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녀 이야기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시부사와 다쓰히코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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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떠올리며 신약성서 마가복음 6장 17~29절에 기록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가 떠오른다. 헤롯 왕이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요한은 이를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비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려 했지만 선지자로 추앙받던 요한을 두려워한 헤롯의 반대로 죽이지 못한다. 요한의 죽임만을 생각하던 어느 날, 헤롯의 생일이 되어 연회가 벌어졌을 때 헤로디아가 어린 딸 살로메를 불러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게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였고, 같이 크게 기뻐했던 헤롯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다.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은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원했고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던 헤롯은 결국 요한을 참수하고 만다.

성경에서의 살로메는 어머니인 헤로디아의 지시를 받고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과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는 요한에게 반해 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헤롯을 유혹하는 팜 파탈로 묘사되고 있다.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악녀란 어떤 존재들일까? 시부사와 다쓰히코가 정의한 문고판 후기를 보면 악녀란 "미모와 권력을 가지고 악의 극한까지 간 여성, 혹은 애욕과 범죄로 스스로를 망가뜨린 여성이라고 칭하고 있다. 악녀를 칭하는 기준 정확히 구분 짓기는 힘들지만 후세에 오래 전해질 만큼의 강한 인상을 남기며 남성의 운명을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여성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동, 서양을 합쳐 12명을 선정해 소개하고 있다. 루크레치아 보르자 엘리자베스 여왕, 메리 스튜어트, 마리 앙투아네트, 클레오파트라, 측천무후 등 다양한 시대와 국가의 여성의 삶을 그만의 스타일로 풀어내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였고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는 매리 스튜어트를 둘러싼 얽힌 비극적인 비운의 삶과 폭군 네로의 어머니로서 그의 인생 전반부를 공포로 지배했던 아그리피나와 남존여비 봉건사회에서 일개 여성이 지존의 자리에 올라 모든 남자들의 무릎을 굻게 만들었던 측천무후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극단적인 로맨티시스트 기질을 지닌 메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을 과연 '악녀'라고 불러야 할지 무척이나 의문스럽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순교자로 찬미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를 남편을 살해한 음탕한 여성이라고 비난한다. 많은 역사가나 시인에게 이토록 다양하게 묘사되는 여인도 드물 것이다. p78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그리피나 역시 자신의 지위가 언제든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신음했다. 황제에게는 메살리나가 낳은 브리타니쿠스라는 적자가 존재했다. 아그리피나의 친아들 네로는 황제에게는 남의 자식이나 매한가지였다. 장래에 대한 그녀의 불안감이 싹을 틔우고 있었던 이유다. p136

무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강인한 의지력과 정치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미신에 대한 맹신이 존재하던 시대에 미륵의 화신이라느니, 주 왕실의 자손이라느니 하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감쪽같이 미혹시켰기 때문이다. 화려한 의식이나 사원 건립도 보기에 따라서는 백성을 홀리는 선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예상을 뛰어넘은 효력을 발휘해 결국 그녀는 전대미문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p198

때로는 개혁의 주체로 때로는 정의의 집행자로 번번이 자행돼온 극단적인 행동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간이 문명을 이룬 이래 계속해서 나타난 수많은 폭정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 지금까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행해야 했던 수많은 정치적 행위들의 밑바탕에는 자신들 이외의 사람은 새로운 세상과 함께할 수 없는 정화의 대상일 뿐이다.

저자가 풀어내고 있는 악녀들은 찬미와 증오를 동시에 받고 있으며 저자 또한 여전히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단순 선과 악의 개념을 초월해 한 시대를 뒤흔든 여성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졌던 건 권력이 갖는 양면성인 것인가? 인간에게 권력욕이 있는 한 폭정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력자는 잠재적인 폭군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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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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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게 깎인 연필이 필통에 가지런히 있으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가방을 메고 짧지 않은 거리를 가다 보면 필통의 연필은 흐트러지고 까만 연필심은 고단함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필통 뚜껑만 열면 늘 잠자던 나무 향이 배시시 깨어났다. 그 향은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었다. 나무 안에 감춰진 까만 속심. 최근, 레트로 열풍으로 인해 형형색색이다. 한번 검정 연필이면 평생 검은색으로만 써진다. 사람으로 치면 고지식하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 뜨면 가족들을 위해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 같다. 부러진 연필을 깎고 또 깎아서 짧아진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워 공책에 삐뚤삐뚤 써 내려가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며칠 전, 동호회에서 볼펜도, 샤프도 아닌 몇 자루의 연필을 지인분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어떤 뜻으로 연필을 주셨을까. 철학적 안목으로 하얀 종이에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 엮어내라는 의미일까. 생의 행로를 한 글자 한 글자 까만 속심 닳아 없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쓰라는 의미일까.

