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강의 1 아도르노 강의록 2
테오도르 W. 아도르노 지음, 문병호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쪽에 ˝이해관계 없는 편안함˝이라는 말이 나온다. 미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표현인 ˝무관심한 만족˝을 이런 식으로 번역해 놓은 거다. 진짜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보는 게 이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8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국어사전에 실린 본래 의미를 살린다면서, 일상적 쓰임을 무시해버리는 번역가들이 왕왕 있다. 나는 일상적 쓰임이 우선시되어야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아폴로기아는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정당한) 변론으로 옮겨야한다고 생각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erd 2022-05-09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도 지당한 지적!!!!!!!!
변명이 아닌 변론....!!!!!!!!!!!!!!!!!!!!!!!!!!!
 
현기증.감정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 결론부터 말하면 번역본은 문제가 많다. 역자가 번역을 하면서 원문에 없는 말을 보태는 바람에 문장이 장황해졌고, 오역이나 부정확한 번역도 자주 보인다 - 번역뿐만 아니라 수록된 사진의 화질도 상당히 나쁘다. 오역이 어느 정도인가 확인하기 위해 내가 문단을 다시 번역해보았다. 다음은 카프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에서 고른 문단들이다. 각각 제발트의 원문, 배수아의 번역, 그리고 내가 번역이다.

 

"In Wien mietet Dr. K. sich im Hotel Matschakerhof ein, aus Sympathie fuer Grillparzer, der dort immer zu Mittag gegessen hat. Eine pietaetvolle Geste, die sich leider als unwirksam erweist. Die meiste Zeit ueber ist es Dr. K. aeusserst unwohl. Er leidet an Bedruecktheit und Sehstoerungen. Obwohl er absagt, wo er nur kann, ist er, wie es ihm scheint, fortwaehrend mit schrecklich vielen Leuten beisammen. Er sitzt dann als Gespenst mit am Tisch, hat arge Platzangst und glaubt sich von jedem Blick, der ihn streift, durchschaut. Neben ihm, auf Tuchfuehlung gewissermassen, Grillparzer, nahezu restlos vergreist. Er macht ungute Faxen und legt ihm einmal sogar die Hand aufs Knie. In der Nacht hat Dr. K. Zustaende. Die Berliner Geschichte laesst ihn nicht aus. Er waelzt sich nutzlos im Bett herum, macht sich kalte Umschlaege auf den Kopf, steht lang am Fenster, schaut auf die Gasse hinab und wuenscht sich, einige Stockwerke tiefer in der Erde zu liegen. Es sei unmoeglich, notiert er tags darauf, das einzig moegliche Leben zu fuehren, mit einer Frau beisammen zu leben, jeder frei, jeder fuer sich, weder aeußerlich noch wirklich verheiratet, nur beisammen zu sein, unmoeglich, den einzig moeglichen Schritt ueber die Maennerfreundschaft hinaus zu tun, denn dort, unmittelbar jenseits der gesetzten Grenze, richte sich schon der Fuss auf, der ihn zertreten werde." (W. G. Sebald, Schwindel. Gefuehle, 164)

 

