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드디어 발자크
[고리오 영감]은 내가 이르게 만난 탓인지 몇 번을 시도했으나 50페이지 이상은 넘어가지 않더니, 5년쯤 뒤에 만난 [잃어버린 환상]은 내 손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전체 사회의 방향을 모르는 채 표류하는 청년들이 앓고 있는 병”,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새로운 시대로 떠밀려 온 청년들의 불안과 고독과 환멸”, “몽롱한 시선으로 현재를 바라볼 뿐인 청년들의 희생”과 같은 개정판 서문의 어구들 덕분에 독서에 시동이 걸렸다. 인쇄와 출판이라는 흥미로운 소재, 그리고 시인을 꿈꾸는 시골 청년이라는 캐릭터가 첫 번째 연료가 되었고, 인간 세상을 난도질할 듯 단단하고, 스치기만 해도 피가 뚝 떨어질 듯 날카로운 발자크의 인간 이해와 통찰이 나를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끌었다. 최근에 이런 비슷한 기분으로 소설을 읽었던 것은 2년 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였다.
2. ‘통찰력’보다 발자크가 더 깊다
이렇게 수많은 인간 군상 각각의 저 밑바닥, 오랫동안 빛이 들지 않아 본인 스스로도 모르는 채 곰팡이가 피어버린 그 내면의 지하를 그는 어떻게 아는 걸까. 특정한 유형의 인간들만 꿰뚫어본다면 몰라도, 그는 온갖 다양한 인간 유형들을 제시하면서 그들을 모두 다른 모양의 입체로 세밀하게 그려낸다. 거기다 각각의 인간 내부에서 치열하게 생동하는 정념과 생각들, 그리고 그것들의 모순들까지도 수면 위로 띄운다. 그 복잡다단한 역학 위에서 행동하고 발화하는 개개의 인간들이 지속적인 성향과 우연적인 감정에 의해 맺어내는 관계, 또한 그로 인해 전기처럼 일어나는 사건들을 망설임 없이 전개시킨다.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스타일이라는 얕은 그물로 포착할 수 없는 작품.
발자크는 통찰한다. 그는 인간의 내면, 그리고 그 내면들이 사회적 양식과 오묘하고도 영악하게 결합하여 운동하는 세세한 흐름을 모두 포착해버린다. 그러니까, 인간의 야만적인 내면과 정교화된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상반된 두 항을 그는 모두 이해하고 있으며, 이 둘의 다양한 관계 양상마저도 깊숙히 이해하고 있다. 발자크는 사회학이라는, 하지만 거시 사회학뿐 아니라 고프만을 필두로하는 미시 사회학의 채널까지 일찍이 작품 안에 포섭하고 있다.
3. 겪어봐서 아는 건가요
재밌는 이야기. 도스토예프스키가 발자크의 작품을 매우 선망했으며, 그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였고, 모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좋아하는 작가 사이에 이미 고리가 있었다니 왜인지 뿌듯한 기분. 또 하나 더. 발자크는 어떻게 이런 다양한 인간 유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며 또 사회, 삶, 관계, 욕망으로 얽힌 복잡한 그물망 속 근본적인 원리를 면면이 이해하고 있는 걸까? 중반부쯤 되어 궁금하디 못해 검색을 해보았더니 그의 인생사 역시 꽤나 강한 소용돌이였던 것이다.오랜 기간 뚫고 지나온 수많은 경험이 기반이었던 걸까. [잃어버린 환상]을 출간한 그의 나이는 어리지 않은 45세. 찬란하고도 구렁텅이 같았던 과거에서 그는 이 소설을 게워냈던 게 아닐까. 발자크는 뤼시앙이 쾌락으로의 입문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독백 장면에 “모든 것을 그리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것들을 알아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발자크 씨, 당신의 삶에 의하면 이건 사실로 보이네요.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