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홍의 황금시대 -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
추이칭 지음, 정영선 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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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오홍의 황금시대 -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를 읽었다. 이 책은 뛰어난 중국의 여류 작가 샤오홍의 일대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샤오홍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었다. 샤오홍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여성처럼 부모님

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유를 찾아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자 했다. 당시는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오히려 미덕이다"라는 말이 널리 받아들여지던 사회 분위기였다. 사실상 그러한 점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중국은 관습의 힘이 아주 컸던 시기였기에 샤오홍은 아주 큰 고난을 겪어야 했다. 자신의 재주를 활용해 세상에 나가려 할 수록 여성들은 더 많은 역경을 겪고 소위 말하는 '유리 천장'의 존재를 맞닥뜨리게 된다.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오히려 미덕이다"란 말은 여성들이 집에서 살림을 하고 남편을 내조하는 것에 온전히 만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 부딪히고 깨져 홀로 남게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고방식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그 의미가 충분히 이해되기에 더 가슴아픈 말이 아닌가 싶다.

 

  샤오홍은 세 명의 남자들과 연인 관계를 맺었고, 그 때마다 헌신적으로 상대방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지 못했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연인들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했다. 그녀는 '붉은 장미'처럼 매 순간마다 치열하고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샤오홍의 연인들은 따뜻하면서도 지적인 그녀의 매력에 매혹되었고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으며, 그녀를 사랑했다. 다만,

샤오홍의 연인들은 샤오홍 한 사람에게 온전히 헌신하지 않았고 끝내는 그녀를 홀로 외롭게 내버려두었다.

 

  샤오홍의 작품 세계에 대해 살펴보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구하고 미래를 창조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모진 세상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은 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정신적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통해 고통과 애환의 정서를 숨김 없이 드러냈고, 섬세하고 예민하게 그것들을 파헤쳤다. 그리고, 그러한 비통한 감정 속에서 결국 나약하고 무기력한 감정에 그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통해 대항적이고 투쟁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할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샤오홍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고통으로 점철된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현실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떻게 해야 바뀌는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  이 책 『샤오홍의 황금시대 -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은 아주 가깝고 친근한 거리에서 샤오홍의 삶을 지켜본다. 특히 그녀가 겪었던 역경, 연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녀가 느낀 외로움과 아픔, 전쟁 상황 속에서의 긴박함이 아주 생생하게 전해져, 마치 그녀를 개인적으로 아주 잘 알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샤오홍은 자신에게 주어진 속박과 끊임없이 투쟁하며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자신다운' 삶을 살고자 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부모가 정해준 결혼을 저버리고, 그로 인해 부모와 의절한 결과 가정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해 오히려 더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에 『샤오홍전』의 '결론'에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고 한다. "샤오홍은 이 시대를 살면서 조국의 현대화를 위해 그 어떤 희생도 다 감내했던 전형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방식에 대처하는 준비가 부족했다. 여성에게는 이 새로운 변혁과 도전이 매우 험난한 고통의 길일 수 있다. 가장 강인한 자만이 비로소 그 난관을 무사히 건널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혈혈단신으로 세상의 풍파를 맞아야만 했고 그 세계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또한, 그 어떤 사람보다 더  맑디맑은 영혼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그녀였기에 그 모든 것은 더 험난하고 위력적이었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태도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가고자 했기 때문의 그녀의 삶은 더욱 빛난다. 그랬기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샤오홍의 삶에 대한 기억을 글로 엮고, 그녀를 향수하는 게 아닐까.

 

  샤오홍은 민중들의 거친 삶과 항일, 반봉건과 같은 자주적인 정신을 강조했다. 그러한 사상을 날카롭게 담은 단편소설이 『생사의 장』이고, 이 소설과 더불어 유년 시절의 향수를 담은 『후란 강 이야기』가 그녀의 역작으로 손꼽힌다. 아직 이 두 권의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작가와 그의 삶을 먼저 만나보게 되는 것도 꽤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샤오홍이라는 뛰어난 작가를 이렇게 가까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다. 조만간에 『생사의 장』을 꼭 읽어보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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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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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의 『해변빌라』
 

 

 

  주의할 점. 해변에 있는 어느 빌라가 아니라, 집 이름이 바로 해변빌라기 때문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거나 의미는 둘다 통한다. 정말로 해변에 있는 빌라니까.

