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거리는 자기 자신의 역사라는 징역형으로부터 도망쳐 열린 운명이라는 가능성으로 들어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22) - P22

생각해보면, 나는 어떤 것에는 ‘네‘라고, 또 어떤 것에는 ‘아니요‘라고 말하다 보니 어느새 혼자 살게 되었다. 대답하는 일 자체가 선택이라는 것을 나는 결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내 대답에는 오직 내가 중대하게 관심을 가졌던 한 가지만이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외로움을 두려워하게 되는 일을 경계했다. 고독한 노년의 공포에도 몸을 사리지 않으면서 일과 사랑 같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일이 내게는 중요하게 느껴졌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너무도 터무니없이 싼 값에 팔아넘기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러니까 그 불안에 저항하는 일은 내게 정치적 견해 비슷한 것이었다. 그 입장을 쉽게 취할 수 있었다. 그문제를 나는 초보적인 수준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66-67)

나는 ‘결혼에 반대하며‘라는 제목으로 격렬하게 결혼을 비판하는 글 한 편을 썼다. 그 글에서 나는 우리가 결혼하는 이유는 자아를 발견하는 모험을 하거나 내면의 삶을 공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초적인 종류의 감정적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 위안에는 편협한 태도, 고독을 대하는 데 있어서의 미숙함, 몇 년씩 꺼내지 않고 지나가는 내면의 자아에 대한 어려운 질문 같은 것이 따라온다.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두려움에 맞서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면서 두려움을 제압해야 한다. 나는 사랑이나 가정에서의 친밀감 없이 지내는 것은 사실 반만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관대하게 인정했지만, 결론에서 지금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실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그 사실을 자각한 채 살아가는 일이 삶의 과업이다. 외로움을 이겨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외로움이 죽음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울 수는 있다. 그런 앎은 힘이 되고, 동맹이 되고, 무기가 된다. (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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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날카로우며 가벼운 듯 무거운 에세이. 간만에 갈증 나지 않는 에세이를 읽었다. 현실과 경험을 떠드는 수다 밑에 깔린 통찰력이 그녀의 텍스트를 흩날리지 않도록 잘 붙잡아준다. 많은 철학자들이 사랑하는 도시 산책 에세이의 꽤나 쉬운 버전이랄까?

신경증적인 인간 혐오나 무조건적인 인간애 같이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은 저자가 도시와 관계, 타인과 자기 자신을 이리저리 관찰한다. 자신의 내면도 엄중한 시선으로 해체시키는 투명한 용기 덕분에 그녀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그녀처럼 도시에 혼자 사는 여자로서, 그녀의 이야기가 내게 괜찮다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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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에 대하여)
서로에게 심취한 두 사람의 관계는 1년 반 남짓 지속됐다. 이후 콜리지는 증폭된 혼란에 내면을 잠식당한 반면, 워즈워스의 내면에는 자부심이 거의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몰두하던 시간도 끝이 났다. 2년 가까이 유지돼 온 각자의 모습, 서로에게서 온전한 기쁨을 만끽하던 두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를 알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 속에서 자기 최선의 자아를 느끼는 게 더는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자기 최선의 자아. 이는 몇백 년간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때면 반드시 전제되는 핵심 개념이었다.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것. 치유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은 얼마나 낯선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 최선의 자아를 긍정하기는커녕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공포, 분노, 치욕을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함께 있을 때 자신의 가장 깊숙한 부끄러움까지 터놓고 직시하는 일만큼 우리를 가까워지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콜리지와 워즈워스가 두려워했던 그런 식의 자기폭로를 오늘날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건 상대에게 알려졌다는 느낌이다, 결점까지도 전부. 그러니까 결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털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리 문화의 대단한 착각이다. (28)

