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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에 무척 힘든 소설이었다. 밀도가 지나치게 높았고 인물들이 수없이 새로 등장했다. 다 읽고나선 뭔가 미진했다. 다양한 일화들을 하나로 꿰는 뭔가가 부족해 보였다. 백과사전의 항목들이 내용상 서로 이어지지 않고 단순히 나열되어 있듯이 <토성의 고리>에 나오는 인물들과 에피소드들도 몇몇 공통 테마들(누에, 몰락, 지배) 외에는 서로 아무 관련이 없어 보였다. 처음엔 작가가 자료에 파묻힌 나머지 전체를 아우르는 구성에 실패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한데 나중에 그러한 구성방식이 바로 "토성의 띠" 형상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본 TV 다큐멘터리가 계기가 되었다. 다큐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보는 토성의 아름다운 띠는 한때 토성의 위성들 중 하나였던 것이 소행성이나 혜성 같은 것과 충돌하는 바람에 토성 가까이로 밀려들어가 파괴되고 남은 "잔해들"이라는 거였다. 다시 말해 위성의 파편들이 토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거라고 했다. 소설 도입부의 에피그램에 나오는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의 인용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가설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잔해의 띠"라는 메타포이므로.
그러고 보면 소설의 구성방식이 왜 그런 "단편들의 나열"인지 이해될 법하다. 제발트가 의도적으로 일화들을 떼어놓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를 쓸 당시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말년에 <부바르와 페퀴셰>를 쓰면서 "공과 같은 작품"이라는 자신의 소설관을 폐기한다. 허구로서의 소설은 사라지고 "어리석음의 백과사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제발트는 그 뒤를 잇는다.
<토성의 고리>는 가히 "몰락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하다. 지반의 자연 침식작용으로 몇 세기에 걸쳐 서서히 몰락한 항구도시 이야기는 자연과 문명이 동시에 몰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도 몰락한다. 폴란드 귀족가문이 몰락하고 그 자손 조셉 콘래드는 선장이 되어 대양을 떠돈다. 안팎으로 전쟁을 겪으며 청나라 황실이 몰락한다. 권력에 눈이 먼 서태후는 자신이 앉힌 황제 광서제마저 서서히 죽인다. 프랑스 혁명의 참수형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간 샤토브리앙 자작은 후일 몰락의 역사를 쓴다. "혁명, 공포정치, 망명, 나뽈레옹의 상승과 몰락, 왕정복고, 그리고 시민들의 왕국"(300).
다시 한번 역자에게 감사한다. 한데 읽기 힘든 문장들이 종종 있었고 명백한 오류나 오역이 다소 있었다. 몇 가지 적어보면 "테네리페 섬"은 "북아메리카"(141)가 아니라 북아프리카에 있는 섬이고, 태평천국의 난이 자기파괴로 끝난 날짜는 "6월 19일"(168)이 아니라 7월 19일이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정정되길 바래본다.
제발트 관련 문헌을 찾아보다 한 독자가 <토성의 고리>에 나오는 지명들로 네트워크를 구축한 영문 웹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쯤되면 "제발트 증후군"이라고 할 만하다.
http://barbarahui.net/lit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