선물로 받은 연필을 깎아본다. 초등학교 시절 책상에 앉아 칼로 연필을 깎는 일은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러 연필을 깎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연필을 깎는 것은 먹을가는 것처럼 들떴던 마음을 다스리며 한곳으로 모으는 훈련이다. 적당한 힘들고 칼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사르륵사르륵 육각형의 나무를 깎아내고, 뾰족하게 까만 심을 갈아내는 일은 마음에 굳게 박힌 아집을 갈아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 마음을 연하게 그려내는 연필은 수수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을 연필로 적는다면 선물 받은 네 자루 면 가능할까.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지우개로 지우고 마음 가는 대로 다시 써도 된다. 볼펜처럼 한번 써 놓으면 절대 지울 수 없는 고집이 아니다. 잘못 쓰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써도 절대로 화내는 일이 없다. 나에게만큼은 연필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포용과 배려의 상징인 것이다.

이향규 작가의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에서는 사물에 담긴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감정들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파킨슨병을 알리는 남편의 파란색 팔찌와 영국으로 처음 이주하고 힘들고 외로웠던 가족들에게 따뜻함을 나눠주웠던 교회와 펍,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 안의 공동묘지 등 일상에서 평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여러 사물과 장소를 통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느꼈던 삶의 온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토니 몸은 이제 누가 보더라도 떨린다. 움직임은 현저히 느려졌다. 지난가을부터 고무 팔찌를 오른 손목에 끼고 다닌다. 파란색과 하얀색으로 된 팔찌에는 파킨슨병 지원 단체 연락처와 함께 이런 문구가 있었다.

"저는 파킨슨병 환자입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세요" 사람이 있으면 이걸 보여 주면 되겠다며 좋아했다. 토니는 몇 달간 팔찌를 벗은 적이 없다. 샤워할 때는 물론이고 잘 때도 끼고 있다." p24

"펍은 진짜 동네 '허브' 같아. 중요한 일을 하네." 에이드리언은 펍이 동네 네트워크의 중심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계산대 아래 선반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보여 줬다. 코팅까지 해서 제법 잘 간수하고 있었던 오래된 신문 기사 제목은 이랬다.

"커뮤니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은 학교, 교회, 그리고 펍이다."

맞다 한국에서 이주해 온 우리를 반겨 준(굳이 반기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딘가 속할 수 있게 해 준) 곳도 딱 그 세 곳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나는 교회, 남편은 펍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p134

"여기에서는 누군가가 죽은 이를 생각하며 남긴 기억 조각을 만나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거리에 벤치를 만들고 공원에 나무를 심는다 마을 곳곳에 있는 나무 의자의 등받이에는 보통 '사랑하는 기억을 담아'로 시작해서 그 사람의 이름과 생몰 일을 적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이 많다. 나는 그런 벤치를 보면 천천히 걷게 된다. p189

일상의 익숙한 물건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느꼈던 소소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장애인, 돌봄 노동, 전쟁, 남북 분단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저자의 생각 또한 드러나 있었다. 지금까지 세계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사회 전체적인 부를 상승시키는 방식을 우리 사회에 집중해왔다. 그나마 사회 발전의 성과로 전반적인 복지수준도 함께 높아졌지만 "앞으로도 사회가 지속 가능한가?"라는 포용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저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희생과 실천들이 세상을 바꿔왔음을 말하며 서로를 보살피는 공동체의 따뜻한 손길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이 책을 읽게 될, 읽은 모든 이들이 앞으로도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될 사회의 변화에 장애, 나이, 경재 능력 등이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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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설계사
단요 지음 / 아작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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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 GPT의 출현으로 세계는 또 다른 시대를 맞이했다. 새 시대의 경이로움도 잠시, 지금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다가올 것인지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이해해야 할 시점도 같이 찾아온 것이다. AI가 만든 뛰어난 결과물에 감탄하며 실용적인 사용법에 주목하고 있는 오늘날, 이 신기술이 인류에게 끼칠 철학, 전략적 영향에 관한 논의는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를 대신해 생각과 판단을 해주는 인공지능을 당연하게 여기는 다음 세대의 등장이 예고된 가운데,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지금 당장 모든 인류가 위와 같은 질문과 마주하여 AI의 효용과 한계를 합의해야 한다. 아직 인간이 미래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과연 인간 이상의 스펙을 가진 AI 로봇이 등장한다면 인간들의 우위는 유지될 수 있는 걸까?

