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0. 번역자의 공들인 번역 덕분으로 제발트를 처음 경험하게 된 것에 대해 역자에게 감사드린다. 이어 <토성의 고리>도 읽을 예정인데, 같은 역자가 번역했다기에 믿음이 간다. 한데 <이민자들> 말미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읽고, 역자의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리뷰"라는 걸 쓰게 되었다.

 

1. 우선 "이민자들"이라고 번역한 제목 "Die Ausgewanderten"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다소 의외였다. 보통 독어로 "이민자"들을 지칭할 때는 "Emigranten"이란 용어를 쓰는 걸로 알고 있다. 저자가 라틴어 "emigrans"에서 파생된 단어를 쓰지 않고, 독일어 "auswandern(이주하다)"에서 파생된 단어를, 그것도 통용되는 "Auswanderer"라는 단어가 아니라 "Ausgewanderten"이란 인위적인 표현을 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함축되어 있는 걸로 보인다. 첫째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타의에 의해 고향을 떠났다"(피동형)는 걸 강조하고, 둘째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 않았다"(과거완료형)는 걸 암시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민자"보단 "실향민"이 원래 의미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제목을 "실향민들"로 하면 어색하게 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에게 이런 맥락을 설명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2. 역자가 "상실과 애수, 이는 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시선이자 감정이다"(305)라고 했는데,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작품의 근본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는 거리가 멀다. 고향에만 오면 펑펑 우는 피니 이모 정도가 향수병을 앓고 있을 뿐이고, 다른 남자 인물들의 경우, 고향은 그립기는 커녕 기억에서 영원이 지워버리고 싶은 "부정의 대상"에 가깝다. 쎌윈 박사에게 고향은 "숨겨온 출신" 같은 것이었고, 베라이터에겐 "증오의 대상"이었고, 아델바르트에겐 기억상실 비슷한 "부재의 공간"이었고, 페르버에겐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트라우마"였다. 하여 이들을 자살 혹은 자살에 가까운 죽음으로 내몬 것은 자신의 의식 깊숙히 뿌리내려 전 생애를 장악했던 "고향"이라는 불행을 그 뿌리째 파괴하려는 충동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라이터가 철도에 편집증을 보이고 철로를 죽음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떠남과 벗어남의 메타포).

 

3. 과거 유럽 상류층의 휴양지 도빌의 노르망디 호텔이 이제는 일본 관광객들의 파친코장으로 전락한 것이나, 한때 맨체스터 기업가들이 드다들던 호화로운 미들랜드 호텔이 돌이킬 수 없이 퇴락하여 이제 홀리데이인 호텔로 바뀔 거라는 화자의 서술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투자의 광풍이 휩쓴 후에 남은 폐허의 "무상성"이다. 이러한 황폐화의 원인을 전지구적이고 다국적인 자본주의가 초래한 "획일화"(306)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창작과비평"의 시각이다.  어차피 과거 도빌과 맨체스터의 번영 자체가 상업화의 산물인 것이다. 작가는 문명 / 사회 비판을 그렇게 유럽 산업화 이후로 국한시키지 않고, 훨씬 더 거시적으로, 인류 문명 전체를 덧없이 "유한한 것"으로 보고, 폐허가 되어 인간이 떠난 공간을, 그곳이 다시 전적으로 자연과 시간에게 지배되는 광경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문명을 시종일관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컨대 화자가 맨체스터 당국이 "그 지역 전체를 철거하여 거대한 평지로 만들어", 마지막 남은 건물들마저 "유리창과 문들이 모두 부숴지고 파괴되어 바람이 거침없이"(197) 드나드는 거대한 황무지를  "엘리지움"(198), 즉 "영혼들이 사는 낙원"이라고 칭하는 데에서 모든 진보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을 부정하는 작가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4. 그렇다고 작품이 허무주의를 말하려는 건  물론 아닐 것이다. 작품 속에서 이상향은 산업화 이전의 인간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각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일종의 문학적 장치로 보이는) 나비채를 든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 불모의 땅 예루살렘을 떠나 "맑은 샘물과 풍요로운 식물들로 축복받은 땅"(181)에서 잠든 코즈모의 품 안에 들어가 "편안한 모습으로"(182) 자리잡은 메추라기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다분히 "자연과 역사"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Allegori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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