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전쟁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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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정책으로 백두대간의 혈맥을 끊는다고 해서 '혈침'이라 불리는 쇠말뚝을 전국토에 걸쳐 곳곳에 박아 놓았다. 나 역시 등산 중 쇠말뚝이라 판단되는 바위에 박혀 있는 금속을 본 적이 있으니 전국토에 엄청난 수의 말뚝을 박은 것이 틀림없다. 그것뿐만 아니라 신물이라고 해서 신비한 함이 깃들어 있는 물건을 신성시하며 지켜왔는데 이것 또한 일제강점기에 상당수가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직까지 풍수 조건에 따른 집터와 묘 터 등을 따지며 집을 짓는 우리 민족을 보면 풍수는 민족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틀림없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람 몸의 혈관이 영양을 공급하는 것처럼, 땅에도 생기가 흐르는 길이 있으며, 산 사람은 이 생기에 접함으로써 복을 얻고 화를 피하며, 죽은 자는 땅속에서 직접 생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받아들이는 생기가 더 커 이것이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산사람의 집터와 함께 죽은 사람을 위한 묏자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신중하게 선택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이러한 전통 관념을 가진 한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빼어난 금수강산에서 뛰어난 지기를 받아 훌륭한 후손과 위인이 태어나 가문을 일으키고 나라를 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일제 쇠말뚝은 이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런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일제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인의 풍수사상을 역이용하여 패배의식을 심어주어 자신들의 지배를 영구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진명 작가의 <풍수전쟁>은 일본이 한국에서 걸어 놓은 풍수 저주에 관한 내용으로 이번 역시 엄청난 몰입감으로 단번에 읽어 내려갔다.

'나이파 이한필베. 저주의 예언이 이루어지도다.'

어느 날 대통령에게 전달된 의문의 메시지. 괴기스러운 의문의 메시지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해석하려 시도해 보지만 쉽게 해석되지 않자, 이 문제를 대통령실 행정관 김은하수에게 맡겨진다. 하지만 맡은 일을 반드시 해결할 거라 자부하던 그녀도 해결에 어려움을 겪자 자신의 괴짜 친구 이형연을 떠올렸다. 그는 인문학, 과학, 예술, 종교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미친 듯이 섭렵했고 그런 그가 더욱 관심을 가지며 빠져있었던 것은 풍수와 같은 신비학이었다. 은하수는 형연이라면 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며 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마주하든 않든 역사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형성하고 있어. 그러니 올바른 역사를 밝히는 건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거야."

그들이 마주친 것에는 일본이 한국에 건 저주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존망이 달린 인구 절벽 문제와 한국 역사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에서 만들어진 철령위의 위치를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던 한국의 역사학자들,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함께 나아가야만 한국과 일본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인물들.

김진명 작가 특유의 민족주의적 주제의식의 표현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동안 알지 못했고 오해하고 있었던 우리 역사의 진실을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전도하고 있는 김진명 작가는 이번 <풍수전쟁>에서도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역사를 관통하는 통찰력으로 왜곡되었던 역사의 한곳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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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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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국내 정세와 가난으로 낯선 타국의 독일행을 택했던 한국 여성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오빠들과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혹은 더 넓은 세상, 더 넓은 가치관을 보고자 고국을 떠나야 했던 그녀들은 어느덧 고희를 넘긴 모습으로 독일 교민 1세대를 이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을 극복하고 경제부흥에 성공한 독일은 의료, 요양 등의 국민복지시스템 분야의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을 추진 중이었고 외화 확보가 절실했다. 서로 원하는 바가 잘 맞아 1961년 두 나라는 경제 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광산, 간호 인력의 파견이 진행되었다. 그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었고, 당시 해외 파견된 우리나 근로자들의 전체 송금의 11%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파독 간호사의 이야기를 꺼낸 건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가 파독 간호사의 일생을 소재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장편소설도 백수린 작가 특유의 깔끔하고 감성적인 문체는 다른 작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으로 그런 그녀의 글을 다시 접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반가운 일이다.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이어나가야 했던 소녀"