물에 잠긴 서울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의 소설<다이브>로 독자들에게 다가온 단요 작가는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장편 대상을 받은 <개의 설계사>로 돌아왔다. 지금의 기술력으로 보아 멀지 않은 미래에 인공지능 설계사 도하에게 톱스타 릴리와 그녀의 AI 로봇 개의 방문, 그 후 릴리의 전 애인 백해나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

"말하고 위로하고 웃는 기계들은 산업 발전의 부산물이에요. 패턴 처리와 시행착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을 위해, 진짜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전자뇌가 만들어진 거죠.

그런데 이런 산업용 인공지능에게는 자의식이랄 게 없어요.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도 않고요. 주어진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죠. 일관적인 감정처리에는, 의지와 편향을 갖추고 사안을 해석하는 능력에는 별도의 연산이 필요하거든요. 산업 현장에 덤으로 끼워 넣기엔 부담이 큰 기능이죠.

요컨대 여러분의 곁에 있는 기계 친구들은, 신형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성능으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p117

가법게 생각했던 단요 작가의 이번 작품은 전혀 가볍 않았다.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로봇이 가지는 고뇌와 AI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는 소설에 깊이를 더해 갔지만 한편으로는 무겁게 다가왔다. 사람이 아닌 기계라는 점에서 AI의 판단에는 인간 행동의 기초인 '도덕적 감정'이 반영될 수 없다. 설사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기계라는 점에서 도덕적인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결국 자신의 연산상에서 가장 유리한 결론을 도출하게 될 것이고, 이는 인간 기준에서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계들이 감정의 고저를 아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느끼도록 만들어지는 것부터가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강압이라고 봐요. 이용하는 거죠. 쾌락과 고통에 무감각하고 무엇도 욕망하지 않는 기계, 끔찍한 사건에도 평정을 유지하는 기계, 완벽히 객관적이고 정의로운 기계는 산업현장이나 경영전략실에 놓일 뿐이지 인간의 친구는 되지 못하니까요. 우리네 설계사의 업무란 결국 인간이 아닐 수 있는 존재에게 인간의 염증을 주입하는 것이고요." p214

다양한 형태의 인공지능은 현재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게다가 지금보다 더 고도로 발전된 인공지능 로봇들의 상용화 또한 머지않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인공지능을 설계하는 오늘날의 설계사에게 도덕 윤리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동안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를 통해 꾸준히 제기되어온 기계의 도덕성은, 지능이 있는 기계의 출현으로 이제 현실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단요 작가의 <개의 설계사>는 기계의 윤리적 고찰뿐만 아니라 개발자의 윤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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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ran8200 2023-07-1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정확하게 잘쓰신것 같아요~
담세대가 고민하고겪어야할 고민을 미리예견하고 대비해야할것을 정확히 짚어주신것 같아요~감동♡
 
지구 안에서 사는 즐거움
송세아 지음 / 꿈공장 플러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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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외로움이 깊어지는 시간이 있다. 이러한 외로움이 찾아올 땐 인생에 있어 사랑이 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라고 한다. 외로움을 받아들일 때 삶은 깊어진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불쑥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숱하게 만나는 삶의 풍경 또한 외롭지만 가끔은 마음 한켠으로 스쳐 지나가게도 해볼 일이다. 조금 외로운 것은 '충분히'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이기에 그렇께 느끼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구 안에서 사는 즐거움>에서 보여지는 저자의 모습은 그녀가 애독한 <보통의 존재>를 떠올렸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존재에서 느껴지는 일상의 희비와 그 안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 긍정적이며 따뜻한 소소한 이야기들. 가끔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쉬어가며, 나답게 살아감을 격려하고, 미련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닌 어쩌면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

"평범이라는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특별함이 숨어있는지 깨닫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래야 내 삶이 조금이나마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 잊지 말아야지. 평범함 속에 특별함이 있다. 사람도, 삶도, 그리고 글도. p11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받고 인정 받을 수 있는 것,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중요한 요소는 본질이나 자질일 것이다. 소위 명품이라는 물건도 그 이름값의 유명세를 가진 이유가 명품의 절대적 조건인 품질에 있어 최고이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쌓아온 최고의 퀄리티, 그래서 붙일 수 있는 이름이 명품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무슨 성분으로 혹은 어떤 자질로 이루어져 있나? 씨실날실이 교차된 삶의 직조에서 뜯어진 올처럼 거짓과 얼렁뚱땅한 가닥은 없었던가. 웃음에 불순물은 없었던가. 돌아보니 내 삶이 군데군데 기워져 있고 듬성듬성 걸끄러운 찌거기나 매듭들이 끼워진 듯 부끄러운 가닥들이 얽혀져 있음이 보인다. 매끈하고 윤기 나는 가닥을 채워 넣기 위해 얽힌 올을 한꺼번에 뜯어낼 것이 아니라 한 가닥씩 바꿔 나가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실오라기처럼 풀려 나왔다. 그리고 정형화된 삶이 아닌 하나밖에 없는 고유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결같은 사람이 되어야 해' 라는 말로 스스로를 어떤 모습 안에 가두지 말자고, 우린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중요한 건 변해가는 내 모습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해주는 것이라고." p64