(남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나는 두 눈이 가늘어지며 심장이 식어가는 걸 느꼈다. 처음으로 그러나 마지막은 아니었다ㅡ남자들은 나와는 다른 종이라는 자각을 했다. 철저히 분리된 이질적인 종. 나와 내 연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얇은 막 같은 게 드리워진 것만 같았다. 욕망이 침투할 만큼 성기되, 인간적 유대는 어룽거리게 보일 만큼 불투명한 막. 내겐 그 막 너머에 있는 사람이 현실 같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그런 것 같았다. 그 순간 남자랑 잘 일이 평생 다신 없대도 상관없었다.
물론 나는 그 뒤로도 그들과 잠자리에 들었지만 저 남자와 헤어진 뒤에도 수없이 사랑하고 다투고 황홀감을 맛보았지만-보이지 않는 그 미묘하게 버성긴 괴리의 기억이 늘 나를 따라다녔고, 떠올리고 싶지 않을 때에도 떠올랐다. 나를 사랑한다면서도 자기가 인격체라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 내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은 납득하지 못하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 막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훗날, 내가 보이지 않는 막이라는 표현을 쓰면 그런 경험에 대한 분석은 저마다 제각각일지언정-무슨 얘긴지 단박에 알아듣는 여자들을 알게 됐다. 늘 그런 식이죠, 그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여자들은 전부터 쭉 그래왔던 그 방식과 이미 화해를 한 상태였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게는 그 일이 매트리스 스무 장 아래 깔린 완두콩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내 영혼을 쑤셔대는 통에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다. (38-39)

(운명적인 남성에 대한 환상에 대하여)
나는 여전히 엄마의 딸이었다. 엄마가 원판이면 나는 현상본이었지만, 어쨌든 우린 둘 다 거기에 있었다. 결국엔 혼자였다. 제짝이 아닌 사람과 함께.
도러시아나 이저벨이 그랬듯 나 역시 엉뚱한 남자를 짝으로 착각할 운명이었다는 걸, 제럴드와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날 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달려왔던 이유가 그거였는데. 그런 데 골머리를 썩이지 않았더라면 다들 무언가 쓸모 있는 과업을 찾느라 짝을 찾네 마네하는 문제 따위는 쭉 잊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않았다.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도무지 찾을 길 없는 진정한 짝이 인생의 화두가 됐고, 그런 사람의 부재는 모든 걸 정의내리는 경험이 됐다.
공주와 완두콩에 관한 동화를 이해하게 된 건 그 무렵이었다. 공주가 그동안 찾아다닌 건 왕자가 아니라 완두콩이었다. 스무 겹 매트리스 밑에 깔린 완두콩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바로 그때가 정의를 내리는 순간이다. 지금껏 이 길을 걸어온 이유, 거기서 확인하게 된 사실 불경스런 불만이 삶을 끝없이 가로막으리라는 것―그것이 바로 이 여정의 의미임을.
우리 엄마가 그랬다. 엄마는 그런 남자가 없다는 사실에 시름하느라 긴 세월을 보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강박적 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 모두―도러시아와 이저벨, 엄마와 나, 동화 속 그 공주―가 그랬다. 갈망이야말로 우리를 매혹하고 우리에게서 가장 깊은 관심을 끌어내는 힘이었다. 과연 체호프식 삶의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리도 없는것 때문에 긴긴 막이 세 개나 흐르도록 한숨짓는 그 모든 나타샤를 생각해보라. 답도 없는 딜레마를 늘어놓고 있으면 엉뚱한 남자들만 우르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제럴드와 나는 끝없이 대화를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누는 나타샤와 의사 같았다. 나타샤가 나누는 매혹적인 대화 이면에는 어마어마한 수동성이 자리 잡고 있고, 의사는 이를 더 두드러져 보이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나타샤와 의사는 헤어져야만 한다. 둘은 그저 서로를 곁에 둔 채 피차 어느 정도만 마음을 쓸 뿐이니까. (71-73)

