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속의 외침 - 2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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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아이의 우울한 성장소설.

   가난한 농촌의 3대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읽는 내내 우울했다.

   욕설과 폭력, 불륜, 패륜...

   행복을 느끼며 사는 날보다 우울한 삶이 많았던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은 읽는 사람마저 함께 우울하게 만들었다. 주인공과 몇 몇 인물을 제외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드물다. 아마도 시대가,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외면하고 싶다.

 

   우리의 옛날도 다르지 않았다.

   인권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러는 요즘에도 시사프로그램에서는 패륜과 불륜이 쏟아져 나온다. 오히려 쑨유차이 집안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외면하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슬픈 멜로나 궁상스런 영화 보다는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오락영화를 보고 싶어지는 것처럼.

 

   내용도 단편 모음집 같은 구성도 썩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소설을 읽고 못 읽었던 작가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아마 위화라는 작가의 맛깔나는 글쓰기 솜씨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허삼관 매혈기는 가랑비 속의 외침과 같은 재료를 가지고 너무도 상반되는 요리를 만들어 내놓았기 때문이다. 전자가 우울함만 주었다면 후자는 해학적인 웃음과 감동의 눈물을 주었다.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웃음과 동시에 눈물을 훔치게 했던 허삼관 매혈기....

   오늘 이야기해야 하는 책은 가랑비 속의 외침임에도 뒤늦게 읽은 허삼과 매혈기에 대한

감동을 늘어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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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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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참 근사하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로도 유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알고 있는 사전 지식은 책이나 영화 모두 멋들어진 제목뿐……. 남자 주인공이 다니엘 데이-루이스였던 것과 영화 속 프라하의 풍경에 반한 사람들이 한 때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프라하를 꼽았다는 정도이다.

 

   영원한 회귀와 니체 운운하며 시작한 이야기는 ‘책 읽어내기’를 각오했던 우려와 달리 네 사람의 삶에서 죽음까지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 놓는다.

   아내와 아들에 대한 책임감에 연연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의 다양함을 탐닉하는 토마시, 스스로 망가진 인생이라 여기며 삶의 추악함을 자식과 가정생활에 고스란히 드러내며 살아가는 엄마의 굴레 속에 갇혀 있던 테레자, 끊임없는 배신의 연속된 삶을 살아가는 사비나, 일상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유지하며 살아 왔던 프란츠…….

   성장과정이나 사회적 지위 모두 판이하게 다른 네 사람의 삶은 소련 점령하의 체코 역사와 맞물려 서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삶이 또한 매우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연속된 우연으로 운명처럼 테레자를 만난 토마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이끌려 가지만 자신이 살아 왔던 삶의 방식을 크게 바꾸지는 않는다. 테레자 또한 토마시를 운명적 사랑의 대상으로 인식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자 애쓴다. 토마시와 프란츠에게서 각기 다른 연애 감정을 느끼는 사비나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보호망을 쳐 놓고 항상 배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가정적이고 도덕적인 프란츠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쫒아 인생을 전환한다.

 

   삶의 겉모양만 다를 뿐 네 사람은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비겁하지 않게 현실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할 수 있는 만큼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최고가 아닌 최선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삶은 순간순간 짧은 후회는 있을지언정 지금의 삶을 지속하지 못할 커다란 낙담도 없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커다란 희망도 없다.

   작가가 이야기하듯이 역사는 회귀되지 않기에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결과를 알 수 없는 삶에 대해 연연해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존재의 가벼움 그 자체로 현실을 사는 것일 뿐이다.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쿤데라는 그의 최근 에세이 『커튼』을 통해 사회 운동, 전쟁, 혁명과 반혁명, 국가의 굴욕 등 역사 그 자체는 소설가가 그려야 할 대상, 고발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며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오직 “인간 실존에 빛을 비추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역사로서의 예술, 혹은 예술의 역사는 덧없으며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할 것”이라는 쿤데라의 말처럼, 이 작품은 역사에서 태어났으되, 역사를 뛰어넘는 인간의 실존 그 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사랑받는 불멸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민주 ·자유화의 열망이 점차 고조되어 갔으나, 노보트니 정권은 이를 외면한 채 소련만을 추종하였다.

   1960년대 이에 반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민주 ·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물결에 밀려 마침내, 1968년 1월 노보트니 당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의 둡체크가 당 제1서기를, 체르니크가 수상을, 온건파 스보보다가 대통령직을 각각 맡았다.

