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힘 - 역사의식, 기억과 상상력
하비 케이 지음, 오인영 옮김 / 삼인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하에서 친일 행위를 했던 인사들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조상이 인명사전에 올라간 사람들은 연구소가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주장했다. 사전 발간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역사는 결코 현재의 관점에서 재단해서는 안 되며, 특히 친일과 반일의 영역이 간단히 나누어지지 않는 일제하에 있어 그 행위를 친일의 관점에서만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이미 사전의 발간은 이렇게 학술적인 의미를 넘어서 현실의 정치, 사회적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역사는 현재적 관점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전 발간과 더불어 뉴 라이트 진영의 학자들이 공동 발간한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는 역사가 현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현실에서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참고할 만하다. 그들은 한국의 근·현대사 교육이 편향되고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고, 그것이 현실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현실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각을 가진 근 현대사 교과서가 필요하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교육이 그저 과거의 일을 알게 하는 목적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가지는 정체성, 즉 기억과 상상을 좌지우지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해준다.

하비케이의 이 책은 과거에 대한 인식이 과연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미국과 영국의 사례를 통해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는 먼저 미국과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학의 위기에 대해서 서술한다. 역사학의 위기는 그저 학문분과가 축소된 현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의 위기에는 광범위한 사회, 경제, 정치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은 戰後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회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았다. 위기는 오히려 전쟁이 끝난 한참 후인 1960~70년대에 찾아오게 된다. 영국은 경제성장이 저하되고 정부에 대한 불안이 증폭된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는 실업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고, 결국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베트남전에서는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대통령은 부패스캔들에 의해 사임하고, 미국을 지탱하던 지정학적 헤게모니도 그 힘을 유지하지 못했다. 총체적인 위기와 더불어 그동안 물질문명의 진보에 대한 욕구 아래에서 잠재되어 있던 각종 시민권 투쟁과 인종 간의 평등을 위한 투쟁, 그리고 학생운동과 반전운동 등의 사회의 요구도 분출한다. 노동자, 여성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고, 직접적인 시위도 빈번하게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위기로 인해 영국과 미국은 그동안 유지해오던 사회경제적 합의가 깨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역사학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위기의 결과로서 찾아오게 된 것이다. 사회적 지배서사(progress)의 붕괴는 역사교육의 전개 양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역사교육에 있어서 형식, 내용에 대한 자신감은 사라져버렸다. 대중들은 역사가 더 이상 현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즉 현재는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과거는 철저히 기억하고 반성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서 존재하게 된다.

저자는 역사학의 위기와 함께 역설적이게도 역사를 이용한 ‘유산산업(Heritage industry)’은 크게 성행했다고 지적한다. 즉, ‘좋았던 시절’을 이용한 산업이, 과거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가 기반이 된 역사인식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물관은 과거의 유물을 모아두는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스러운 유물 또는 비판적인 유물을 제거함으로써 현 체제를 정당화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표현물에는 사회적·계급적 적대감과 갈등은 빠져있고, 또 일어났던 바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대안적인 정치적·경제적 가능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여기서 저자는 이러한 움직임이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장악’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람시는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시민사회의 다양한 기구들을 통해 그들의 세계관과 언어를 피지배계급에게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시민사회는 “국가나 정치사회와는 대비되는 개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유산산업은 헤게모니 투쟁의 장인 시민사회 영역에 있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지배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 또한 바로 이 지점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의 저자들이 현실정치 영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지배집단이 이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역사 교과서가 헤게모니 투쟁의 무기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헤게모니 투쟁은 과연 누구에 의해 주도되는 것인가. 그람시는 자신의 책『옥중수고』에서 헤게모니 투쟁을 통한 혁명의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전통적 지식인과 대립되는 유기적(organic) 지식인의 존재를 들었다. 전통적 지식인이 자신의 지식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고 행동하지만, 결국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봉사하는 자를 의미한다면, 유기적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철저히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해 사용하는 자를 의미한다. 저자는 유산산업과 함께 이러한 유기적 지식인은 위기에 빠진 역사학을 영국과 미국의 새로운 지배계급, 즉 신 우익(대처와 레이건)이 오·남용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자본의 궁극적인 이해관계 관철을 위해 노력한다.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서구 민주주의가 역사의 종언이라고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새뮤얼 헌팅턴 등이 바로 지배계급을 위한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배계급을 위한 유기적 지식인들의 활약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안 교과서의 저자들, 자유경쟁에 의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지배계급 정치인들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유기적 지식인들의 활동과 그것의 결과인 장기적 헤게모니의 획득을 통해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영국과 미국의 신 우익은 결국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지배계급은 필연적으로 피지배계급에 비해 절대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본과 좀 더 친근한 사회집단들에게 상호이익을 제공해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 역사의 영역에 있어서 대처는 위대한 빅토리아를 만들어 낸다. 레이건은 미국의 위대한 과거를 만들어 낸다. 즉 그들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이 현실에서 만들어내고자 하는 가치의 원천을 역사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특히 미국의 ‘역사 되찾기 보고서’는 신 우익이 바라는 역사가 어떤 것인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사회사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제거되고, 상대주의적인 관점에 대해서는 비판이 가해진다. 이러한 역사 만들기의 결과는 정치, 사회 등 公의 영역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친다. 