"빈에서 K 박사는 마차커호프 호텔에 방을 하나 빌려 묵는다.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는 그릴파르처가 바로 호텔에서 매일 점심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경애의 마음이 넘치는 행위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K 박사는 극심하게 불쾌한 기분으로 보낸다. 그는 우울과 시력장애로 고생한다. 최대한 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느낌으로는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끔찍하게 많은 사람과 어울려서 시간을 보낸다. 그럴 때면 그는 유령처럼 끼어 앉아서 소름끼치는 폐소공포에 시달리고, 죄다 자신을 훑어보는 바람에 내면이 속속들이 파헤쳐진다고 믿는다. 곁에는 그릴파르처가 거의 옷자락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았는데, 놀랄 만큼 노쇠한 모습이다. 그는 실없는 농담을 하고 한번은 K 박사의 무릎에 손을 얹기까지 한다. 상태로 밤이 되자 K 박사는 참을 수가 없다. 베를린 소식은 그를 결코 편히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침대에서 괜히 이리저리 뒤척이고, 머리를 냉찜질하다, 한참 동안 창가에 서서 골목길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이 층만 아래쪽에 있기를, 지금 흙속에 누워 있기를 소망한다. 일은 불가능하다, 라고 그는 며칠 일기에 쓴다. 한번뿐인 유일한 삶을 여인과 함께 살면서 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각자가 자유로이, 각자가 독립적으로, 공식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결혼하지 않고, 오직 함께하기만 하는 일이, 남자들의 우정에서 발자국이라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왜냐하면 명확히 정해진 경계 너머 자리에서 거대한 발이 지키고 있다가 그를 짓밟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쓴다." (배수아 옮김, 현기증. 감정들, 136)

 

"빈에서 K 박사는 마챠커호프 호텔에 투숙하는데, 그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던 그릴파르처에게 친근감을 느껴서였다. 존경심의 표시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무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대부분의 시간을 K 박사는 극히 불편하게 보낸다. 그는 우울함과 시력장애에 시달린다. 비록 그가 가능한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느끼기엔 계속해서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면 그는 테이블에 유령처럼 앉아 심한 폐소(閉所)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를 힐끗 쳐다보는 모든 시선이 그의 속내를 꿰뚫어본다고 믿는다. 그의 옆에 옷의 감촉마저 느껴진다 싶을 정도로 붙어 앉은 그릴파르처는 거의 완전히 늙어 있다. 그는 불쾌한 헛소리를 늘어놓고 심지어 번은 K 박사의 무릎에 손을 얹기까지 한다. 밤에 K 박사는 흥분에 휩싸인다. 베를린 건은 그를 편히 놔두지 않는다. 그는 침대에서 헛되이 뒤척이다가, 머리에 물수건을 대다가, 창가에 오래 서서 골목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아래 속에 누워 있기를 바란다. 다음날 그는 적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여자와 같이 유일하게 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각자 자유롭고, 각자 혼자서, 겉으로든 진심으로든 결혼은 하지 않고, 불가능하다, 남자들끼리의 우정을 넘어서 유일하게 가능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왜냐하면 정해진 경계 바로 너머에 그를 짓밟으려는 발이 이미 서 있기 때문이다."

 

"Uebrigens sitzt bei Tisch zur Rechten Dr. K.s ein alter General, der sich zwar die meiste Zeit ausschweigt, der aber doch hin und wieder abgruendig kluge Bemerkungen macht. So sagt er einmal, unvermittelt aufblickend von dem Buch, das er stets aufgeschlagen neben sich liegen hat, dass sich, wenn er es recht ueberlege, zwischen der Logik des Sandkastens und der Logik des Heeresberichts, die ihm beide vertraut seien wie kaum etwas sonst, ein weites Feld der undurchsichtigsten Gegebenheiten erstrecke. Kleinigkeiten, die sich unserer Wahrnehmung entziehen, entscheiden alles! Bei den groessten Schlachten der Weltgeschichte sei das genauso gewesen. Kleinigkeiten, die aber so schwer wiegen wie die 50000 toten Soldaten und Pferde von Waterloo. Es sei eben letzten Endes alles eine Frage des spezifischen Gewichts. Stendhal habe davon einen genaueren Begriff gehabt als jeder Generalstab, und er gehe nun auf seine alten Tage bei ihm in die Lehre, um nicht ganz ohne Einsicht sterben zu muessen. Diese im Grunde irrwitzige Vorstellung, dass man mit einer Drehung des Steuers, mit dem Willen, den Lauf der Dinge beeinflussen koenne, waehrend diese doch bestimmt seien von den vielfaeltigsten Beziehungen untereinander." (W. G. Sebald, 178-179)

