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이원기 옮김, 김동택 해제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홉스봄을 생존하는 최고의 역사가로 꼽는 이유는 당연히 그의 역사인식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비단 그의 역사관을 따르기 때문이 아니다. 홉스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학문적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공산당을 지지하는 학자로써 다양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강단에 서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홉스봄을 단순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가 아닌 진정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 책은 역사적 안목을 통해 바라본 현재의 세계에 대한 홉스봄의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가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그 목적을 충실히 다하고 있다.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등의 저작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대량학살과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달을 꼽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20세기를 잇는 21세기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전쟁, 국가, 민족 등 다양한 틀로 분석을 시도하고 있지만 종합해보자면 이전까지 유지되던 규범이나 틀의 붕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국민국가 단위로 진행되던 전쟁은 이제 그러한 구분이 모호해졌다.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도 사라져서 전투의 규모는 작아졌어도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뚜렷한 세계화의 영향으로 국민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미미해져 버렸다. 1, 2, 3세계로 구분되던 세계의 모습도 냉전이 끝남으로써 붕괴해버렸고 미국만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20세기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였고 지금도 한국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민족주의도 냉전의 붕괴로 인한 국제정치의 불안정성 증가, 세계화의 놀라운 속도, 노동의 이동에 따른 외국인 혐오증의 증가 등으로 그 힘을 잃고 있다고 진단한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政體로 이해하고 있는 민주주의도 세계화의 물결 속에 국민국가와의 충돌을 제어할 수 있는 효율적인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홉스봄이 21세기의 이러한 모습을 그리면서 가장 주목하는 2가지는 세계화와 미국의 역할이다. 먼저 세계화는 전통적 의미의 국가권력의 약화를 가져왔으며 자국경제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신자유주의는 세계의 구석구석으로 펴져나갔으며, 세계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주의도 약화되는 것이다. 21세기의 또 다른 주요변수인 US는 세계화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로 볼 수 있다. US는 세계화와 동일시되는 신자유주의를 타국에 강제하기 위해 군사, 정치, 문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냉전의 종식이후에 US가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부상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그 힘과 영향력은 엄청나다. 여러 학자들이 US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도 US의 영향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하지만 홉스봄은 US의 영향력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제국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제국의 명분인 질서유지가 사실은 허구이며, 제국은 세계의 질서는 물론 자국 내의 질서도 지켜내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부분적으로 제국주의가 가능했던 시기의 특징인 서구의 우월한 문명에 대한 선망, 피지배국의 근대에 대한 열망 등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대영제국과 US제국의 비교를 통해서는 더더욱 US제국이 계속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세계경제의 중심이었으며 바다를 통한 해외팽창에 주력했던 영국과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영토의 미국은 물론 같을 수 없다. 하지만 홉스봄이 주목하는 부분은 영국이 세계지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하고 경제적 지배에만 주력했던 것에 비해 US는 불가능한 세계패권을 유지하려고 억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홉스봄이 이 책은 한국은 한국의 현실에 너무나도 유익한 조언을 던지고 있다. US의 패권주의 약화로 인해 US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조언은 미국과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현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세계 도처의 인권 문제에 아무리 분개한다고 해도 미국의 해외 군사 개입이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한다거나 자신들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 다른 나라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대책은 세계 곳곳, 특히 중동과 동아시아에서 군사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미국의 정책에 동참해 달라는 권유를 확고히, 그러나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야 미국이 소외당한다고 느끼고 자신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1세기 초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패권 p. 52>  
   

US와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조언 말고도 대부분의 책의 내용은 한국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도입이 곧 선진화, 세계화로 인식되고,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국수주의자로 매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한국사회에 매우 유익한 논란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위해 아직도 싸워야하는 일이 남아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도 세계화의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국가이기에 민주주의가 국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효율적인 문제해결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국민중심주의와 민족국가가 무너져가고 있는 상황에 민주주의가 언제까지나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는 주장은 충분히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홉스봄의 저작들은 사실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이 책은 강연원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그의 다른 저작들보다 읽기가 수월하고 현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기도 하다. 물론 홉스봄의 역사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위대한 역사학자의 현실인식을 들여다보는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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