 

  『해변빌라』에서, 인생은 바다에 비유되고 연이어 책에 비유된다. 인생은 물결이 물결에 밀리는 일상의 연속인데, 이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에 연상된다. 물결에 물결이 밀리듯 책의 페이지가 페이지를 덮고, 그러다보면 우리가 보지 못하고 덮여버리는 하나의 물결, 하나의 페이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꽤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리게 되는데, 그 속에는 진실도 섞여있다. 어쩌면 영영 알 수 없는 진실도 지나쳐간다. "어쩌면 진실이야말로 인생에 아무 소용이 없지요. 무언가를 하는 것은, 진실의 조각들이 아니라 물결에 물결이 밀리는 것 같은 일상의 연결된 행동이니까요. 거인을 재운 듯한 정적이 몰려오면 바다는 더 밝고 맑아져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 물결 위에 물결을 덮으며 느리게 다가왔어요. 내가 읽지 못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어요." 인간은 자신의 삶과 그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물결을, 모든 페이지를 다 알 수는 없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오해를 만드는 존재"이고, "자기 속에 있는 것을 통해서 오해하는" 존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오해가 생기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 미궁이 된다. 우리는 인생의 미궁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 유지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유지를 만나면, 그녀가 땅에 발을 딯지 못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때때로 주변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그보다 더 자주, 자기 자신을 외롭게 만든다. 그녀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아직도 발밑이 바닥에 닿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자신은 누구인지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물음을 안고 있다. 그 질문은 소설이 끝나는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는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인생의 한 가지 지독한 점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서도 여전히 삶은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와 공존하면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유지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머릿속으로 별이 지나가듯, 삶은 괴물을 가둔 미궁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겹겹의 윤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다가가지 말아야 하고 열어서는 안 되고 말해서도 안 되는 괴물은 실은 삶의 얼굴 자체였다. 그러니 우리는 아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않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내 본질이 뻥 뚫려 구멍이 나 있더라도 그 주위를 돌며 춤을 추는 것이 삶인 것이다."

 

  유지는 이사경에게 강력한 '밀착감'을 느낀다. 그녀는 이사경이라는 사람 자체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고, 자신의 친모인 이린과 이사경의 내연 관계를 짐작하고서는 이사경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한다. 단지 누구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그것은 확실한 사실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사경을 아버지로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의 수많은 질문은 풀리지 않았다. 친모인 이린은 기어코 떠났고, 이사경은 언제나 말보다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이사경을 비롯한 누구도, 유지의 본질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고 그녀 스스로 답을 찾을 수도 없었다.

 

  유지는 자신의 본질을 채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허공에 떠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음악적 동료이자 연인인 오휘는 그녀와 일치되지 못하는 것에 답답함과 소외감을 느낀다. 그는 "이곳에도 저곳에도 너는 없어." "유지, 네가 원하는 게 뭐니?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어……"라 하며 고통스러워 한다. 결국 오휘는 음악을 떠나고, 그녀와도 헤어지게 된다. 유지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혹은 자신이 원했던 것은 무엇인지 끝까지 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자신이 오휘를 사랑했고 원했음을 깨달았지만 상황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해, 그녀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또 괄호를 하나 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몇 개의 괄호를 치고 나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당분간 괄호 속에 묶어놓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 건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지가 계속해서 괄호를 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참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는 게 원칙이다. 작가는 『해변빌라』의 에필로그에서, "말하자면, 괄호에 관한 소설이다"라 덧붙이고 있다. "오해와 착각과 환상과 거짓과 허구와 진실의 충돌 사이에서" 그 모든 것에 싫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는 괄호 속에 담아두고, 충돌을 피하고 갈등은 내버려두고자 했다. 하지만 그걸 억제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변화는 생겨났다. 알고보니 그 이유는 "소설의 내부에 의식과 시간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내부에 의식과 시간이 흐르듯, 마찬가지로 삶에도 의식과 시간이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생의 에너지는 계속해서 생겨났고 어느샌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하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흘러가고 변화했다. 문제가 풀리고,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이해하게 되고, 용서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결국 괄호는 열리고 삶은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유지는 이사경의 아들인 연조에게서 이사경의 모습을 본다. 자세히 묘사되어있지는 않지만 연조에게 있어서 유지는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이사경을 닮아 깊고 잔잔한 연조에게서, 유지는 따뜻한 휴식과 안정을 얻는다. 동시에, 연조의 이혼으로 엄마를 잃은 연조의 아들 환에게는 동질감을 느낀다. 자신의 본질을 잃고, 인정을 받지 못해 불안해하는 환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유지와 환의 관계는, 이사경과 유지의 관계와 닮아있다. 부모님과 떨어져 자라, 어머니가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이사경은 유지와 강력한 연결고리를 공유했다. 하지만 이사경은 이제 어머니를 이해한다고 했다.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아마 유지도 이린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환도, 시간이 더 흐르면 언젠가 자신의 부모님을 이해하게 될까. 이 기막힌 관계의 연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의 손을 잡은 연조는 또 다른 손을 유지에게 내민다.  "네가 내려설 바닥이 우리 사이에 있으면 좋겠다……."

