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 리뷰를 적어본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막는 동력 중 하나는,  남은 평생동안 범죄자인 자기 자신과 함께 사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매 순간마다 자기 자신과 함께 공존해야 하는 존재인데, 끊임없이 자신을 단죄한다면 그 삶은 끝없는 고통이 될 것이 아닌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로운 소설『공허한 십자가』에서는 죄와 속죄의 의미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죄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 물론 법률에 죄의 명목들이 규정되어 있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죄가 아닌지, 어떤 죄가 더 무거우며 어떤 죄가 더 가벼운지에 대해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오리와 후미야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이 방금 태어난 자신들의 아이를 죽인 것은 살인 행위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이 낙태 수술과 다를 게 무엇이냐고 이야기할 법 하다. 더욱이, 당시 그들이 미성년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형사적으로 처벌받을 죄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사오리와 후미야 당사자들에게 이것은 인생의 크나큰 잘못된 선택이자 영원히 속죄해야할 지난날의 무거운 죄로 남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버리는 방식으로, 또 누군가의 삶을 살리는 방식으로 평생 단죄와 속죄의 삶을 산다.

 

이 책에서는 두 명의 살인자가 더 등장한다. 주인공 나카하라의 딸인 마나미를 살해한 강도, 그리고 나카하라의 아내인 사요코를 살해한 마치무라 사쿠조다. 먼저, 어린 마나미를 살해한 강도는 죄책감 없이 사형 집행을 기다린 것으로 밝혀져 사요코를 분노하게 만든다. 그는 마지막까지 뉘우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고, 사형이 마치 다가온 죽음의 '운명'인듯 마음 편하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다고 전해졌다. 한편, 마치무라 사쿠조는 자신의 딸 부부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범죄를 저지른다. 그는 죄로 인한 처벌을 응당 받아들이며 희생적인 태도를 보인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선택을 내릴 수 있다 해도 아마 그는 범죄를 반복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오리, 후미야의 모습과는 각각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그 죄의 무거움은 아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속죄'의 차원에서 봤을 때, 본인이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판단하고 또 그것을 얼마나 무거운 정도로 판단하느냐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일 뿐, 피해자 혹은 법률이 힘을 미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이 같은 사실이 딸을 잃은 피해자인 사요코의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고 사형제를 무조건적으로 주장하면서도 그 사형제의 '무력함' 앞에서 딜레마를 느끼게 한 것이다.

 

주인공 나카하라는 자신의 전 아내의 죽음과 관련해 사건을 파헤쳐가면서, 딸 마나미 사건 때와는 사건의 국면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아내를 살해한 범인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다.

  "야마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카하라는 사건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가해자의 가족에 관해서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부터 나카하라는 이 사건을 여러 관점, 여러 차원으로 보게 된다. 살인자에게도 가정이 있다. 누군가가 그 살인자를 보호하려 한다. 어쩌면 이 살인자는 그저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일 지도 모른다. 문제가 점점 더 복잡해진다.


후미야의 아내인 하나에는 후미야를 옹호하며 이렇게 말한다.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런 무게도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남편이 지금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나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예요. 나카하라 씨, 아이를 살해당한 유족으로서 대답해보세요.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제 남편처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후미야의 장인인 마치무라 사쿠조 또한 후미야를 옹호하고 나선다.

  "20여 년 전, 철없을 때 낳은 아이를 죽인 게 뭐가 대단하다고 이 난리야? 그건 중절 수술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들이 누구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지? 누구를 슬프게 했다는 거지? 아이의 유족은 누구지? 당신들이 가해자이자 곧 유족이잖아. 그 아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들이고, 그 아이를 위해 슬퍼한 사람도 당신들뿐이잖아.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감옥에 가야 한다고? 가족과 헤어져서 징역을 살아야 한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한번 말해봐. 당신이 지금 자수해서 감옥에 가면 뭐가 좋지? 그냥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잖아?"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된 후, 나카하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기로 한다. 신고도 발설도 하지 않은 채 행동을 멈추고, 당사자인 후미야에게 결정을 위임한다. 한 때는 아내인 사요코와 함께 피해자의 입장에서 범인의 사형을 주장했지만, 더이상 그는 자신이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해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후미야는 놀라운 선택을 한다. 자신의 죄가 드러날 위기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수한다. 후미야의 결정은 어떠한 속죄 행위를 통해서도 자신의 지난 죄를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 표현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죄의 실질적 법적인 경중을 떠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지운 십자가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 아닐까.

 

​위에서 언급했듯, '속죄'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일 뿐, 피해자나 법률이 힘을 미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는 범죄자에게 처벌을 가함으로써 그에 대한 죄를 묻는다. 하지만 그 처벌로 인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얻을 수 있는 위안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그나마 조금 더 가라앉힐 수 있는 것 뿐이다. 딸을 잃은 사요코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형을 폐지하고 종신형을 도입하라는 의견도 있지만, 유족의 감정을 털끝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종신형에서 범인은 살아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매일 밥을 먹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어쩌면 취미도 가지고 있을 지 모른다.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유족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말을 하는데,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의 죽음은 '속죄'도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곳을 지났다고 해서 앞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극복하고 어디로 가야 행복해질지는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통과점마저 빼앗기면 유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형 폐지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렇게, 사요코는 범인을 사형시킨다고 해서 유족의 고통을 덜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피해자가 정당한 방법을 통해 범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혹은 고통스럽게 할 수는 있을 지언정, 이로 인해 피해자가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범인이 벌을 받는다는 이유로 인해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게 될 더 큰 분노와 고통을 막기 위해, 그리고 악을 징벌하기 위해 사형제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일한 논리에서 이러한 점은 사형제가 집행되지 않아야하는 이유로서도 작용한다. 이것은 딜레마다.

이 소설에서 옳고 그름의 정답은 제시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의 절대적 기준에 의하지 않는 한, 인간이 어떠한 절대적 기준을 내세울 수도, 적용할 수도 없는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 나카하라가 판단을 포기하고, 후미야 스스로 판단하도록 결정하는 부분에서 작가의 궁극적 의도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죄는 당사자 자신만의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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