(우정 없는 욕망의 남녀관계에 대하여)
문제는 우린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정 없이, 우리는 황야에 외따로 머물렀다.
나는 세상 사람 모두가 알면서도 늘 잊고 지내는 게 무언지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성적으로 사랑받는 것은 실제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서로의 내적 욕망을 자극하는 능력으로 사랑받는 것이란 걸. 매니가 욕망했던, 내게 할당됐던 그 권력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건 기정사실이었다. 누군가를 영원토록 매혹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나 영혼의 직관뿐인데, 내가 품은 그것들을 매니는 사랑하지 않았다. 물론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매니에겐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와 감각으로만 연결된다는 건,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내던져져서, 취약해지다 못해 곧 자기회의에 빠져죽어갈 거라고 느끼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128-129)

(2년간 사랑과 이상에 모든 걸 쏟아붓고 문득 칼같이 귀족적 기득권의 삶으로 돌아간 변호사에 대하여)
생각이 날락 말락했다. 이 모든 게 연상시키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있는 거 같은데? 다음 순간 생각이 났다. 애슐리 윌크스를 보고 있었구만. 감수성도 발달했고 자유로운 기질도 있는 사람이지만, 자기 영혼을 향해 묻기보다는 일정한 삶의 방식에 제 발로 얽매임으로써 타고난 성향을 마비시켜버린 남자.
로저 뉴먼은 잠시나마 제인 브라운과 사랑에 빠져 빈민가에서 일하는 동안 열정이란 걸 몸소 겪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으므로 저 아랫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을 죄다 겪어보고 깨치는 것도 나쁠 것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한낱 일시적인 조사의 일환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동행한 변호사와 늦은 밤 파크애비뉴를 따라 걷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헨리 제임스가 쓸 얘기지 이디스 워튼은아니네. 워튼은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제임스는 아무도 자유를 원하지 않는 걸 알았으니까. (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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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은 책이라 의무감에 다 읽었고, 그냥 그랬다. 여러 인물들이 대부분 대립항으로 단순하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나, 화자가 자신은 마치 입체적으로 세계를 관조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소설 내내 다른 인물과 그의 삶에 대해 자꾸 단정짓고 어떤 사소한 일이 그의 인생에선 최대의 아픔이었을 것이라느니 하는 재판관 같은 태도가 거부감을 일으킨다.

다시 말하면 작가가 인물들을 평면적이고 전형적으로만 그린지라, 거기다 쉽게 단정해버린 삶으로 인물을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는지라 읽다 보면 지루하다. 화자가 내 아픔이 크니 그저 맑아보이는 타인의 아픔은 축소시켜도 된다는 태도를 거듭하는 게 열패감 때문이라면 오히려 이해하겠지만 작가가 그것까지 의도한 것 같진 않고, 그게 작가의 생각인 것 같다. 사랑에 대해 잠언처럼 얘기하는 부분도 거의 공감이 안 가는지라, 그저 가슴 찌르르함을 선망하던 안진진의 나이에 읽었다면 이 책을 좋아했을지도.. 모순 출판 당시 유행했던 쿤데라 냄새도 난다. 그리 비슷하진 않지만.

결말도 소설 내내 작가가 열심히 아주 깔끔하게 그려놓은 평면적 이분법의 세계를 붕괴시켜 새로 조립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세계관 그대로 방치한 채 끝을 내니 찜찜하고, 이게 뭐지 싶다.

나의 상처와 열등감을 설명하기 위해 무결한 삶을 사는 타인을 가상에 띄우고는 그것을 부정하여 ‘열등한‘ 내 삶을 긍정하는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2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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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녀의 의지가 강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심성이 매우 여린 여자였다. 그래서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게 두려운 나머지 상황에 이끌려 다닌 적이 많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올바른 사회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렇지 못한 사회는 몽둥이로 머리를 박살 내듯 순식간에 여자를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났고, 자신이 마치 공중으로 던져졌다가 떨어지면서 포석의 튀어나온 모양에 따라 앞뒤가 결정되는 1짜리 동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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