   이들 개혁파는 1968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즉 민주 ·자유화노선을 제창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재판의 독립, 견고한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보장, 국외여행 및 이주의 자유보장, 경찰정치의 부활저지, 경제계획의 추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서의 연방제로의 이행,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등이다. 따라서 사실상 검열제가 폐지되고 많은 정당 ·정치단체가 부활되었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광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가 있자 온 국민은 ‘프라하의 봄’이라 하여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체코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이 체제변화를 ‘마르크스 ·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으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1968년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군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함으로써, 이 자유화운동을 일시에 저지하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하였다. 1969년 4월 소련은 둡체크를 강제 해임시키고 후임 서기장에 후사크를 임명하였으며,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을 제명 또는 숙청하였다.

 

--------------------------------------------------[출처] 프라하의 봄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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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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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째 아이>를 읽고서 참 독특한 내용이라 생각했었다. 너무도 평범하고 화목한 집안에 태어난 돌연변이 아이로 인해 해체되어 가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는 끝끝내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다. 어떠한 해결책도 없이 끝나버리는 이야기에 실망하는 나에게 어쩌면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또 다른 책 <풀잎은 노래한다>를 읽으면서 나는 정말이지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현실만 보여주는 작가에게 조금쯤 화가 나기도 했던 것 같다. 리얼리즘 작가가 보여주는 거짓없는 현실이기에 더더욱 그런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려 노력하나 지지리 운도 따라주지 않고 일관성 없는 소심한 태도로 언제나 제자리의 삶만 영위해 나가는 리처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뒤로 자신의 소신을 잃어버리고 정형화된 사회의 굴레와 적응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외로워하며 지쳐가는 메리, 인간으로써 당연히 받아야 될 작은 존중의 배신에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모세를 보노라면 삶에 조그마한 희망도 느낄 수가 없다.

   지나치리만큼 흑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메리를 보면 자신의 처지에 대한 화풀이가 더해졌다 하더라도 너무 매몰차고 자신의 주제도 모르는 처신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메리가 속한 사회에서 흑인을 인간적인 마음으로 동등하게 또는 친절하게 대했더라면 읽는 이에게 만족을 주었을지 모르나 오히려 같은 백인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그 사회에서 추방되었을지도 모른다.

   리처드 또한 메리보다는 흑인들에게 조금의 인간성을 느끼고 있지만 기본적인 의식의 밑바탕에는 흑인을 천대시하는 기본적인 백인의 성향이 깔려있다.

   적응하려 노력해도 적응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메리의 정신상태는 읽는 내내 안타깝다 못해 답답한 마음에 옆에 가서 옆집 아줌마처럼 참견이라도 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찰리의 아내를 열등감과 자존심 때문에 멀리한 그녀가 나의 조언을 참고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현실, 그것은 과연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인가? 글쎄 노력은 할 수 있지만 나의 노력으로만 이루기에는 사회적 편견과 주변 상황의 영향을 무시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삶,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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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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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해설은 파우스트의 제작 기간이 60여 년에 걸친 만큼, 그 속에는 작가 괴테의 삶과 세계관, 즉 슈투름 운트 드랑(1770년에서 1780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운동. ‘질풍과 노도’로 번역된다. 이 명칭의 유래는 F.클링거의 동명(同名) 희곡(1776)에서 온 것이다. J.헤르더를 지도자로 하여 계몽주의 사조에 반항하면서 감정의 해방 ·독창 ·천재를 부르짖은 이 젊은이들에 의한 운동은 사회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었던 까닭으로 그 영역은 문학 분야에만 한정된 채 단기간에 소멸되는 길을 걸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 문학운동의 주요한 장르는 시와 희곡이었으며, 작가로서는 괴테, 실러, J.렌츠, 클링거, 바그너, F.뮐러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 실러의 《군도(群盜)》(1781) 《간계(奸計)와 사랑》(1774)이 있다.)기의 자유분방한 천재성, 그리스적 조화미를 추구한 고전주의 정신은 물론, 80여년에 이르는 긴 생애의 온갖 체험과 예지가 깃들여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뒤로는 괴테가 얼마나 훌륭한 작가이며 그에 못지않게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완성한 훌륭한 작품 파우스트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본문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던 부분들이 작품해설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되어 다행이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자이며 괴테의 희곡 은 그런 파우스트를 모델로 신과 악마 사이의 쟁점이 한 인간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를 보여준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매인다.>라는 신의 확신을 기본 주제로 삼아 결국 파우스트는 신의 확신대로 온갖 세상의 쾌락과 권력을 맛보지만 자신의 의지로 악마와의 거래를 물리치고 여인의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

 

 

