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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문장마다 윤문 욕구가 샘솟는다. 본래 벤야민이 어렵게 쓴 걸 감안하더라도 우리말 구조를 비효율적으로 썼다고 느껴진다. 글자들이 삐걱댄다. 직역해서 나온 내용을 우리말 구조에 맞게 쓴 작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문장에 동일한 조사가 연이어 나오고 긴 부사구가 적절치 않은 곳에 있다. 읽기가 뻑뻑하다. 영어 독해하듯 어구마다 슬래시를 쳐가며 읽어야 하는 수준이다. 이것은 물론 역자와 편집자의 책임이다. 더구나 이 책이 중역이라 들었다. 역자가 영문학과를 나왔다고 했을 때 눈치는 챘지만 그럼 읽기라도 더 쉽든가. 내일 교보에 가서 출판사 길의 번역판과 비교해 볼 예정이다.


*이후 교보 강남점에서 출판사 길의 책이 없어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다른 사람이 길의 책 한 페이지를 찍어 올린 것을 보고 내 책과 비교해보았다. 역시나 길의 것이 훨씬 나아 기분이 좋지 않았고, 이 책을 읽은 뒤 길의 책을 다시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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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결여된 가재도구의 풍요는 시체 앞에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쾌적해진다. (p.24, <영주의 장원처럼 고풍스러운 가구를 비치해 놓은 10칸짜리 아파트> 중에서)

왜냐하면 우리가 15살 때 알고 있던, 아니면 하고 있던 것만이 이후 어느 날 우리의 매력이 되기 때문이다. (p.22)

위대한 작가들에게 있어 완성된 작품은 평생 작업해오고 있는 단장들보다는 덜 무게를 지닌다. 왜냐하면 오직 좀더 재능이 부족하고 산만한 자들만이 뭔가를 마친 것에 대해 무상의 기쁨을 느끼며 그것으로 다시 자기 삶을 돌려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천재에게 있어서는 모든 중간 흇식이, 또 운명의 무거운 타격조차도 편안한 잠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업실 자체의 근면함 속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단편 속에서 이 작업실의 세력권을 나타내는 선을 그린다. "천재는 근면하다." (p. 21, 표준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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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3


그런가 하면 전통적으로 볼 때 대담하게 자기 스스로를 조롱할 수 있는 자들은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이므로,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는 것이 바야흐로 힘의 과시가 되어 가는 판국이다. 그 결과 희극의 실행 여부가 계급을 가르는 새로운 장벽이 되었다. 즉 옛날에는 마음 놓고 노예를 비웃는 데서 주인임이 인정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마치 노예들만이 주인을 조롱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p.153)

사형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마치 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p.159)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 두 사람은 만족을 느끼게 될까? 아니면 몰랐던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이미 판이 벌어진 뒤에 들어왔다가 남들이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한 채 판을 떠나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바로 그 인생처럼 연극을 경험한 셈이다. 혹시 우리는 그런 특권을 누린 자의 풋풋함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p.178-179)

그러한 지혜를 얻는 방법은 보편적인 사상을 조금씩 조금씩 공부해 가면서 세태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고, 미디어의 정보와 자신만만한 예술가들의 주장과 제멋에 취한 정치가들의 발언과 비평가들의 난해한 논증을 매일매일 분석하고 카리스마적인 영웅들의 제안과 호소와 이미지와 외양을 연구하는 것일세. 그래야만 결국 그자들 모두가 바보라는 놀라운 계시를 얻게 될 테니까. 그러고 나면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는 것이지……. (p.290)

제대로 된 패러디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웃거나 낯을 붉히지 않고 태연하고 단호하고 진지하게 행할 것을 미리 보여 줄 뿐이다. (p.7)

작가는 다른 작가들을 염두에 두며 글을 쓰지만, 아마추어는 자기 이웃이나 직장 상사를 의식하며 글을 쓴다. 그래서 아마추어는 그들이 자기 글을 이해하지 못할까 혹은 그들이 자기의 대담성을 용납하지 않을까 저어한다(대개는 부질없는 걱정이지만 말이다). 아마추어는 말줄임표를 마치 통행 허가증처럼 사용한다. 다시말해서 그는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 하면서도 경찰의 허가를 받고 혁명을 하려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 (p.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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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섬 2015-08-0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 <관례적인 소비 의식>
 

태양이 살짝 고개를 내밀자 긴 그림자가 생겨났다. 그것은 곧 날이 저물 테고 그러면 모든 것이 실재와는 달리 해석되리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p.60)