 

  ""바다가 두꺼운 책 같다." 연조가 말했어요. 나는 어쩐지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기분이 들었어요. 편 사장이 가게 문을 열고 나와 재촉하듯 이쪽을 보고 있었어요.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었지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일들이 늘 우리의 옆구리로 흘러가니까요.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그렇게 대답할 거예요. 우리는 전과 조금 달라지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요."

 

  이 소설의 기막힌 비유가 책 전체의 내용을 아우르며, 강한 메시지를 남긴다. 우리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펼쳐질지, 우리가 우리의 삶 곳곳에 쳐놓은 괄호는 대체 언제 풀릴 것인지 여전히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듯, 우리 인생에도 의식과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생을 향해 움직여갈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메시지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이사경의 어머니, 이사경과 이린, 유지, 그리고 환의 인생을 따라 시간은 이어지며 그들은 전과 아주 조금, 달라지고 있다. 단지, 전과 '조금' 달라지기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희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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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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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 없는 남자들. 그게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그 의미는 마지막 단편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밝혀진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 어쨌거나 당신은 그렇게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다. 그리고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7개의 단편을 통해, 우리는 7명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만난다. 그들은 자의적으로 혹은 타의적으로 여자와의 깊은 관계를 상실했거나, 애초부터 그런 관계를 지니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들은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었을까? 「예스터데이」의 다니무라는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끝없이 길을 돌아가고 있어."


 「예스터데이」속 연인 기타루와 에리카는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깊은 연인 관계이지만, 끝없는 분리 불안에 시달린다. 두 연인은 상대방과 분리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 이는 에리카의 꿈을 통해 형상화된다. 이 단편집의 표지에 실린 멋진 얼음 달이 바로 그것이다. "나와 아키 단둘이서 그런 항해를 계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 우리는 매일 밤 둘이서 나란히, 둥근 창으로 얼음 달을 보는 거야. 달은 아침이 오면 녹아버리지만 밤에는 다시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어느 날 밤, 달은 더이상 나오지 않을지도 몰라. 달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밤을 상상하면 너무 무서워. 내일 내가 어떤 꿈을 꿀지 생각하면, 몸이 소리를 내며 오그라들 것처럼 무서워." 그렇게 시절을 지나, 몇년 후 다시 만난 에리카는 여전히 기타루와 함께이지도,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기타루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삶에, 서로와의 관계가 강한 얼룩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깊고 친밀한 관계를 경험했고, 상대를 향한 자신의 불안, 고독,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상대를 떠나야했다. 그들은 평생 와인 자국과 함께 살고 있다.


  「기노」의 주인공 기노는 아내의 외도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드러내 아내를 원망하거나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자신을 피해자라고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육상선수가 되려던 그는 부상으로 인해 선수를 그만둬야 했고, 십칠 년간 스포츠용품 판매회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동료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이라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침실 문을 닫고 일주일치 빨랫감이 든 여행가방을 도로 어깨에 멘 체 집을 나와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이렇게 담담한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비정상적일 뿐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다. 단순히,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서 그의 방이 완전히 보호받을 수는 없다. 세계는 끊임없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방을 노크한다. 노크를 계속해서 피한다면 그 끝은 죽음이 될 것이다. 결국 그 노크는 우리가 침대에서 내려와 스스로 문을 열기를 요구한다. 문은 자기 자신만이 열 수 있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얼룩으로 남은 상처를 수용하고,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얼룩임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살기 위해서, 내가 나 자신이기 위해서, 언젠가는 방 문을 열어야 한다. 방 안에 밴 와인 냄새를 걷어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여오기 위해서.