 

"K 박사의 오른편에는 늙은 장군 명이 앉아 있는데, 대개는 말이 없는 편이지만 간혹 입을 열어 폐부를 찌르는 말을 한마디씩 던지는 사람이다. 그런 장군이 한번은, 밥을 먹을 때마다 식탁의 한쪽에 항상 펼쳐두는 책에서 눈을 떼고 불쑥 이런 말을 한다. 나에게 가장 친숙하다고 있는 세상의 사물 가지는 군사작전용 모형을 움직이는 모래상자와 군대의 전황 보고인데, 적어도 나의 생각이 맞는다면 가지 사물의 논리 사이에는 조건을 파악할 없는 드넓은 벌판이 가로놓여 있는 셈이다. 우리의 감각으로는 잡히지 않는 사소한 요인들이 항상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세계사를 뒤바꾼 주요 전투들이 바로 그런 요인들의 작용을 받았던 것이다. 사소한, 하지만 워털루에서 전사한 오만 군사와 말들의 생명과 비견될 정도로 비중 있는 요인들.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사소하면서도 특별한 비중의 문제, 그것이다. 그런데 점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사람은 어떤 유명한 장군도 아닌 바로 스탕달이었으며, 그러므로 이제 말년에 이른 나는 아무런 성찰이 없는 채로 죽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스탕달을 공부하고 있다. 인간이 핸들을 한번 돌리는 것만으로, 그런 의지만으로, 수많은 변수와 연관된 사물의 행로에 영향을 미칠 있으리라는 상상은 사실 참으로 허황된 것이다." (배수아, 148-149)

 

"외에도 식탁에는 K 박사의 오른편에 늙은 장군이 앉아 있는데, 그는 보통 때는 말이 없지만, 가끔씩 굉장히 지적인 발언을 하곤 한다. 그래서 번은 그가 항상 펼쳐서 옆에 놓던 책에서 갑자기 눈을 떼고 K 박사를 보며 말한다. 그가 제대로 생각한다면, 그가 다른 무엇보다도 정통한 가지 논리, 군사작전용 모래상자의 논리와 전투상황보고의 논리 사이에는 극히 불투명한 사실들의 드넓은 영역이 펼쳐져 있다고. 사소한 것들, 우리가 감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이 모든 결정한다! 그건 세계사에 나오는 거대한 전투들도 마찬가지라고. 사소한 것들, 그러나 그것들은 워털루에서 죽은 5 병사들과 말들의 무게와 맞먹을 만큼 무겁다고. 모든 결국 하나, 비중(比重) 문제라고. 스탕달은 문제를 어떤 참모부보다 정확히 파악했었고, 그래서 그는 통찰을 완전히 결여한 채로 죽지 않으려고 지금 늙어서도 스탕달에게서 배우고 있다고. 조타기를 돌림으로써, 사람의 의지로 사건들의 흐름에 영향을 있을 거란 생각은 실은 웃기는 발상인데, 왜냐하면 사건들은 무수히 다양한 관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1. 직접 번역을 하면서 재미있는 사실 가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번째 인용 문단에는 K 박사가 평소에 그릴파르처에게 동류 의식 같은 있어서 숙소를 호텔 마챠커호프로 정하지만, 막상 그릴파르처가 K 박사 옆에 앉아 친근감 이상의 관심을 보이자 불쾌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종의 양가감정의 표현인데, 앞뒤 설명이 없어서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번역을 하면서 그릴파르처(Grillparzer) 사전에서 찾아보고 해석의 단서를 얻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사망한 해는 1872년이고, 체코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출생한 해는 1883이다. 그러니까 카프카가 자기 옆에 앉아 수작을 건다고 느낀 그릴파르처는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카프카의 잠재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던 것이다. 유혹의 환상은 억압된 성적 욕망의 투사(投射) 있는데, 루드비히 2세가 그렇듯이 그릴파르처도 동성애를 암시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렇다고 K 박사를 딱히 동성애자라고 보긴 어려운데, 요양 도중 알게 소녀와 비밀스러운 교감을 나누기도 하고, 더욱이 베를린에는 약혼녀 펠리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발트는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통해 자기 동일성뿐만 아니라 성정체성에 있어서도 곳에 정착 못하고 한없이 떠도는 카프카를 교묘하고 낯선 수법으로 그리고 있다.