   생각해보니 나는 <파우스트> 외에 꽤나 유명한 고전 작가인 괴테의 작품을 단 한 편 밖에 읽지 못했다. 감상적이던 10대에 자칭 문학소녀들이 왠지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끼워 넣듯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고 최근에 가물가물한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같은 책을 또 한 번 읽었을 뿐이다. 읽고 나서 나이에 따라 같은 내용의 책이 던져주는 감동과 의미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나는 괴테의 유명한 두 번째 작품을 읽었다. 읽으면서 유명세와는 달리 제목 외에 이 책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극히 적었음을 알았다. 이 책이 소설이 아닌 희곡이라는 사실도 책을 읽으며 알았고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뒤죽박죽 돌아가는 이야기 전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소설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도 아니고 대화 형식의 희곡에서 장면장면 구체적인 설명 없이 넘어가는 이야기 전개와 다양한 등장인물의 등장에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책의 앞부분을 뒤적거리기 일쑤였다.

   60여 년에 걸친 인생 여정 속에 탄생한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40여 년 세월이 짧은 걸까, 아니면 한 작품을 너무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하다보니 매끄럽지 못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그에 비해 단기간에 썼다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읽었었는데 <파우스트>는 같은 작가가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파우스트>를 읽고 나서는 다른 고전들을 읽었을 때 느끼는 뿌듯함보다는 많이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앞으로 20년 후에 또다시 읽게 될까? 읽는다면 그 때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파우스트는 15∼16세기 독일에 실존하였던 인물로서 게오르크 파우스트 또는 요하네스 파우스트로 불리운다.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파우스트는 실제 두 사람으로 추측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이 악마와 '의형제' 또는 친한 친구임을 여러 차례 암시하고 있다. 그들 중 한 사람(또는 둘 다)은 1540년경에 죽었고, 마술과 연금술, 점성술과 예언, 신학적 연구와 악마 연구, 마법과 심지어 남색 등으로 뒤얽힌 전설을 남겼다. 당대의 참고문헌에 따르면 그는 두루 여행을 했고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관찰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그의 사악한 명성을 전하고 있다. 당대의 인본주의 학자들은 그의 마술 솜씨를 하찮은 협잡이라고 비웃었으나, 마르틴 루터와 필리프 멜란히톤 같은 루터교 성직자들은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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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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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늘 드는 생각…….

   아~~~~ 또 뭘 어떻게 써야하나. 항상 재미있게는 읽었는데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근 몇 년을 한 달에 한편은 쓴 것 같은데 쓰고 싶은 말이 마구마구 떠올랐던 책은 몇 권 안 되는 것 같다. 역시 가장 나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들이 할 말도 많았던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펴냈던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인 농담으로 말하자면 주인공의 이름도 잊어버린 지금 책의 내용을 생각해보니 무심코 내뱉은 농담, 축출, 귀향, 농담이 되어버린 어설픈 복수, 옛 것과의 어울림 대충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나의 현실이나 경험과는 먼 이야기 같으면서도 소소한 부분을 따져보자면 말실수나 작은 행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던 경험에서 일맥상통한 부분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인공은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모순에서 벌어진 상황인 반면 나의 경우는 잡다한 일상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근래 밀란 쿤데라나 도리스 레싱과 같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체제를 경험했던 작가들의 책을 읽게 되면서 느끼게 된 점이 있다. 봉건사회에서 환영 받았던 사회주의의 규모와 영향력이 어린 시절 공산당하면 소련, 중국만 떠올렸던 것과 달리 생각 외로 세계 곳곳 깊숙이 번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닫게 된 이상과 현실의 모순에서 사회주의 체제 내부에서도 끊임없는 균열이 일어났고 이들처럼 자기 비판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결국 체제 붕괴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 체제와 강대국들 사이에서 2분법처럼 갈라진 특수한 상황이어서인지 소설가들이 보여주는 사회주의 체제나 모순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사상적 분단국가…….

   바람직하지 않은 희귀성이 슬프다.

 

   *밀란 쿤데라 |||1929년 체코의 브륀에서 야나체크 음악원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란 쿤데라는 그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프라하의 예술아카데미 AMU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1963년 이래 「프라하의 봄」이 외부의 억압으로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으며, 1968년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가 압수되는 수모를 겪었다. 『농담』과 『우스운 사랑』 2권만이 쿤데라가 고국 체코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농담 La Plaisanterie』이 불역되는 즉시 프랑스에서도 명작가가 되다. 그 불역판 서문에서 아라공은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한바 있다. 2차대전 후 그는 대학생, 노동자, 바의 피아니스트(그의 아버지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를 거쳐 문학과 영화에 몰두했다. 그는 시와 극작품들을 썼고 프라하의 고등 영화연구원에서 가르쳤다. 밀로스 포만(Milos Forman), 그리고 장차 체코의 누벨 바그계 영화인들이 될 사람들은 두루 그의 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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