이야기는 성인이 된 해미가 좋아했었던 동창 우재를 만나면서 유년 시절 독일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시작된다. 해미는 뜻밖의 사고로 한순간에 친언니를 읽게 되고 너무나 일찍 친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슬픔을 알아버린다. 언니의 죽음으로 부모님의 다툼이 이어지고 그로 인해 부모님의 별거로 이어져 해미와 동생 해나는 엄마를 따라 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 G시로 이주하게 된다. 동생 해나와는 달리 적응이 힘들었던 그녀는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지만 그런 해미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해미의 불안을 감싸 안아준 사람은 해미의 친이모였다. 그녀는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파독 간호조무사가 되어 조국을 떠나 정착한 살고 있었다. 지금은 독일 국가 의사 시험에 합격해 의사로서 지내고 있다. 이모 주의에는 함께 파독 간호사로 일했었던 선자 이모와 마리아 이모 그 밖의 많은 파독 간호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모의 도움으로 교포 2세인 레나와 한수를 만나 친구가 되고 힘들었던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을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한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p30

독일에서 생활이 적응되었을 때쯤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가 비밀스러운 부탁을 해오게 되는데 그 부탁이란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첫사랑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 몰래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가며 그녀가 독일로 떠나온 후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감추어져 있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갈수록 나는 이모가 말을 거는 상대가 첫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슬픈 연서였으니까. 그리고 그 행간에 잔잔히 흐르던 격정과 애달픔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p100

독일에서의 평화로운 생활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쳐, 어쩔 수 없이 해미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국에 돌아온 해미는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았다. 뇌종약의 악화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선자 이모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수에게 미안한 마음에 첫사랑을 찾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서는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에 독일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고 첫사랑을 찾기를 가슴에 묻게 된다.

"나도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예전엔 왕벚나무, 편백나무 같은 것들이 길거리에 많았대. 그런데 70, 80년대에 제주도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사업이 시작되면서 아름다운 남국의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 야자수들을 정책적으로 수입해 심었다더라. 그래서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야자수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대."

그런 야자수들이 살아남아 이젠 제주의 일부가 되었으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지?"



"저는 기본적으로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왔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언어를 통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의구심을 갖고 있는 편이고요. 소설 쓰기는 그런 저에게 마지막 보루, 희망 같은 것이에요. 세계는 엉망이고 소통은 대체로 불가능하나, 누군가와 맞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불씨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저는 소설을 쓰고 있어요. 언젠가 그 희망의 불씨마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절필을 하게 되겠지요? 아무튼 그러다 보니, 소설을 쓸 때는 제 안에 아주 희미하게만 존재하는 낙관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결국에는, 마음들이 맞닿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요." [백수린 작가 인터뷰 중에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들은 어쩌면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 그녀들이 낯선 독일 땅에서 겪었던 외로움이란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머나먼 타국에서 경제 디아스포라로 살아간 파독 간호사들과 당시 아들을 성공을 중시했었던 시대상과 과거 한국의 정서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일로 가슴 아파했던 사람의 슬픔들. 그런 가슴 아픈 슬픔과 마주하더라도 그 슬픔 안에서조차 희망을 마주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젖게 되는 것이야말로 백수린 작가의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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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염상섭 지음 / 지만지한국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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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는 작가의 원대한 계획 아래 씌어진 염상섭 작가의 대표작이자 한국 근대문학에서 가장 돋보이는 소설이다. 3부작을 계획하고 씌어진 이 소설은 <무화과>와 <백구>라는 작품과 연결되어 있는데, 세 소설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세대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단지 식민지 시대의 삶의 세목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인식에까지 나아간 것으로 그런 점에서 <삼대>는 한국 근대 문학의 기념비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다.