  「독립기관」. 나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단편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 도카이는, 여자와의 깊고 친밀한 관계를 일부러 피해가는 듯해 보인다. 마음에 드는 여자들과 '쿨한' 관계를 지속하고, 지적이고 매력적인 연애를 즐긴다. 그렇게, 50이 넘은 나이임에도 그의 삶은 그럭저럭 꽤 건강하고 활기있어 보인다. 그는 유능하고 친절하며 배려심이 깊다. 그러나 단 한번, 사랑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삶의 "인공성을, 혹은 비자연성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 죽음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한 여자, 그것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도카이는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관, 세계관, 의지, 목표, 삶의 방식과 완전히 대치되는 사고에 빠진다. 그는 한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대체 무엇인가." 지금껏, 자기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째서 지금껏, 자신의 삶 속에서 한번도 그러한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그는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들어가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공허함, 자책, 조소, 혹은 그것도 아닌 무엇일까. 「독립기관」의 시작 부분이 무엇보다 아주, 탁월하다.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가 너무도 부족한 탓에, 그 몫만큼 놀랍도록 기교적인 인생을 걷게 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 그 같은 사람들은 굴곡진 주의 세계에 (말하자면) 올곧은 자신을 끼워맞춰 살아가기 위해 많든 적든 저마다 조정작업을 요구받게 되는데, 대부분 본인은 자신이 얼마나 번거로운 기교를 부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숨기는 것도 없고 꾸미는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디선가 꽂혀들어온 특별한 햇빛을 받아 그들이 자기 삶의 인공성을, 혹은 비자연성을 퍼뜩 깨달았을 때, 사태는 때로는 비통하고 또한 때로는 희극적인 국면을 맞이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교'란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단편 속 '기교'의 의미를 나름대로 표현해보자면, '사랑이 없음'의 상태에서 그 공허함을 무언가로 끊임없이 채우려는 행위다. 필연적으로, 인공적이고 비자연적인 행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한다. 때로, 한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여자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고. 시간이 흐르면 상실과 상처의 고통이 조금 사그러들지는 몰라도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상실의 경험은 우리 삶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때에도 여전히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자 없는 남자들, 혹은 남자 없는 여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만약,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고 치자. "사랑을 시작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마도 많은 수의 여자 없는 남자들이 대답할 것이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좋겠군요."라고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하는 잠자'에게 사랑을 시작하지 말라,고 조언할 수 없다. 사랑은,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도카이에게 그랬듯, 사랑을 하는 기관은 '독립기관'이기에 당신이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독립기관의 운동은 유기체적인 연쇄작용을 일으켜 당신의 총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당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돌이키게 만든다. 그리고, 사랑의 상실 또한 당신의 삶과 당신이라는 총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다행히 그 상실은 조금씩 희미해져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달라지는 카페트의 얼룩처럼 서서히, 조금씩. 그리고 당신의 인생이 진행될수록, 삶의 관록이 더해갈수록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깊어지고, 재해석된다. 어느 순간 불현듯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당시의 문제의 원인을 알게 되기도 하며, 어쩌면 "모든 것이 어찌되었건 상관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얼룩은 '다의적인 윤곽'을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얼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 얼룩은, 당신이 새로운 사랑을 하고 그로 인해 어쩌다 새로운 또 하나의 얼룩을 얻게 된다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과 함께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얼룩의 자격을 지녔고 때로는 얼룩으로서 공적인 발언권까지 지닐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곽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한 생을 살면서, 당신의 카페트는 크고 작은 얼룩들로 가득해질 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한 여자를 잃으면서 모든 여자를 잃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면, 당신의 카페트에는 커다란 하나의 얼룩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 커다란 얼룩과 함께 생을 보내면서,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려 할 때부터, 새로운 얼룩을 얻게 될 것을 생각하며 불안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시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위에서도 썼듯, 사랑은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기 때문이고, 사랑은 당신의 신체 어딘가에 있는 '독립기관'에서 일어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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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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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소소한 풍경』

 

