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결을 따라 되짚어 보는 82년생 김지영의 생애사. 이것은 곳곳에 말을 잃고 숨어 있는 한국 여성들의 생애사이기도 하다. 살고자 하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만 성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그래서 더 막막한 장벽들에 끊임없이 부딪치고 마땅한 자아 없이 여자, 딸, 엄마 김지영으로만 남은 생. 남녀불문 페미니즘에 문외한인 이들이 그에 대한 첫 감각을 다지기에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처럼, 많은 성 불평등이 아주 투명하게, 그렇지만 아주 깊게 배어 있다. 모든 여자의 인생에. (17.1.23)

"김지영 이제 걔랑 완전히 끝난 것 같던데?" / 예전부터 김지영한테 관심 있지 않았느냐,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해 봐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처음에는 꿈인가 했는데 곧 정신이 들면서 방 안에 있는 무리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복학생 선배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이제 잠도 완전히 깼고 좀 덥기도 했는데 본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불을 걷고 나갈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민망한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 밤새 뒤척였다. 다음 날 아침, 김지영 씨는 숙소 근처를 산책하다가 그 선배와 마주쳤다. / "눈이 충혈됐네? 잘 못 잤어?" /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 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92-94)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132)

"그리고 잔소리 안 듣는 방법이 있긴 한데……." / "뭔데?" /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 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 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구체적인 가족계획이라든가 출산 시기를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정대현 씨도 김지영 씨도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정대현 씨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135)

첫 직장이었다. 첫발을 내딛은 세상이었다. (…) 세상에 큰 목소리를 내는 일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도 아니었지만 김지영 씨에게는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주어진 일을 해내고 진급하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꼈고, 내 수입으로 내 생활을 책임진다는 것이 보람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끝났다. 김지영 씨가 능력이 없거나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는 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듯,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146)

그런데 적지 않은 언론에서 병원의 처치와 약물들이 아이에게 미칠 수 있는 인과관계도 불분명한 악영향을 언급하며 죄책감과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머리만 좀 지끈거려도 쉽게 진통제를 삼키는 사람들이,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엄마들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 내라고 한다. 그게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혹시 모성애라는 종교가 있는 게 아닐까. 모성애를 믿으십쇼. 천국이 가까이 있습니다!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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