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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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소소한 풍경』

 

  화자는 소설가다. 화자가 이 소설 아닌 소설을 쓰게 된 것은 ㄱ으로부터 '데스마스크'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다. '시멘트 데스마스크' 이야기를 들은 후로부터 화자는 글을 쓰겠다는 강한 끌림에 사로잡힌다. 프롤로그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누군가의 유골과 '시멘트 데스마스크'는 흥미 만점이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수만 갈래 은밀히 흐르는 지하의 물길을 만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보편적인 지상의 삶을 통과한 뒤 만나는 삶의 내경은 때로 비밀스럽기 그지없다. 그것에 대한 끌림이야말로 작가로서 내 생애를 끈질기고 황홀하게 붙잡고 있는 나의 존재론적 당위라고 여긴다."고 말이다. 한편, ㄱ은 소설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차라리 당신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는지 모른다. 당신은 작가이고, 작가는 누군가의 숨기고 싶은 내면으로 틈입해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화자의 입장과 ㄱ의 입장이 교차되고, 또 ㄱ의 입장과 ㄴ의 입장이 교차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 입장은 서로 다르면서도 또 닮아있다. 마치 '덩어리'처럼.

 

  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은 죽음에 대한 끌림이다. 혹은, 열망일지도 모른다. ㄱ과 ㄴ, ㄷ은 서로 함께이고, 생을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분리를 생각하고 죽음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완전해지는 것이자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제2장 <둘이 사니 더 좋아>에서 ㄴ의 영혼은 죽음의 순간을 상기하며 환희에 젖는다.

  "그게 전부예요. 당신이 몸을 구부려 세탁기 버튼을 누른 것과 내 몸이 우물 속으로 투하된 것은 동시였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당신-나, 혹은 나-그녀, 혹은 당신-나-그녀가 완벽하게 덩어리진 순간이었다고요"

  "그렇지 않았던가요. 손가락 하나가 버튼을 눌러 세탁기는 다시 돌아가고, 손가락 하나가 버튼을 눌러 나 역시 우물 속 숨겨진 물길 따라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세탁기 안으로 흘러내려갔답니다. 오랫동안 꿈꾸던 그 세례의 길로요.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도 그 가지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처럼. 단지 소소한 풍경이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한편, ㄷ은 조금 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ㄴ과 동일하게 죽음에 강하게 이끌리고 있다.

  "…예전엔 하루에도 수십 번 내가 무엇을 찾아 여기에 왔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곤 했었는데, 그러나 이젠 그런 거 묻지도 않아. 더 이상 길이 없는 곳이 바로, 이 땅이라고 느끼니깐."

  "길이 없다고 여기면 길은 하나뿐이야. 아저씨가 떠난 그 길. 나도 언니도 자주 가고 싶을지 모르는 그 길."

 

  소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사랑을 이야기한다. ㄱ과 ㄴ,ㄷ의 관계에는 타나토스의 힘과 에로스의 힘이 끝없이 얽혀있다. 작가는 놀라운 표현을 사용한다. 섹스를 '덩어리 되기'의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나-그는 때로 '덩어리'가 된다. 나-그 사이의 정적, 나-그의 몸뚱어리 속 가시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자는 데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한 '덩어리 되기'였다고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고 덩어리를 이루는 법을 우리는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때문에 당연히, 덩어리로 인한 어떤 소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피차 생의 가시를 촘촘히 내장하고 있었으므로."

  ㄱ은 현대사회의 혼인 형태인 일부일처제에서, 서로에 대한 독점은 '비천한 지배에의 욕망'으로 드러난다고 자조했다. 그녀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결혼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서로의 가시가 숨을 쉴 구멍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남자1과 더이상 결혼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대신 ㄴ,ㄷ과의 관계에서는 서로의 가시를 올곧이 간직한 채 오로지 사랑 행위에 전념할 수 있었다. 어쩌면 누구 한 사람을, 혹은 그런 방식으로 세 사람 모두를 소외시킬 수도 있었지만 셋 중 누구 하나도 소외되지 않고 행위에 임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죽음으로부터도 소외되어왔던 그들은 분리이자 합일을 동시에 경험한다.

  "우리가 만났을 때 이미, 각자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기억한다. 죽음에 익숙해지면 이별이 두렵지 않으며 이별이 두렵지 않으면 가지려고 할 필요도 없다. 소유하려 하면 할 수록 소유 자체가 사랑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아는 일이야말로 죽음에의 이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지닌 몸속 '가시'들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고 믿어요. 가시요. 아니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에 젖어 몸속 가시들조차 모조리 녹아 없어졌었다면 과장일까요. 눈 속에 고립된 그 외딴집 자체가 우리의 밀어였고 세례였다고요. 결단코 '자기들끼리만……너무'하지 않게 보냈던 시간이었다고 믿어요."

  그들의 행위는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범속할지 모르나, 그 무엇보다도 순수한 충동에 가깝고 맑은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소유하거나 독점하려하지 않고, 상대방의 가시를 건드리지 않되 서로의 가시를 녹여줄 수 있는 사랑. 침묵 속에서도 소통하고, 하나의 원 속에서 수없이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사랑. 상대방이 죽음을 선택할 때 기꺼이 그 선택을 밀어 눌러줌으로써 절대적인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사랑.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과연 ㄱ이 어떤 선택을 내릴까가 궁금해졌다. '플롯'에 익숙한 독자가 보일 법한 당연한 반응이다. 작가 또한 플롯의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결말에 다다르고 있다. ㄱ은 "어디에선가 삶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얻어야"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채로, 생의 길을 걷기로 한다. "두려움이야말로 나의 에너지다." 그녀는 그 두려움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으려 한다. 그녀에게 생의 의지는 글을 쓰고자하는 동기로부터 기인하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과거를 돌이켜보는 고통스러운 행위 전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과거를 언어로 담아내야한다. 얼마나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인가. 그녀는 그 두려움이 주는 미묘한 힘을 문장으로 승화시켜 죽음의 의지를 삶의 의지 삼고자 한다.

 

  관능적이고 감각적이면서도 무겁고, 철학적인 소설이다. 특히 단어의 사용이 무척이나 함축적이라고 생각했다. 문학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깊게 뿌리박혀있어, 그 하나하나의 단어와 문장을 읽어 넘기기가 아깝고, 또 버겁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아퀴를 짓다'라든가 '여일하다'라든가 하는 표현들. 그리고 '숨구멍', '덩어리', 우물', '식물성 욕망' 같은 단어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내러티브를 따라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고 싶다는 욕망과 동시에, 한 문장 문장을 되씹고 입안에 굴려보려는 욕망이 계속해서 충돌하는 것을 경험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아직도 내가 다 소화하지 못한 단어와 문장들이 내 마음에 어려움을 주지만, 작가 박범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확히 다가와 내 가슴에 꽂혔다. 더불어,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ㄴ은 "누구든지, 살아 있는 한 존재의 독방에서 온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어요."라 말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단독자이되 누군가와의 합일을 꿈꾸기 때문에 불안하고, 죽음에 대한 열망을 지녔음에도 끊임없이 삶의 에너지를 얻어야한다. 어떤 사랑, 어떤 열망, 어떤 죽음, 어떤 에너지를 내 문장에 써내려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리뷰를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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