 

2. 번째 인용 문단에는 퇴역 장군의 장광설이 등장하는데, 철학 비슷하게 들리기는 해도, 수수께끼 같기는 소설 다른 노인들의 경우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물 역시 해석의 열쇠 하나를 제공하는데, 바로 '비중(das spezifische Gewicht)'이라는 단어였다. 여기서 '비중'이란 물리학 용어로서 '어떤 물질의 질량과 물질과 같은 부피의 표준물질의 질량과의 ()' 뜻한다. 그러니까 소설 늙은 장군은 현실의 예측 불가능한 불합리한 면들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선 '복잡계 이론' 같은 필요하다고 믿고 스탕달을 탐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탕달의 무슨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독자의 상상력이 발동한다. 나는 스탕달에 관한 어느 글에서 가지 단서를 발견했다. 하나는 그가 일찍이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진학하려다 말았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전적 기록인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수학에 관한 그의 생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 <현기증. 감정들> 번째 이야기 <,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말미에는 숫자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벨은 예전부터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긴 했지만 이제는 더욱더 자주 자신의 나이를 일종의 암호 형태로 계산해보곤 했는데, 계산 결과는 판독할 없는, 불길한 추상성을 지니고 마치 죽음의 전령인 나타난다." 제발트가 재구성한 스탕달의 짧은 생애는 그래서 암호 같은 수학 공식 하나를, 인간의 운명을 수로 환산해 읽어보려는 스탕달의 무모한 시도를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3. 끝으로 번역의 어려움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제발트의 주요 작품 3편을 영어로 옮긴 마이클 헐스의 글을 보면 막스(제발트의 영어 이름) 함께 작업이 순탄치 않았음을 있다 (Michael Hulse: "Englishing Max", in: Saturn's Moons. W. G. Sebald - A Handbook, 2011, pp. 195-208). 1993 3 헐스는 하빌 출판사의 편집자로부터 <이민자들> 번역을 제의 받는다. 작품을 읽고 크게 감명 받은 헐스는 제의를 수락한다. 번역을 하며 역자는 이런저런 의문과 의견을 담은 편지를 작가에게 보내고, 작가는 소상하게 답장을 보내는데, 제발트 입장에선 자신이 영어권에 작가로서는 처음 소개되는 계기였으므로 단순한 관심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민자들> 출판은 성공적이었고, 헐스는 바로 <토성의 고리> 번역에 착수하는데, 이때부터 역자와 작가의 관계는 헐스가 번역한 초벌 원고를 제발트가 고쳐서 합치는 동업의 관계로 발전한다. 과정에서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와 수정 원고를 보면, 둘의 문학관이나 문체가 많이 달라, 그리 호흡이 맞는 파트너 관계는 아니었던 같다 (헐스는 번역가일 뿐만 아니라 자신 시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둘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잃지 않고 <토성의 고리> 번역을 무사히 마치는데, 문제는 번째 번역에서 발생한다. 1999 봄에 헐스는 제발트가 어느 공식 석상에서 <현기증. 감정들> 자신의 '교정(correct)' 없이 나왔다고 불평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헐스와 제발트 사이에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전화통화가 오가고, 역자는 역자대로 '더는 제발트를 번역하지 않겠다' 선언하고, 저자는 저자대로 '새로운 번역자를 앤티아 (Anthea Bell) 정했다' 통지한다. 헐스가 제발트로부터 마지막 편지를 받은 2000 2월이었고,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관련 블로그: https://sebald.wordpress.com/category/michael-hulse/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05-11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뒷이야기도 흥미로워요.이것대로 역사겠죠?

