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8)
퐁트벵은 길게 뜸을 들인다. 그는 뜸의 거장이다. 그는 오직 소심한 사람만이 뜸 들이는 걸 겁내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면서 성급 히 엉뚱한 문구들을 내뱉어 조소를 자초하고 만다는 것을 안다. 퐁트벵은 매우 장엄하게 침묵할 줄 알며 은하수조차도 그의 침묵에 감명받아 초조히 대답을 기다릴 정도다. (32)
"당신 엄마가 곧잘 당신에게 하던 말 생각나? 내겐 그 목소리가 어제처럼 생생하게 들려. 밀란쿠, 제발 농담 좀 그만둬. 아무도 널 이해해 주지 않을 거야. 넌 세상 사람 모두를 모독할 거고 끝내는 세상 사람 모두가 널 혐오하고 말 거야. 당신도 생각나?" (102)
비루한 하인들처럼 그들은 부과된 대로 인간 조건을 향유한다. 존재의 행복한 춤꾼들. 그런 반면 그, 비록 어떤 출구로 없음을 그도 알지만, 그는 그런 세상에 자신이 반대함을 부르짖는다. 그러자 그가 그 고상한녀석의 얼굴에 던져야 했을 대꾸가 머리에 떠오른다. "카메라들 아래 사는 것이 우리 조건이 되었다면 나는 그 조건에 반항하겠어. 난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어!"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113)
모든 몸짓에는 그들의 실제 기능을 넘어서,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의 의도를 초월하는 어떤 의미가 있다.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물에 뛰어들 때는, 그 잠수자가 슬픔에 잠겼다 할지라도, 그 몸짓에서 드러나는 것은 기쁨 그 자체다. 누가 옷을 입은 채 물에 뛰어든다면 이는 얘기가 전혀 다르다. 익사하려는 자만이 옷을 모두 입은 채 물에 뛰어든다. 그리고 익사하려는 자는 머리부터 먼저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떨어뜨린다. 몸짓들의 그 태고적 언어가 그렇게 하길 원하는 것이다. (141)
고인의 밤을 회상하면서 나는 실존 수학 교본 첫 번째 장들 가운데 하나에 드는 이 유명한 방정식을 상기했다. 속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는 것. 이 방정식에서 우리는 여러 필연적 귀결들을 연역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혔으며 이 욕망을 충족 하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그가 발걸음을 빨리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 주길 이제 더는 바라지 않음을,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하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작은 불꽃을 훅 불어꺼버리고 싶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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