가 칠레에서 쫓겨나 망명중이던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그 당시에 작품을 써내려가다 종종 고개를 들어보면 남한 역시 내 조국과 마찬가지로 유사한 독재정권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떨어져 있지만 비슷한 길을 걷는 두 나라에서 똑같은 희망과 저항의 형태들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두 나라가 치열한 투재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되찾았으되, 아직 해야 할 일과 바꾸어야 할 것이 많은 현 시점에서, 내 책이 내 나라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나라 사이에 미약하나마 다리를 놓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것이 특히 기쁩니다.”
고 적고 있다.
60년대 제3세계 국가들 중 많은 나라가 군부독재라는 극악의 독재통치를 경험했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아르헨티나의 ‘5월어머니회’와 우리의 ‘민가협’이 비슷한 것처럼 군부독재 치하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역사는 조금씩 닮아있고 비록 다른 나라의 역사라 할지라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나누게 되곤 한다.
최근 다시 읽어본 ‘우리집에 불났어’를 통해 혁명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되살아난 독재치하의 절망 등을 새삼 깊이 공감하게 된다.
<독자>, <우리집에 불났어>, <상담>, <거인> 등의 작품은 독재정권의 가공할 탄압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특히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그린 <우리집에 불났어>는 최근 다시 부활하는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희생되는 가족들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며 <거인>을 읽으면서는 독재시절 무수한 의문사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횡단비행>은 마치, 80년대 단 1분도 약속시간을 어기지 않고 반독재 투쟁을 펼쳐왔던 선배들의 무용담을 듣는 듯한 긴장감을 주고 있다.
이 책은 비단 독재정권의 가혹한 통치에 대한 고발 뿐 아니라 그 치하의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착취되고 소외되어 가는지를 그야말로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상표의 영역>은 지금도 진행 중인 서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소설집 중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작품 중 하나가 <외로운 이들의 투고란>이다. 이 작품은 아옌데 정권 시절의 실패를 고백하는 작품이자, 우리가 실패한 혁명의 교훈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본질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민들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고 할까.
이 작품을 읽으며 지금 우리 진보운동의 실패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하며 혁신의 출발점을 어디로 잡아야 할 지 가닥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명박 정부 집권 1년.
우리는 파죽지세로 몰아치는 공습 속에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해 있지만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민중은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희망이 파괴되는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내일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자만이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 아닐까.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가 느꼈을 좌절, 그러나 쉼없이 다시 일어나는 민중의 투쟁 속에서 다시 희망을 꿈꾸었듯...
우리는 다시 부활한 한나라당 독재의 광풍 속에서 ‘촛불’이란 희망의 불씨를 보고 있다.
역사를 돌아본다는 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이자 과거 실패의 교훈을 찾아 좀더 나은 내일을 위한 도전이 아닐까 싶다.
비단 우리의 역사가 아니지만 혁명의 실패, 낡은 독재체제의 새로운 부활이란 현실 속에서 다시 읽어보는 ‘우리집에 불났어’는 그런 의미에서 새 희망을 꿈꾸는 이들에게 교훈과 승리의 메시지를 던져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