최근 지만지에서 출간한 완전한 의미의 <삼대>를 접하게 되었다. 전승주 교수는 초판본인 신문 연재본을 기본으로 한 책 3종과 개작된 단행본을 기본으로 한 책 3종을 비교해 총 5000여 곳의 서로 다른 점을 찾아내며 이전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오류들은 모두 바로잡은 완전 복원 원고가 전승주 교수의 정본이다. 그동안 이 작품을 읽어 온 독자들은 완전하지 않은 텍스트를 정본으로 알고 있었다. 100년 전의 경성과 그곳에 살았던 덕기와 병화와 경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김희경 박사의 방대한 곁 텍스트와 김종욱 교수의 해설을 더하고, 연재 시 게재되었던 당대 최고의 화가 안석주 화백의 삽화를 함께 수록한 가장 완전한 의미의 삼대가 탄생했다.




염상섭이 <삼대>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이다. 염상섭은 이 소설을 통해 1930년을 전후로 한 서울의 한 중산층 집안의 몰락 과정을 중심으로 당대 식민지 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 사회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섬세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이 소설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살펴보더라도, 주인공인 조덕기 일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김병화로 대표되는 이념적인 인물들, 그리고 매당집과 수원집으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인물들까지 당대 인물의 전형들이 두루 포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씨줄을 이루고 있다면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의 삼대에 걸친 가부장제적인 가족사가 날줄을 이루면서 한 폭의 이야기를 짜나 가고 있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돈이 최고라는 가치관은 100전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변하지 않은 씁쓸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바로 조의관의 돈이라는 점에 더욱 그러했다. 조덕기는 할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고는 있지만 그렇게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할아버지의 돈이었다. 조덕기는 조의관이 죽은 뒤 물려받은 열쇠 꾸러미로 가문과 재산 분배를 둘러싼 음모에 휩싸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독살의 협의로 검거된다. 협의를 벗고 풀려나온 덕기는 여러 문제를 원만히 처리하고 필순이 가족들을 돌볼 생각을 한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 대해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조덕기와 조상훈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인 수원집이나 최참봉, 지주사와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돈'에 대한 욕망과 생각이 이 작품 전체를 이끌고 있다.




염상섭은 <삼대>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문학 전체에 걸쳐 염상섭은 이 같은 돈의 사상을 문제 삼았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본질을 꿰뚤어보고 이를 진지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염상섭 문학은 근대적이다. 어쩌면 염상섭의 소설을 시작된 후배 작가의 소설들 예를 들어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선작 작가의 <영자의 전성시대>, 윤흥길 작가의 <아홉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은 낭만이 사라진 자본주의 사회의 심장부로 부각된 서울의 이면들이 회색빛으로 묘사된 소설들이다.

연재 기간 약 9개월, 연재 회차 215회의 이 소설을 지만지출판사에서는 1366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만들었다. 다소 비싼 가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정된 오류들과 많은 한자어, 사투리, 지금은 쓰지 않는 단어들과 설명이 필요한 인명, 지명, 사물 등의 전문가가 감수한 상세한 주석, 풍부한 이미지 자료는 1930년대의 생생한 경성 공간을 묘사한 가장 완벽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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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염상섭 지음 / 지만지한국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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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앞으로도 없을 가장 완전한 의미의 <삼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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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백수린 외 지음, 이승희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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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인생 권고문이 마음에 와닿는다. 사소하지 않는 사소한 것들에 관심과 눈길이 가고,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 행복해하고, 모든 평화로움에 감사하려는 것도 어쩌면 나이 탓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인간은 관계에 의해 얽히고설키어 살아가지만 본직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다. 인생은 홀러 태어나 마침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다. 그런 외로운 여정을 누군가와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사랑과 우정을 통해서 살아가는 의미와 존재 가치를 느낄지도 모른다. 사랑과 우정이야말로 한세상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붙잡고 가야 할 자산이다. "새에겐 둥지가 있고, 거미에겐 거미줄이 있듯 인간에게는 우정이 있다."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우정은 새에게 둥지만큼, 거미에게 거미줄만큼 인간의 삶을 지탱하도록 하는 터전이다. 이 터전을 가꾸기 위한 우정 또한 벗을 위한 배려와 헌신이다.