asylum 2015-05-11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위에 잠깐 소개한 <Saturns Moons - A Handbook>에는 제발트에 관한 흥미로운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답니다. 제발트는 독문학 교수로서도 개성이 강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9-04-25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에 무척 힘든 소설이었다. 밀도가 지나치게 높았고 인물들이 수없이 새로 등장했다. 다 읽고나선 뭔가 미진했다. 다양한 일화들을 하나로 꿰는 뭔가가 부족해 보였다. 백과사전의 항목들이 내용상 서로 이어지지 않고 단순히 나열되어 있듯이 <토성의 고리>에 나오는 인물들과 에피소드들도 몇몇 공통 테마들(누에, 몰락, 지배) 외에는 서로 아무 관련이 없어 보였다. 처음엔 작가가 자료에 파묻힌 나머지 전체를 아우르는 구성에 실패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한데 나중에 그러한 구성방식이 바로 "토성의 띠" 형상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본 TV 다큐멘터리가 계기가 되었다. 다큐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보는 토성의 아름다운 띠는 한때 토성의 위성들 중 하나였던 것이 소행성이나 혜성 같은 것과 충돌하는 바람에 토성 가까이로 밀려들어가 파괴되고 남은 "잔해들"이라는 거였다. 다시 말해 위성의 파편들이 토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거라고 했다. 소설 도입부의 에피그램에 나오는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의 인용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가설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잔해의 띠"라는 메타포이므로.

그러고 보면 소설의 구성방식이 왜 그런 "단편들의 나열"인지 이해될 법하다. 제발트가 의도적으로 일화들을 떼어놓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를 쓸 당시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말년에 <부바르와 페퀴셰>를 쓰면서 "공과 같은 작품"이라는 자신의 소설관을 폐기한다. 허구로서의 소설은 사라지고 "어리석음의 백과사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제발트는 그 뒤를 잇는다.

<토성의 고리>는 가히 "몰락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하다. 지반의 자연 침식작용으로 몇 세기에 걸쳐 서서히 몰락한 항구도시 이야기는 자연과 문명이 동시에 몰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도 몰락한다. 폴란드 귀족가문이 몰락하고 그 자손 조셉 콘래드는 선장이 되어 대양을 떠돈다. 안팎으로 전쟁을 겪으며 청나라 황실이 몰락한다. 권력에 눈이 먼 서태후는 자신이 앉힌 황제 광서제마저 서서히 죽인다. 프랑스 혁명의 참수형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간 샤토브리앙 자작은 후일 몰락의 역사를 쓴다. "혁명, 공포정치, 망명, 나뽈레옹의 상승과 몰락, 왕정복고, 그리고 시민들의 왕국"(300).

다시 한번 역자에게 감사한다. 한데 읽기 힘든 문장들이 종종 있었고 명백한 오류나 오역이 다소 있었다. 몇 가지 적어보면 "테네리페 섬"은 "북아메리카"(141)가 아니라 북아프리카에 있는 섬이고, 태평천국의 난이 자기파괴로 끝난 날짜는 "6월 19일"(168)이 아니라 7월 19일이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정정되길 바래본다.

제발트 관련 문헌을 찾아보다 한 독자가 <토성의 고리>에 나오는 지명들로 네트워크를 구축한 영문 웹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쯤되면 "제발트 증후군"이라고 할 만하다.

http://barbarahui.net/litma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0. 번역자의 공들인 번역 덕분으로 제발트를 처음 경험하게 된 것에 대해 역자에게 감사드린다. 이어 <토성의 고리>도 읽을 예정인데, 같은 역자가 번역했다기에 믿음이 간다. 한데 <이민자들> 말미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읽고, 역자의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리뷰"라는 걸 쓰게 되었다.

