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을 하나 들면 삶과 행동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기록은 몇 만년 전의 석기시대를 재현할 수 있게 하며 몇 년 전의 사건을 상세히 조사할 수 있게 해준다. 기록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과거를 기억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기록은 의의를 가진다. 어떤 이에게 기록을 생산하는 것은 투쟁이며, 존재의 이유가 된다. 또 어떤 이의 기록은 비록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삶을 기록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있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기록도 시작되었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 인류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다. 그들에게 동굴벽화는 단순한 삶의 기록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삶의 기록인 동시에 삶 그 자체였으며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미를 담는 주술행위였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에게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를 기록할 수 있었다. 비로소 인류는 문자를 바탕으로 문명을 꽃 피울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록이 문자에 의존하고 있지만 모든 기록매체가 문자인 것은 아니다. 다양한 시대와 문명의 장례풍속 등은 문자 못지않게 인류의 과거를 상세히 알 수 있게 하는 훌륭한 기록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류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어떤 형태로든지 기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한반도에 존재했던 다양한 국가의 기록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선의 방대한 기록 관리체계는 중앙집권국가와 왕권강화라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왕의 행적을 거의 완벽히 재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 거대한 공사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기록 관리를 치밀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과거의 기록관리가 자신들의 삶을 보전하는데 힘썼다면 현대의 기록 관리는 민주주의라는 정치형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기록을 관리하는 의의도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록의 공개는 곧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며 반대로 기록의 비공개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 되는 것이다. 전자정부 등도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손쉽게 공공기관의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앞에 서술한 다양한 기록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현용기록을 중심으로 맞추어져 있는 기록관리 서적의 틀에서 벗어나서 선사시대의 벽화까지 시선을 확장한 것은 기록의 의미를 넓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여러 주제를 폭넓게 다룸으로써 기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여러 글을 포함시킨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양한 주제를 다룬 만큼 깊이가 없다는 것은 이 책의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6년전 출간되었다는 점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현대의 기록관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심각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글이 국가나 공공기관의 공식기록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