창비에서 출간한 <함께 걷는 소설>은 백수린, 이유리, 강석희, 김지연, 천선란, 김사과, 김혜진 작가의 우정을 테마로 한 단편소설로 다양한 모습의 우정을 그려 내고 있다.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의 수록된 <고요한 사건>은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친구들의 무리가 나뉘게 되고 부모마저 잘사는 동네의 아이들과 친구가 되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우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깝게 지내던 무호와 해지 역시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 같던 친구였지만 그들 또한 인생의 한 부분을 장식할 스치는 인연이었다.

"부모님은 새 학교로 등교하기 전에 몇 차례나 내게 이왕이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런 당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한 번도 전학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임을 나는 이내 알게 되었다. 전학생에게는 친구를 선택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부모님은 미처 알지 못했다. 전학생으로 처음 교탁 앞에 서는 순간, 내게 쏟아지던 여든 개의 눈동자. 가늠하고 평가하여 어느 부류로 분류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재빨리 나를 훑던 눈길은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이유리 작가의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에 수록된 <치즈 달과 비스코티>는 돌멩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학교 폭력을 벗어나기 위해 돌을 던지고, 열일곱에 처음 돌과 말을 하게 되고 지금까지 돌멩이 '스콧'을 유일한 절친으로 삼고 있는 그는 상식적으로 정상인이라 생각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을 무척이나 좋아해 닉네임을 치즈 달을 보호하는 쿠커에서 따왔다는 쿠커는 나에게 다가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광적인 관심을 보이는 나는 쿠커가 무척이나 불편해하지만 함께 한 여행에서 쿠커는 물에 빠지게 되고 그를 구하다 셔츠 주머니에 넣어둔 스콧을 잃어버려, 스콧을 찾기 위해 안절부절못해 하지만 주인공의 말을 믿고 있다며 스콧을 찾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쿠커의 말로 그의 존재를 조금은 인정하게 된다. 인간과의 원만한 관계가 힘든 그들은 사물과의 관계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가볍게 읽어 나갔지만 학교 폭력과 주위의 무관심으로 상처받고 있는 이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린 소설이라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날카로운 돌멩이였다. 그놈은 네 바늘을 꿰맸고, 나는 고의로 머리를 가격한 게 아니라는 걸 선생님과 어머니 앞에서 설명해야 했다. 물론 돌이 그러라고 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드디어 내가 남자다워졌다며 너무나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앞으로도 저런 놈들이 괴롭히면 똑같이 해 주라고 했다.

그놈이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로 학교에 돌아왔을 때 내가 죽도록 얻어맞았음을 말할 것도 없다. 그 사건 이후로 내 학교생활은 더욱 험난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날 새로운 취미가 생겼기에 견딜 수 있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돌멩이라는 돌멩이는 모두 주워 다 말을 걸었던 것이다. 저기요? 제 말이 들리나요? 제발 대답해 주세요. 저 들을 수 있어요. 제발."

김혜진 작가의 <축복을 비는 마음>은 일로 만나 나누게 된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입주 청소를 하고 있는 인선은 신입 경옥이 불편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냥 감내하고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는 유별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옥의 말이 싫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참고 있었던, 힘껏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던 말들이었던 것이다. 부당한 일에 자신이 먼저 나서서 말하며, 자신을 격려해 주는 그녀는 오래된 관계가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은 경옥이 건넨 말 때문이라는 것을 인선은 나중에 알았다. 지금껏 들어 본 적 없고, 듣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 말은 자신이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한 번쯤 그런 말을 해 주길 몹시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누구도 그런 다정한 말을 건넨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거였다."

우정이라는 테마로 백수린 작가를 비롯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의 소설집에서 수록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들의 모음집이라고 해야 할까? 놀라울 정도로 알차게 만들어져 있어, 위에 나열된 작가들의 소설을 막 읽기 시작한 사람이나 시간 여유가 넉넉지 않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좋은 단편모음집이니 기회가 되면 꼭 접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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