길지 않은 우리 삶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위험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고가 있을 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모면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 주위에 한 분도 지하철 폭발사고 때 그 지하철을 타고 갔단다. 집에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온 것이 생각나 내렸더니 몇 정거장 뒤에 일어날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너무나 끔찍한 사고에 놀라 그분은 지금도 꿈속에서 헤매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물며 사고지점에 있었던 분과 사고 당한 분의 가족은 어떠하겠는가. 그런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중요한 건 마음인 것이다. 내 마음에, 내 관점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 p34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순간순간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남아있는 날들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쓰느냐가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송세아 작가의 글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며 언젠가 세상 저편에서 나를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기쁘게 달려갈 준비를 하여 의연하게 그날을 맞이해야겠다. 인생의 무게가 뒤쪽으로 쏠려 있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남아있는 시간들이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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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여행 - 모두가 낯설고 유일한 세계에서
양주안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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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나의 세계가 얼마나 좁은지 알려주었다. 책을 묶는 작업은 나의 시선이 얼마나 편협한지 일러주었다. 부끄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글을 쓴다. 나의 미숙함이 누군가의 용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하늘이 흐린 탓이다. 베란다에 서서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본다. 눈을 뿌리던 하늘이 햇살을 땅에 내려놓는다. 아직은 뜨거운 여름이다. 베란다에 서면 손끝과 귓불로 뜨거움이 차오른다. 그동안 여행에서 깨달은 것은 그리움이고 아름다움이다. 때론 고독과 정적을 알게 해준다. 그리움은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 조용히 깊게 바라보는 외로움일 것이다. 무엇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가까이 당겨 앉아 향기를 맡게 된다.

외롭다고 느낄 때 오는 가슴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만 같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에게 외롭게 해 볼 만도 하다. 뚝 떨어져 나와 정처 없이 외롭고 쓸쓸하여 울먹여도 볼 일이다. 혼자서의 여행이 날들이 낡고 바래서 서로에게 무디어질 때 다시 한번 삶을 되짚어 보게 된다.

빠른 것에 길들어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았던가. 길은 이어져 있었지만 계속 이어질까 하는 두려움에 뒤돌아 보질 않았던 것은 아닐까. 여행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펼쳐 놓고 시간의 기억으로 들어가 본다. 기억이 꿈틀거리며 흔들리고 천천히 다가온다. 사진 속 시간에 그때의 외로움은 어딘지 사라지고 그리움만 남아 있다.

감각적인 사진에 이끌려 [ARTRAVEL] 몇 권을 친구에게서 받은 적이 있다. 사진도 사진이었지만 따뜻하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글들이 한참이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양주안 작가의 '아주 사적인 여행'의 처음 접했을 때 그가 ARTRAVEL 소속 에디터로 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똑같은 삶은 세상에 없다. 나와 당신, 우리가 살아서 쓰는 모든 이야기는 위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유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서문 중에서

여행으로 삶을 변화시키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의 이야기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솔직함에 묻어있었다.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느꼈던 자신만의 이야기들. 시간에 저항하고 시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아름다운 고유의 기억들은 고달픈 현실에서 찾은 한순간의 행복을 영원히 묶어 놓고 싶은 바람같이 애잔하기까지 했다.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부여잡고 싶었다. 이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숱한 죽음 앞에서 이유도 모른 채 공허한 후회만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 그리움이 쌓여 삶을 짓누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비록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몇 개의 기억으로 가는 길이 사라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주 작은 실마리들을 남겨놓을 뿐이다. - p256

화려한 여행담은 우리의 삶 도처에 흘러넘친다. 우리는 너무 화려한 이야기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과거의 그리움과 추억이 있는 그런 흑백사진 같은 소박함을 그리워할지 모른다. 양주안 작가가 혼자 떠난 할머니와 잠시 살았던 노동리의 작은 언덕 집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 추억에 쓸쓸함이 베어드는 것은 세월에는 변화가 있고 죽음과 탄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순환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세월은 언제나 우리 인생의 끝을 생각하게 한다. 세월은 죽음이 기억의 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누군가 여행의 기억은 그저 바람같이, 한때 왔다가 사라져 가는 덧없는 시간의 허상이라 했던 게 생각난다. 하지만 순간의 신기루로 남을 여행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게 마련이다. 한때의 기억이 밀물처럼 다가와 삶의 흔적을 더듬게 한다. 우리는 낡은 사진의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그리운 그때를 그리워한다. 여행은 순간순간의 기억이다. 때론 우리를 그립게 하는 기억의 창고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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