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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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국내 정세와 가난으로 낯선 타국의 독일행을 택했던 한국 여성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오빠들과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혹은 더 넓은 세상, 더 넓은 가치관을 보고자 고국을 떠나야 했던 그녀들은 어느덧 고희를 넘긴 모습으로 독일 교민 1세대를 이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을 극복하고 경제부흥에 성공한 독일은 의료, 요양 등의 국민복지시스템 분야의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을 추진 중이었고 외화 확보가 절실했다. 서로 원하는 바가 잘 맞아 1961년 두 나라는 경제 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광산, 간호 인력의 파견이 진행되었다. 그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었고, 당시 해외 파견된 우리나 근로자들의 전체 송금의 11%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파독 간호사의 이야기를 꺼낸 건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가 파독 간호사의 일생을 소재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장편소설도 백수린 작가 특유의 깔끔하고 감성적인 문체는 다른 작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으로 그런 그녀의 글을 다시 접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반가운 일이다.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이어나가야 했던 소녀"

이야기는 성인이 된 해미가 좋아했었던 동창 우재를 만나면서 유년 시절 독일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시작된다. 해미는 뜻밖의 사고로 한순간에 친언니를 읽게 되고 너무나 일찍 친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슬픔을 알아버린다. 언니의 죽음으로 부모님의 다툼이 이어지고 그로 인해 부모님의 별거로 이어져 해미와 동생 해나는 엄마를 따라 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 G시로 이주하게 된다. 동생 해나와는 달리 적응이 힘들었던 그녀는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지만 그런 해미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해미의 불안을 감싸 안아준 사람은 해미의 친이모였다. 그녀는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파독 간호조무사가 되어 조국을 떠나 정착한 살고 있었다. 지금은 독일 국가 의사 시험에 합격해 의사로서 지내고 있다. 이모 주의에는 함께 파독 간호사로 일했었던 선자 이모와 마리아 이모 그 밖의 많은 파독 간호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모의 도움으로 교포 2세인 레나와 한수를 만나 친구가 되고 힘들었던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을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한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p30

독일에서 생활이 적응되었을 때쯤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가 비밀스러운 부탁을 해오게 되는데 그 부탁이란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첫사랑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 몰래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가며 그녀가 독일로 떠나온 후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감추어져 있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갈수록 나는 이모가 말을 거는 상대가 첫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슬픈 연서였으니까. 그리고 그 행간에 잔잔히 흐르던 격정과 애달픔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p100

독일에서의 평화로운 생활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쳐, 어쩔 수 없이 해미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국에 돌아온 해미는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았다. 뇌종약의 악화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선자 이모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수에게 미안한 마음에 첫사랑을 찾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서는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에 독일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고 첫사랑을 찾기를 가슴에 묻게 된다.

"나도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예전엔 왕벚나무, 편백나무 같은 것들이 길거리에 많았대. 그런데 70, 80년대에 제주도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사업이 시작되면서 아름다운 남국의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 야자수들을 정책적으로 수입해 심었다더라. 그래서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야자수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대."

그런 야자수들이 살아남아 이젠 제주의 일부가 되었으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지?"



"저는 기본적으로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왔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언어를 통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의구심을 갖고 있는 편이고요. 소설 쓰기는 그런 저에게 마지막 보루, 희망 같은 것이에요. 세계는 엉망이고 소통은 대체로 불가능하나, 누군가와 맞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불씨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저는 소설을 쓰고 있어요. 언젠가 그 희망의 불씨마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절필을 하게 되겠지요? 아무튼 그러다 보니, 소설을 쓸 때는 제 안에 아주 희미하게만 존재하는 낙관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결국에는, 마음들이 맞닿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요." [백수린 작가 인터뷰 중에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들은 어쩌면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 그녀들이 낯선 독일 땅에서 겪었던 외로움이란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머나먼 타국에서 경제 디아스포라로 살아간 파독 간호사들과 당시 아들을 성공을 중시했었던 시대상과 과거 한국의 정서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일로 가슴 아파했던 사람의 슬픔들. 그런 가슴 아픈 슬픔과 마주하더라도 그 슬픔 안에서조차 희망을 마주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젖게 되는 것이야말로 백수린 작가의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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