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함은 젊음의 소산이고, 지혜는 노년의 소산일세. (56)

체력이 떨어진 것은 늙은 탓이라기보다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삶을 보낸 탓인 경우가 더 많네. 젊은 시절의 방탕은 노년에게 허약한 몸을 넘겨주는 법이네. (73)

노년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기 권리를 지키고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영역을 지배할 경우에만 존중받는다네. 나는 노인 같은 데가 있는 젊은이를 좋게 보네. 마찬가지로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네. 그런 사람은 육체는 늙어도 정신은 결코 늙지 않는다네. (87)

내가 이 모든 것을 하는 원동력은 정신의 힘이네. 물론 이 일들을 하기에는 힘에 부칠 수도 있고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을 걸세. 그렇더라도 긴 의자에 누워서 더는 할 수 없게 된 그 일들에 대해 생각은 할 수 있지 않겠나. 내가 그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그런 종류의 일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네. 평생을 공부하고 열심히 활동한 사람은 노년이 다가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네. 어느 날 갑자기 노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힘 들이지 않고 서서히 인생의 말년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88)

배우가 연극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무대 위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네. 필요한 장면에만 등장하면 되네. 마찬가지로 현명한 사람은 관객이 마지막에 박수갈채를 보낼 때까지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있을 필요가 없네. (148)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짧더라도, 진실되고 올바르게 살기에는 충분히 기네. (148)

삶의 여정에서 그때그때 즐길 것을 모두 즐겼으면 살 만큼 산 것이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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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는 데 작용하는 개인과 사회의 복합적인 메커니즘을 통찰한 사람이 쓴 책이다. 바야르는 책을 유동적 맥락에 위치한 하나의 오브제로 위치시키고 이를 대화 소재로 다루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2. 바야르는 읽는 행위에 대한 근본적 고찰부터 시작한다. 읽는다는 것은 주관적이기에 본래 모호한 행위이다. 시간에 따른 망각까지 끼어들면 읽은 자와 읽지 않은 자의 경계는 더더욱 불명확해진다. 그 불확실성으로부터 탄생하는 담론의 지평과 창작의 공백을 인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수치심 없이 대화할 수 있다.

3. 책을 얘기할 때, 그것은 대부분 화자와 맥락에 의해 좌우되는 하나의 구실이거나 수단일 뿐이다. 실제로 책에 대한 대화는 대부분 그 책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것이며, 책과 책의 지도를 아는 것만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

4. 책을 읽은 사람도 그 책의 단편만을 기억하며, 끊임없는 망각에 처한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책에 대한 비독서를 의미하므로 사실 독서란 망각과 비독서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5. 책에 관한 대화에는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텍스트의 타당성을 선험적으로 확보해주는 권력이나 지위가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지 않고 책에 관해 얘기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며, 그것이 책과 독서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본질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6. 텍스트를 수용하고 재구성하는 개인 각각의 내면의 책이 존재하며, 우리가 읽는 책들은 이 내면의 책의 작은 조각들에 불과하다. 같은 책을 읽어도 각자가 다른 책을 기억한다.

7. 이렇게 해석의 다양성, 텍스트의 유동성, 책의 매개성, 독자의 주관성에 기반하여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있다.

8. 비평 자체가 책과 분리된, 그저 책을 모티브로 한 독립적인 예술 활동이란 것을 잊지 말라. 그렇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라. ‘책은 고정적이고 실재하며 텍스트는 신성하다‘는 미신에서 벗어나, 주객전도된 상황을 원위치시켜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동하는 유령의 책을 매체로 삼아 내 내면의 책을 서술하는 일에 더 매진하라. (2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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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모습이라 착각했던 많은 일면이 사실은 200여 년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책. 아주 거칠고 거친 버전의 발자크 느낌.

1800년대 부르주아의 모습과 오늘날의 일명 ˝유산 계급 자유 시민˝은 의외의 영역에서까지 레퍼토리와 제스처, 화법을 같이한다. 매일같이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인간의 습성은 그렇지 않다. 2020년대에도 부르주아의 아비투스가 굳건히 이어져 내려오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부르주아가 초상화 제작에 집착하는 모습은 인스타그램에 넘쳐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지며, 파리를 떠나 귀농했다가 적응에 실패하여 집을 헐값에 팔고 도심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한치의 오차 없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특히 ˝요즘 귀농이 트렌드˝라는 미디어의 끊임 없는 유난이 깊은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놀랐다. 200여 년 전부터 ˝귀농 트렌드˝가 시작되었을 줄이야. 귀농이란 개념 자체가 부르주아와 탄생을 같이 한 듯하다. (2021.8.14)

*번역이 좋아 술술 읽힌다. 다만 주석은 본문 이해와 관련이 낮은 쓸데 없는 정보까지 줄줄이 달려 있어 독서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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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예전에 국민군 복장을 걸치고 나폴레옹 시절 근위병 흉내를 내느라 무진 애를 썼는데, 지금은 시골 사람을 흉내내느라 애쓰고 있다. (제8장 귀농 부르주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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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표시 체계의 목적은 몇몇 비평가들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환상과는 달리, 책들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지속적이고 동질적인 과정이 아니요 우리 자신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 이루어지는 장(場)도 아니며, 오히려 갖가지 추억의 조각들이 집요하게 들러붙는 어떤 모호한 공간이요, 그것의 가치(창조적 가치도 포함하여) 또한 그곳을 배회하고 있는 불분명한 유령들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상기시키는 데 있다. (18-19)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의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각의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 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수 있기 때문이다. (31)