 

1. 우선 "이민자들"이라고 번역한 제목 "Die Ausgewanderten"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다소 의외였다. 보통 독어로 "이민자"들을 지칭할 때는 "Emigranten"이란 용어를 쓰는 걸로 알고 있다. 저자가 라틴어 "emigrans"에서 파생된 단어를 쓰지 않고, 독일어 "auswandern(이주하다)"에서 파생된 단어를, 그것도 통용되는 "Auswanderer"라는 단어가 아니라 "Ausgewanderten"이란 인위적인 표현을 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함축되어 있는 걸로 보인다. 첫째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타의에 의해 고향을 떠났다"(피동형)는 걸 강조하고, 둘째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 않았다"(과거완료형)는 걸 암시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민자"보단 "실향민"이 원래 의미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제목을 "실향민들"로 하면 어색하게 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에게 이런 맥락을 설명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2. 역자가 "상실과 애수, 이는 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시선이자 감정이다"(305)라고 했는데,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작품의 근본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는 거리가 멀다. 고향에만 오면 펑펑 우는 피니 이모 정도가 향수병을 앓고 있을 뿐이고, 다른 남자 인물들의 경우, 고향은 그립기는 커녕 기억에서 영원이 지워버리고 싶은 "부정의 대상"에 가깝다. 쎌윈 박사에게 고향은 "숨겨온 출신" 같은 것이었고, 베라이터에겐 "증오의 대상"이었고, 아델바르트에겐 기억상실 비슷한 "부재의 공간"이었고, 페르버에겐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트라우마"였다. 하여 이들을 자살 혹은 자살에 가까운 죽음으로 내몬 것은 자신의 의식 깊숙히 뿌리내려 전 생애를 장악했던 "고향"이라는 불행을 그 뿌리째 파괴하려는 충동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라이터가 철도에 편집증을 보이고 철로를 죽음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떠남과 벗어남의 메타포).

 

3. 과거 유럽 상류층의 휴양지 도빌의 노르망디 호텔이 이제는 일본 관광객들의 파친코장으로 전락한 것이나, 한때 맨체스터 기업가들이 드다들던 호화로운 미들랜드 호텔이 돌이킬 수 없이 퇴락하여 이제 홀리데이인 호텔로 바뀔 거라는 화자의 서술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투자의 광풍이 휩쓴 후에 남은 폐허의 "무상성"이다. 이러한 황폐화의 원인을 전지구적이고 다국적인 자본주의가 초래한 "획일화"(306)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창작과비평"의 시각이다.  어차피 과거 도빌과 맨체스터의 번영 자체가 상업화의 산물인 것이다. 작가는 문명 / 사회 비판을 그렇게 유럽 산업화 이후로 국한시키지 않고, 훨씬 더 거시적으로, 인류 문명 전체를 덧없이 "유한한 것"으로 보고, 폐허가 되어 인간이 떠난 공간을, 그곳이 다시 전적으로 자연과 시간에게 지배되는 광경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문명을 시종일관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컨대 화자가 맨체스터 당국이 "그 지역 전체를 철거하여 거대한 평지로 만들어", 마지막 남은 건물들마저 "유리창과 문들이 모두 부숴지고 파괴되어 바람이 거침없이"(197) 드나드는 거대한 황무지를  "엘리지움"(198), 즉 "영혼들이 사는 낙원"이라고 칭하는 데에서 모든 진보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을 부정하는 작가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4. 그렇다고 작품이 허무주의를 말하려는 건  물론 아닐 것이다. 작품 속에서 이상향은 산업화 이전의 인간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각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일종의 문학적 장치로 보이는) 나비채를 든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 불모의 땅 예루살렘을 떠나 "맑은 샘물과 풍요로운 식물들로 축복받은 땅"(181)에서 잠든 코즈모의 품 안에 들어가 "편안한 모습으로"(182) 자리잡은 메추라기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다분히 "자연과 역사"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Allegorie)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