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여기서 `공부`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한 세기 전의 신학자였던 저자에게 `공부`는 근본적으로 ˝신이 부여한 소명˝을 따라 ˝신의 그림자를 쫓아˝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었고, 그런 그가 `공부하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해 일러두는 책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주된 부분이기에 큰 괴리는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무교인 나에게는 자칫하면 먼 얘기로 들릴 수 있는 부분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때에 따라 `신`이라는 단어를 `나 자신`이나 `세상` 또는 `자연`으로 바꾸어 읽으니 더 흡족스러운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공부에 몰입하여 `신`과 직접 교통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저 앞서 말한 단어들로 바꾸어 읽으니 얼마나 중요한 말이 되던지.

9.7
인간인 이상 영원히 모를 테니까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 것,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지 말 것, 진리를 얻기 위해 사물의 이면을 볼 것, 사물과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말하고 있으므로 귀를 기울일 것 등등 마음 수련에 대한 부분은 마치 명상집 같다. 신의 뜻을 추구하는 공부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꼭 탐구의 영역을 한정하지 않더라도 명상과 공부하는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어떤 분야가 되었든 마음을 가지런히 해야 그 학문의 본뜻이 쉬이 흘러들어오기 마련이니까.

9.8
어쨌건 신학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 것도 꽤 있다. 신과 성별(聖別)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데 무교로서 어쩔 수 없이 지루했다. 그리고 되풀이하는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많다.

9.8
학문 공부도 결국 인생 공부라는 것을 잊지 말 것. 그렇기에 학문을 공부하는 행위 자체가 곧 지속적인 목적이자 삶의 궁극적 의미라는 것을 잊지 말 것. 생각해보면 내게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할 기회가 생긴 게 큰 축복이자 특권 아닌가. 더군다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러니까 쓸데없는 세상살이 걱정 끌어모아서 하지 말고,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주어진 이 특권을 감사히, 충만히 누려보자.

9.8
공부를 하는 기간동안 겪게 되는 시련들은 모두 공부로 치료하라는 말.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우울할 때, 무기력할 때, 좌절스러울 때, 외로울 때 모두 공부에 의지해 평온을 소환해 보자. 학문을 공부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충만함이라는 그 특정한 알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하자. 물론 말로만 쉬운 이야기지만 노력이라도.


9.8
끊임없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결단을 내린 지난 시간을 잠시 잊고 있었다. 막상 용기를 내어 새로운 결정을 실천하려 하니 소심함이 솟구쳐 기회비용에 마음을 뺏긴 채 오들오들 떨면서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이 책이 그 마음의 먼지를 후,하고 불어주었다. 얕은 먼지 아래에 가려진, 아직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토대를 보여주었다. 참, 나는 성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공부하고 싶어서 공부하려는 거였지. 왜 나부터도 스스로에게 효용의 질문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니 부정적인 답이 나오고 불안했던 건데. 세간의 물결에 쉬이 휩쓸리는 나를 잡아주고, 심지어 앞으로 휩쓸리지 않는 방법까지 조곤조곤 세세히 알려주었으니 이제 나만 잘 살아보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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