발레리는 이러한 비평 전통과 단절하여,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각과는 달리 저자는 작품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작품은 저자의 내부에서 자라나지만 저자를 초월하는 어떤 창작 과정의 소산이므로 그것을 저자에게 환원시키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어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별로 득이 될 게 없다. 결국 작품에게 저자란 그저 지나쳐가는 하나의 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8)

책들이 단지 지식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기억 상실, 즉 정체성의 상실과도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은 독서에 관한 모든 고찰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다. 이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텍스트 접촉의 긍정적이고 축적적인 측면만 헤아리게 될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 어쩌면ㅡ이 점이 더 크다ㅡ이기도하다. 말하자면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망각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몽테뉴의 글들에서 드러나는 ‘독서 주체‘ 의 이미지는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단일화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이 알아볼 수 없는 텍스트 조각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불확실한 존재다. (88)

맥락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 그것은 책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 관계 전체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다. (193)

타자가 알 거라는 생각이 주는 두려움은 책들에 대한 진정한 모든 창작을 가로막는 족쇄와 같다. 타자가 읽었으리라는 생각, 그가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창작을, 비독자가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부득이 의존하는 수단으로 환원시켜버린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205)

이상에서 보듯 우리가 얘기하는 책들은 가상의 어떤 완전한 독서를 통해 그 객관적 실제 내용을 되찾을 수 있는 실재하는 책들인 것만은 아니며, 각각의 책과 우리 무의식의 여러 잠재적 가능성의 교차에서 솟아오르는 ‘유령 책들‘이기도 하다. 이 ‘유령 책들‘은 물론 실재하는책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재하는 책들보다 훨씬 더 우리의 대화와 몽상을 풍요롭게 해준다. (208)

비평에 대한 자신의 변론을 계속하면서, 뭔가를 행하는 것보다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주장하는 길버트는 우선 역사상의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고대 영웅들의 수훈을 이야기한 시인들이 그 영웅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행위라는 것은 "그것을 탄생시킨 충동과 더불어 끝나" 버리는 "사실에의 비겁한 양보"지만, "세계는 몽상가들을 위해 시인이 구성했다"는 것이다. (221)

그럼, 독립적인 것이야. 시인이나 조각가의 작품이 그렇듯이, 비평 역시 모방이나 유추의 저급한 척도에 의해 판단되는 게 아닐세. 형태와 색채의 물질적 세계 앞에서나, 혹은 정열 및 사상의 보이지 않는 세계 앞에서 예술가가 담당하는 역할과 똑같은 역할을 비평은 예술작품 앞에서 담당하게 되는 거라네. 그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는 데는 굳이 최고로 섬세한 재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네. 그는 무엇이건 자신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이용하지.

그러므로 비평 대상이 되는 작품은 완전히 흥미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비평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작품은 단지 구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222-223)

어쨌든 작품은 담론 속에서 증발하면서 어떤 덧없는 환각적 오브제에 자기 자리를 내어준다. 다시 말하면, 온갖 심리적 투사(投射)를 유인하기 쉽고 사람들의 견해 표명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령 작품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작품을 자기 탐구의 매체로 사용하고, 이용 가능한 그 몇 안 되는 요소들에 입각하여 그 요소들이 대체 불가능한, 내밀한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해주는 바에 유의하면서 자신의 내면 책의 부분 원고들을 편찬하고자 하는 편이 더 낫다. 요컨대 우리는 "실재"하는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ㅡ물론 실재 책은 모티브의 계기로 쓰일 수는 있다ㅡ이 일을 저버리는일이 없도록 유념하면서 자기를 서술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230)

어떤 말이나 글의 맥락에 맞춰 적절한 책을 꾸며내는 일은 거기에 주체의 진실이 더 많이 실릴수록 그리고 그것이 그의 내면세계의 연장선상에서 기술될수록 그만큼 더 믿을 만한 것이 될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이다. (230)

책이란 읽을 때마다 다시 꾸며지는 것이란 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곧 별 피해 없이, 심지어는 이득을 얻기까지 하며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그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이라 할수 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통찰력 있게 말할 줄 안다는 것은 책들의 세계를 훨씬 웃도는 가치가 있다. 많은 작가들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양 전체는 담론과 그 대상 간의 연관을 끊고 자기 얘기를 하는 능력을 보이는 이들에게 열리는 것이다. (236)

그런 혼란은 책을 신성시하는 태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교육이 충분히 수행하지 못해 ‘책을 꾸며낼‘ 권리가 학생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존중과 수정 불가의 금기에 마비당하는 데다 텍스트를 암송하거나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내적 일탈 능력을 상실하고 상상력이 유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을 스스로 금해버린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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