대중들의 공적인 영역에 대한 탈정치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가고, 과거의 혁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 주년 기념식에서 혁명의 의미는 이제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기억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논거를 들어 역사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영역의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오·남용 될 수 있는 고도의 정치성을 담보하는 영역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편다. 즉 역사는 그람시가 이야기 했던 헤게모니 투쟁의 진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치적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역사에서 지배계급이 삭제해버린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되찾아 가는 것은 지배계급과의 헤게모니 투쟁에서 중요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역사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현실에서 역사의 힘을 인식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통한 헤게모니 투쟁에서 결국 어떠한 방법으로 지배계급의 역사 오·남용을 막아낼 수 있다는 주장은 비판적으로 읽어 볼 수 있다. - 하지만 이것이 지배계급의 오·남용을 어쩔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과의 역사 헤게모니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고,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과거의 피지배계급이 헤게모니 장악을 통해 지배계급이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헤게모니 투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즉 저자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 투쟁은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객관성(여기서 객관성이란 엄격한 근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을 겸비한 과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역사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교양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따라서 역사가와 역사가의 작업은 현재를 이해하고 고찰하기 위해서 ‘과거의 힘’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지배계급과의 헤게모니 투쟁이 바로 비판적 역사인식을 갖추게 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사인식만을 거론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비판적 역사인식은 헤게모니 투쟁 과정에서 가장 활발하게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뉴 라이트 진영의 역사인식이 어떤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사람이 헤게모니 투쟁의 한 장면이었던 친일 인명사전 논란을 계기로 그들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사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판적 역사인식은 헤게모니 투쟁의 수단이자 결과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과거의 힘’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몇 가지를 제안한다. 먼저 현재 존재하는 사물이 과거에는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미래에도 항상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둘째, 세계를 탈신비화 하고 그 정체를 폭로하는 비판적 의식이다. 셋째, 아래로부터의 투쟁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의식이다. 넷째, 비록과거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야 말로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서 끌어내야 하는 결론들의 원전이라는 기억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의식은 사람들이 변혁의 가능성과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가능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상상력이다. 요악하자면 역사는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며, 그러한 변화는 변혁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상상력을 통해 아래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다시 저자가 사용한 예에 적용해 본다면 저자가 신 우익의 역사 오·남용으로 지적했던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식의 일화 등은 바로 역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변화가 아래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아래’라는 의미가 각 시대에서 경제, 사회적으로 지배계급에 대비되는 일반 민중을 의미한다면, 그들의 행동과 삶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역사적 변화를 이끌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민중들의 삶은 아날학파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회적인 구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사건의 영역에서의 역사가 바뀌더라도 그들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의미를 이것보다는 폭넓게, 즉 적극적으로 지배계급과 다른 헤게모니를 갖는 계급과 그들을 위한 유기적 지식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저자는 바로 역사 변화의 원동력을 계속되는 그들의 헤게모니 투쟁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역사의 변화가 그러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아래로부터의 힘이 역사의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것에 너무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경우, 역사의 발전을 거부하는 ‘아래로부터의 반동’이라는 현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될 가능성이 남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찬미하는 역사라는 비판이 가능한 것이다. 미국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에릭 포너는 자신의 저서『WHO OWNS HISTORY?』에서 니체가 제기한 역사에 대한 3가지 비판을 언급한다. 그것은 기념비적, 골동품적, 비판적 방법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는 찬미하는 역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념비적, 골동품적인 역사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는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찬미하는 역사는 집단적 자긍심을 불어넣고 싶어 하는 소수집단 사이에서, 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키려는 애국자 사이에서 자못 대단한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 우익의 역사 만들기는 물론이지만 아래로부터의 힘을 강조하는 하비 케이의 입장 또한 위대한 역사를 찬미하는 ‘기념품적, 골동품적’ 역사접근에 해당한다고 비판해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역사, 특히 역사교육이 매우 정치적인 맥락을 갖는 헤게모니 투쟁의 과정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글을 서두에서 언급한 과거 청산의 문제는 그저 과거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미래의 상상을 위해서 반드시 논의해야 될 문제이며,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 되어 가느냐는 우리가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상상하는 가에 관한 문제이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은 “역사는 단순한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 본문에 인용된,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하이에크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견해와 정치적 소신은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항상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과거의 경험은 바람직한 정책이나 제도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 해주는 토대이며, 현재 우리의 정치적 견해는 필연적으로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영향을 주고 색깔을 입힌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역사에 대한 논쟁에서 핵심적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은 역사가의 정치를 바라보는 눈이며, 정치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