  화자는 소설가다. 화자가 이 소설 아닌 소설을 쓰게 된 것은 ㄱ으로부터 '데스마스크'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다. '시멘트 데스마스크' 이야기를 들은 후로부터 화자는 글을 쓰겠다는 강한 끌림에 사로잡힌다. 프롤로그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누군가의 유골과 '시멘트 데스마스크'는 흥미 만점이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수만 갈래 은밀히 흐르는 지하의 물길을 만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보편적인 지상의 삶을 통과한 뒤 만나는 삶의 내경은 때로 비밀스럽기 그지없다. 그것에 대한 끌림이야말로 작가로서 내 생애를 끈질기고 황홀하게 붙잡고 있는 나의 존재론적 당위라고 여긴다."고 말이다. 한편, ㄱ은 소설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차라리 당신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는지 모른다. 당신은 작가이고, 작가는 누군가의 숨기고 싶은 내면으로 틈입해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화자의 입장과 ㄱ의 입장이 교차되고, 또 ㄱ의 입장과 ㄴ의 입장이 교차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 입장은 서로 다르면서도 또 닮아있다. 마치 '덩어리'처럼.

 

  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은 죽음에 대한 끌림이다. 혹은, 열망일지도 모른다. ㄱ과 ㄴ, ㄷ은 서로 함께이고, 생을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분리를 생각하고 죽음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완전해지는 것이자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제2장 <둘이 사니 더 좋아>에서 ㄴ의 영혼은 죽음의 순간을 상기하며 환희에 젖는다.

  "그게 전부예요. 당신이 몸을 구부려 세탁기 버튼을 누른 것과 내 몸이 우물 속으로 투하된 것은 동시였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당신-나, 혹은 나-그녀, 혹은 당신-나-그녀가 완벽하게 덩어리진 순간이었다고요"

  "그렇지 않았던가요. 손가락 하나가 버튼을 눌러 세탁기는 다시 돌아가고, 손가락 하나가 버튼을 눌러 나 역시 우물 속 숨겨진 물길 따라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세탁기 안으로 흘러내려갔답니다. 오랫동안 꿈꾸던 그 세례의 길로요.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도 그 가지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처럼. 단지 소소한 풍경이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한편, ㄷ은 조금 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ㄴ과 동일하게 죽음에 강하게 이끌리고 있다.

  "…예전엔 하루에도 수십 번 내가 무엇을 찾아 여기에 왔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곤 했었는데, 그러나 이젠 그런 거 묻지도 않아. 더 이상 길이 없는 곳이 바로, 이 땅이라고 느끼니깐."

  "길이 없다고 여기면 길은 하나뿐이야. 아저씨가 떠난 그 길. 나도 언니도 자주 가고 싶을지 모르는 그 길."

 

  소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사랑을 이야기한다. ㄱ과 ㄴ,ㄷ의 관계에는 타나토스의 힘과 에로스의 힘이 끝없이 얽혀있다. 작가는 놀라운 표현을 사용한다. 섹스를 '덩어리 되기'의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나-그는 때로 '덩어리'가 된다. 나-그 사이의 정적, 나-그의 몸뚱어리 속 가시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자는 데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한 '덩어리 되기'였다고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고 덩어리를 이루는 법을 우리는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때문에 당연히, 덩어리로 인한 어떤 소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피차 생의 가시를 촘촘히 내장하고 있었으므로."

  ㄱ은 현대사회의 혼인 형태인 일부일처제에서, 서로에 대한 독점은 '비천한 지배에의 욕망'으로 드러난다고 자조했다. 그녀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혼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서로의 가시가 숨을 쉴 구멍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남자1과 더이상 결혼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대신 ㄴ,ㄷ과의 관계에서는 서로의 가시를 올곧이 간직한 채 오로지 사랑 행위에 전념할 수 있었다. 어쩌면 누구 한 사람을, 혹은 그런 방식으로 세 사람 모두를 소외시킬 수도 있었지만 셋 중 누구 하나도 소외되지 않고 행위에 임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죽음으로부터도 소외되어왔던 그들은 분리이자 합일을 동시에 경험한다.

  "우리가 만났을 때 이미, 각자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기억한다. 죽음에 익숙해지면 이별이 두렵지 않으며 이별이 두렵지 않으면 가지려고 할 필요도 없다. 소유하려 하면 할 수록 소유 자체가 사랑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아는 일이야말로 죽음에의 이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지닌 몸속 '가시'들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고 믿어요. 가시요. 아니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에 젖어 몸속 가시들조차 모조리 녹아 없어졌었다면 과장일까요. 눈 속에 고립된 그 외딴집 자체가 우리의 밀어였고 세례였다고요. 결단코 '자기들끼리만……너무'하지 않게 보냈던 시간이었다고 믿어요."

