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동안 자신이 사는 '현대'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르지는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옷차림, 신발, 빌딩높이, 문장의 가로쓰기 방향이 다른데다가 한자도 어렵지만 인간 자체가 뿌리째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버튼 하나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 인간의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는 것. 그게 가장 큰 차이 아닐까. 치에나 후키가 일하는 걸 봐도 그렇다. 청소기나 세탁기가 없고 자가용이 없으니 시장도 하녀를 보내야 한다. 할 일이 많은 시대다. 물론 하고 싶은 일만 골라 할 수 없어 힘들겠다 싶기는 하지만 노동의 의미가, 다카시가 있는 '현대'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분명했으리라. 담배 한 갑을 사려고 해도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주고받아야 하는 시대다. 담배와 거스름돈을 주고받는 행위에는 그만한 세상살이의 무게가 담겨 있다. (이어서)-133쪽
(이어서)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나 같은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현대로 돌아가 재수를 해서 대학에 합격하고 나면 사 년간 적당히 놀다가 취직. 그 뒤엔 무슨 일을 할까? 어떤 직업을 고를까? 버튼 하나면 전부 해결되는 시대다. '인간'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다. 다카시라는 '인간'을 필요로 하는 일을 발견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인생' 그 자체의 의미를 찾기도 쉽지 않다. 만일 이후에 전쟁이, 사상 통제가, 공습이, 식량 부족이, 점령이 기다린다는 역사를 몰랐다면, 이 시대에 살고 싶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쁘지 않다. 앞으로의 일 따위 고민하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다. 인간의 힘을 소중히 여기는 시대인 만큼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따뜻하다. 빵집 주인도 저렇게 친절하지 않은가. 살아가기에 결코 나쁘지 않은 시대다. 히라타가 왜 여기에 왔을까 하는 의문이 새삼 떠올랐다. 회복되면 꼭 답해 주겠다고 했다. 이 시대를 봤냐고 물어보며 나라면 알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어쩌면 히라타는 그저 이 시대의 편안함에 묻히고자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133쪽
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가짜 신이 아닌, 아주 평범한 인간으로. 역사의 의지 따위는 몰라도 그 흐름에 몸을 맡겨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으로. 하루 앞을 몰라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인간으로. 내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이웃의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인간으로.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는 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용기를 지니고 역사를 헤엄쳐 가는 인간으로. 어디에나 있는 보통의 인간으로.-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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