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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평점 :
제법 두터운 책을 덮으며 새삼 사람이 살아온 길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시대 진정한 스승이라 불리우는 리영희 선생님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은
바로 우리 현대사의 치열한 투쟁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성을 상실한 식민지와 분단독재의 시대에
사람으로서, 지성인으로서 양심과 이성을 지켜가고자 하는 한 지식인의 몸부림은
그대로 비상식, 비이성과 싸우는 과정이었으며
그야말로 현대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선배들에 비해 나는 리영희 선생님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고
그저 대단한 교수님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무지막지한 독재정권과 싸움에서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승리의 무기가 되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위대한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이라도 태어나면서부터 훌륭할 리는 없다.
리영희 선생님의 삶도,
한국전쟁이란 미치광이같은 전쟁상황에서
어느 기생과 만남, 한 스님과 만남을 통해 광적인 사회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이들에 대한 경의 속에서
그 자신 또한 지조있는 지식인으로서 삶을 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통신사의 외신부기자, 조선일보 국제부장 등을 통해
독재정권과 미국이 저지르는 만행의 진실을 알리고자
발버둥치며 끊임없이 정론을 펼친 그 열정이
암흑같은 독재시대의 작은 빛이 되었고
진실의 메아리가 되어 수 많은 이들의 가슴을 달구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며 사회와 동떨어져 살 수 없다는 말이
선생님의 삶으로부터 증명된다.
더구나 거짓과 독선의 사회적 악과 맞서 싸운 삶이라면
그 삶 자체가 역사이다.
선생님의 활동 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배경을 들춰내는 과정에서
여순사건 (4.3제주항쟁 당시 제주진압을 거부한 14연대의 반란사건), 중국혁명의 승리 등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경험하게 되는 역사의 흐름을 심심잖게 만나게 되고
경향신문의 '여적필화'사건, 김지하의 오적 사건 등등
독재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던 동시대 인물과 사건들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선생님의 연구활동과 저작활동 등은 철저히
새로운 삶과 사회의 대안을 찾기 위한
지식과 투쟁의 결합체였다.
흔히 치열하게 사회운동을 했던 이들이
자신의 자녀들만큼은 사회운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고 말리기도 하는데
선생님의 딸이 학생운동을 하고 심지어 아버지조차 '개량'이라고 비난하며
학업을 내던지고 공단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을
묵묵히 지지하고 그 또한 양심적 청년의 올바른 선택이라
긍정하는 선생님의 말씀은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중풍으로 한때 거동이 불편하셨던 선생님은
이라크 파병반대투쟁이 한창일 때 언론사에
반전평화의 마음을 담아
떨리는 손으로 한편의 편지를 보내셨다.

미제광란 부지기종
인류안복 즉면위난
금수강토 장변화해
한민고창 반미반전
미 제국주의의 광란이 그 끝을 알 수 없고,
인류의 안전과 복락이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삼천리 금수강산이 장차 불바다가 될 것이니,
한민족이여 반미반전을 소리높이 외치자!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여의도까지 나오셔서 이라크 파병의 부당성을
집회참가자들에게 헌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을 하나 하나 따져 설명하셨다.
언론인으로, 그리고 지식인으로 이 사회의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했던 선생님의 노력은
알게모르게 우리 삶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북괴라는 말의 부당성을 지적, 북한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쓴 이도 리영희 선생님이란
사실을 아마 지금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것이다.
언제인가 군포시민단체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북핵문제'관련한 토론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북핵'이란 말의 부당성을 지적하시며
언어는 사실을 전달하는 적절한 표현으로 써야 한다고 하셨다.
강연내내 선생님은 '미국에 의한 북한 핵소동'이란 표현을 고집하셨다.
노무현 정권때에도
미쳐 떨쳐내지 못한 독재의 잔재와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맹렬히 비판하셨던 선생님이
다시 등장한 독재의 후예
이명박 정권을 보시는 마음은 어떨까...

2003년 3월 28일 여의도 앞 파병반대 범국민행동 집회에 참석하여 발언하시는 리영희 선생님
진정한 사랑은 맹목이 아니며
오히려 민족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게끔 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선생님의 사명의식대로
선생님의 삶은
우리 사회 진실의 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