  그들의 행위는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범속할지 모르나, 그 무엇보다도 순수한 충동에 가깝고 맑은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소유하거나 독점하려하지 않고, 상대방의 가시를 건드리지 않되 서로의 가시를 녹여줄 수 있는 사랑. 침묵 속에서도 소통하고, 하나의 원 속에서 수없이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사랑. 상대방이 죽음을 선택할 때 기꺼이 그 선택을 밀어 눌러줌으로써 절대적인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사랑.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과연 ㄱ이 어떤 선택을 내릴까가 궁금해졌다. '플롯'에 익숙한 독자가 보일 법한 당연한 반응이다. 작가 또한 플롯의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결말에 다다르고 있다. ㄱ은 "어디에선가 삶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얻어야"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채로, 생의 길을 걷기로 한다. "두려움이야말로 나의 에너지다." 그녀는 그 두려움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으려 한다. 그녀에게 생의 의지는 글을 쓰고자하는 동기로부터 기인하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과거를 돌이켜보는 고통스러운 행위 전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과거를 언어로 담아내야한다. 얼마나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인가. 그녀는 그 두려움이 주는 미묘한 힘을 문장으로 승화시켜 죽음의 의지를 삶의 의지 삼고자 한다.

 

  관능적이고 감각적이면서도 무겁고, 철학적인 소설이다. 특히 단어의 사용이 무척이나 함축적이라고 생각했다. 문학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깊게 뿌리박혀있어, 그 하나하나의 단어와 문장을 읽어 넘기기가 아깝고, 또 버겁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아퀴를 짓다'라든가 '여일하다'라든가 하는 표현들. 그리고 '숨구멍', '덩어리', 우물', '식물성 욕망' 같은 단어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내러티브를 따라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고 싶다는 욕망과 동시에, 한 문장 문장을 되씹고 입안에 굴려보려는 욕망이 계속해서 충돌하는 것을 경험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아직도 내가 다 소화하지 못한 단어와 문장들이 내 마음에 어려움을 주지만, 작가 박범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확히 다가와 내 가슴에 꽂혔다. 더불어,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ㄴ은 "누구든지, 살아 있는 한 존재의 독방에서 온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어요."라 말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단독자이되 누군가와의 합일을 꿈꾸기 때문에 불안하고, 죽음에 대한 열망을 지녔음에도 끊임없이 삶의 에너지를 얻어야한다. 어떤 사랑, 어떤 열망, 어떤 죽음, 어떤 에너지를 내 문장에 써내려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리뷰를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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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 리뷰를 적어본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막는 동력 중 하나는,  남은 평생동안 범죄자인 자기 자신과 함께 사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매 순간마다 자기 자신과 함께 공존해야 하는 존재인데, 끊임없이 자신을 단죄한다면 그 삶은 끝없는 고통이 될 것이 아닌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로운 소설『공허한 십자가』에서는 죄와 속죄의 의미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죄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 물론 법률에 죄의 명목들이 규정되어 있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죄가 아닌지, 어떤 죄가 더 무거우며 어떤 죄가 더 가벼운지에 대해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오리와 후미야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이 방금 태어난 자신들의 아이를 죽인 것은 살인 행위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이 낙태 수술과 다를 게 무엇이냐고 이야기할 법 하다. 더욱이, 당시 그들이 미성년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형사적으로 처벌받을 죄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사오리와 후미야 당사자들에게 이것은 인생의 크나큰 잘못된 선택이자 영원히 속죄해야할 지난날의 무거운 죄로 남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버리는 방식으로, 또 누군가의 삶을 살리는 방식으로 평생 단죄와 속죄의 삶을 산다.

 

이 책에서는 두 명의 살인자가 더 등장한다. 주인공 나카하라의 딸인 마나미를 살해한 강도, 그리고 나카하라의 아내인 사요코를 살해한 마치무라 사쿠조다. 먼저, 어린 마나미를 살해한 강도는 죄책감 없이 사형 집행을 기다린 것으로 밝혀져 사요코를 분노하게 만든다. 그는 마지막까지 뉘우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고, 사형이 마치 다가온 죽음의 '운명'인듯 마음 편하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다고 전해졌다. 한편, 마치무라 사쿠조는 자신의 딸 부부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범죄를 저지른다. 그는 죄로 인한 처벌을 응당 받아들이며 희생적인 태도를 보인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해도 아마 그는 범죄를 반복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오리, 후미야의 모습과는 각각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그 죄의 무거움은 아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속죄'의 차원에서 봤을 때, 본인이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판단하고 또 그것을 얼마나 무거운 정도로 판단하느냐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일 뿐, 피해자 혹은 법률이 힘을 미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이 같은 사실이 딸을 잃은 피해자인 사요코의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고 사형제를 무조건적으로 주장하면서도 그 사형제의 '무력함' 앞에서 딜레마를 느끼게 한 것이다.

