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나는 어떤 것에는 ‘네‘라고, 또 어떤 것에는 ‘아니요‘라고 말하다 보니 어느새 혼자 살게 되었다. 대답하는 일 자체가 선택이라는 것을 나는 결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내 대답에는 오직 내가 중대하게 관심을 가졌던 한 가지만이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외로움을 두려워하게 되는 일을 경계했다. 고독한 노년의 공포에도 몸을 사리지 않으면서 일과 사랑 같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일이 내게는 중요하게 느껴졌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너무도 터무니없이 싼 값에 팔아넘기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러니까 그 불안에 저항하는 일은 내게 정치적 견해 비슷한 것이었다. 그 입장을 쉽게 취할 수 있었다. 그문제를 나는 초보적인 수준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66-67)
나는 ‘결혼에 반대하며‘라는 제목으로 격렬하게 결혼을 비판하는 글 한 편을 썼다. 그 글에서 나는 우리가 결혼하는 이유는 자아를 발견하는 모험을 하거나 내면의 삶을 공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초적인 종류의 감정적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 위안에는 편협한 태도, 고독을 대하는 데 있어서의 미숙함, 몇 년씩 꺼내지 않고 지나가는 내면의 자아에 대한 어려운 질문 같은 것이 따라온다.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두려움에 맞서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면서 두려움을 제압해야 한다. 나는 사랑이나 가정에서의 친밀감 없이 지내는 것은 사실 반만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관대하게 인정했지만, 결론에서 지금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실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그 사실을 자각한 채 살아가는 일이 삶의 과업이다. 외로움을 이겨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외로움이 죽음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울 수는 있다. 그런 앎은 힘이 되고, 동맹이 되고, 무기가 된다. (7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