"녹색의 하인리히도 아무것도 해석하려 하지 않았지." 클레어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는 어떻게 하나의 경험이 다른 경험을 해석해내며, 또 나중의 경험이 지금의 경험을 어떻게 재해석하는지를 가능한 한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음미하며 관찰하려 했지. 그는 자신은 직접 관여하지 않은 채 모든 경험에 일종의 자유로운 놀이 공간을 마련해준 셈이야. 그가 경험했던 사람들 또한 단지 그를 스쳐지나가며 춤을 추었을 뿐이고. 그는 그들에게 춤 상대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윤무를 추는 그들을 잡아끌지도 않았지. 그는 그 무엇도 해석하려 하지 않았어. 어떤 것은 다른 것의 결과일 뿐이라고 여겼지. 당신도 주변 세계가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며 춤을 추도록 내버려두는 타입으로 보여. 당신도 자신을 직접 연루시키기보다는 경험들이 스스로를 연출해 보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편이라는 의미야. 당신은 세상이 당신을 위해 마련된 성탄절의 선물 축제인 듯 행동하지. 당신은 포장된 선물 꾸러미가 하나하나 풀어지는 모습을 공손하게 지켜볼 뿐이야. 그 일에 관여하는 것은 무례한 태도가 되겠지. 당신은 사건이 일어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무엇인가 당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면 그제야 놀라서 해결하려고 나서지. 그러고는 그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감탄하면서 그것을 이전에 경험했던 수수께끼와 비교해보기도 하고 말이야." (p.100)

나는 무언가에 쉽게 연루되는 편이 아니야. 그것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다음 빠져나오지. 무엇 하나도 끝까지 경험하는 법이 없고 그것이 그냥 내 곁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거든. `그런 거지 뭐` 하고 생각하고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리지. (p.101)

아이가 지금 이곳에서 즉각적으로 모든 모사물과 기호를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다시 질투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p.123)

"베네딕틴이 자연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 기호와 문명의 대상물들 자체를 자연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 아이는 숲이나 폭포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안테나, 얼룩무늬 횡단보도, 경찰 사이렌에 대해 더 많이 물었다. 게다가 교통 표지, 네온 사인, 신호등과 같은 주변 사물들을 접할 때 더 생기 차고 더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이는 글자와 숫자가 존재함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는 그것들을 어떤 기호로서 해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사물로 간주했다. 나는 한동안 자연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단지 내 앞에 놓인 한낱 자연으로 여길 뿐 그 속에서 읽어낼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할 때 나 역시 지루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p.122)

왜 유디트에게는 지금처럼 아무렅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대해주지 못했을까? 교회의 둥근 지붕을 올려다보거나 돌바닥 위의 밀랍 자국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p.171)

"사람들한테는 누구나 다 갑자기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는 행동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존 포드가 말했다. "그럴 때면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분이 들 때면 혼자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다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연출된 듯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건 불행한 일이에요. 웃기는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의식할 때 놀랄 만한 일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자기 소신에 따라 그러고 싶어하지 않아요. 진실을 말해놓고도 스스로 화들짝 놀랍니다. 행복감이 주체할 수 없이 크다보니 더이상 혼자서 감당해내지 못하고 또다시 진실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면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늘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p.199-200)

"누군가에게 특징을 부여하는 건 그의 품위를 빼앗는 짓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한 인물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들을 모두 꼽아보면 결국 기벽 같은 것만 남더군.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처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가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말을 하도록 시키면 그들은 처음 몇 문장을 말하고 나서는 이내 나의 말문을 막아버리고, 그들 스스로가 영원히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되어버리더군.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이야기들을 쓰기로 했어." (p.156)

나는 한참을 누군가와 같이 있었어도 그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여드름이 나 있었다든가 혼자 중얼거리는 타입이었다는 것 정도나 기억했다. 비정상적인 모습이나 나쁜 습관이 눈에 띌 때만 다시 한 번 보았지 그 외에는 한번 힐끗 보고 말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경우라도 생기면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하지만 상상 또한 한계가 있어서 때로는 그 독특한 특징들을 마치 지명수배 전단이 그렇듯이 거짓말로 꾸며내야만 했다. 그 독특한 특징들이 모든 자연 풍경과 연관 관계, 그리고 운명까지도 대체했다. 유디트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나는 무언가를 처음으로 경험하기 시작했으며 주변 세계라는 것이 더 이상 악하지만은 않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나는 특징들만 모으기를 그만두고 인내심을 갖기 시작했다.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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