 

주인공 나카하라는 자신의 전 아내의 죽음과 관련해 사건을 파헤쳐가면서, 딸 마나미 사건 때와는 사건의 국면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아내를 살해한 범인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다.

  "야마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카하라는 사건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가해자의 가족에 관해서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부터 나카하라는 이 사건을 여러 관점, 여러 차원으로 보게 된다. 살인자에게도 가정이 있다. 누군가가 그 살인자를 보호하려 한다. 어쩌면 이 살인자는 그저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일 지도 모른다. 문제가 점점 더 복잡해진다.


후미야의 아내인 하나에는 후미야를 옹호하며 이렇게 말한다.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런 무게도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남편이 지금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나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예요. 나카하라 씨, 아이를 살해당한 유족으로서 대답해보세요.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제 남편처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후미야의 장인인 마치무라 사쿠조 또한 후미야를 옹호하고 나선다.

  "20여 년 전, 철없을 때 낳은 아이를 죽인 게 뭐가 대단하다고 이 난리야? 그건 중절 수술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들이 누구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지? 누구를 슬프게 했다는 거지? 아이의 유족은 누구지? 당신들이 가해자이자 곧 유족이잖아. 그 아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들이고, 그 아이를 위해 슬퍼한 사람도 당신들뿐이잖아.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감옥에 가야 한다고? 가족과 헤어져서 징역을 살아야 한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한번 말해봐. 당신이 지금 자수해서 감옥에 가면 뭐가 좋지? 그냥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잖아?"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된 후, 나카하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기로 한다. 신고도 발설도 하지 않은 채 행동을 멈추고, 당사자인 후미야에게 결정을 위임한다. 한 때는 아내인 사요코와 함께 피해자의 입장에서 범인의 사형을 주장했지만, 더이상 그는 자신이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해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후미야는 놀라운 선택을 한다. 자신의 죄가 드러날 위기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수한다. 후미야의 결정은 어떠한 속죄 행위를 통해서도 자신의 지난 죄를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 표현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죄의 실질적 법적인 경중을 떠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지운 십자가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 아닐까.

 

​위에서 언급했듯, '속죄'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일 뿐, 피해자나 법률이 힘을 미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는 범죄자에게 처벌을 가함으로써 그에 대한 죄를 묻는다. 하지만 그 처벌로 인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얻을 수 있는 위안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그나마 조금 더 가라앉힐 수 있는 것 뿐이다. 딸을 잃은 사요코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형을 폐지하고 종신형을 도입하라는 의견도 있지만, 유족의 감정을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종신형에서 범인은 살아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매일 밥을 먹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어쩌면 취미도 가지고 있을 지 모른다.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유족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말을 하는데,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의 죽음은 '속죄'도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곳을 지났다고 해서 앞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극복하고 어디로 가야 행복해질지는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통과점마저 빼앗기면 유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형 폐지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렇게, 사요코는 범인을 사형시킨다고 해서 유족의 고통을 덜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피해자가 정당한 방법을 통해 범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혹은 고통스럽게 할 수는 있을 지언정, 이로 인해 피해자가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범인이 벌을 받는다는 이유로 인해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게 될 더 큰 분노와 고통을 막기 위해, 그리고 악을 징벌하기 위해 사형제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일한 논리에서 이러한 점은 사형제가 집행되지 않아야하는 이유로서도 작용한다. 이것은 딜레마다.

이 소설에서 옳고 그름의 정답은 제시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의 절대적 기준에 의하지 않는 한, 인간이 어떠한 절대적 기준을 내세울 수도, 적용할 수도 없는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 나카하라가 판단을 포기하고, 후미야 스스로 판단하도록 결정하는 부분에서 작가의 궁극적 의도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죄는 당사자 자신만의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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