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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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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1Q84 등등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그의 작품을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었다. 궁금했지만 계속 다음으로 미루다가 “노르웨이의 숲” 이라는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했다. 예전 상실의 시대의 우중충 했던 표지와 제목과는 다르게 책 표지는 아름다웠고 제목은 상쾌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용은 오히려 ‘우중충’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실망 하진 않았다. 누구나 겪는 성장통을 굉장히 극단적으로 그려서 초반에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결국 작가는 ‘인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비정상적일만큼 뒤틀리고 불완전하다. 그리고 상처를 안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조금 극단적이긴 해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아직 겨우 20대 초반을 넘긴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고 아직도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히 이 세상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다시 말해서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와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언젠가는 극복한다는 점일 것이다. 나오코는 죽음으로서 그것을 극복했다면 와타나베는 삶으로서 그것을 극복한다. 어떤 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각자의 인생은 그렇게 그냥 강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다. 결국 잊히지 않을 것 같았던 상처들은 그 강물을 따라서 흘러가다 잊힌다. 오히려 와타나베는 그 상처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친구 기즈키를 잊으려 하지 않았고 나오코를 잊으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들을 잊는다. 그렇게 상처가 아물면서 와타나베는 성장한다. 그렇게 잊고 상처를 극복한다는 게 뭔가 씁쓸하면서도 다행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중간 중간에 자주 등장하는 정사장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야하거나 설레거나(?) 뭐 그런 느낌들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가 인물들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치루는 어떤 의식과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경건함을 느꼈다.

소설 속에 이러한 장면이 있다. 와타나베와 미도리가 백화점 옥상에서 비에 흠뻑 젖어 서로 안아주고는 미도리 집으로 같이 간다. 그러면서 미도리는 말한다. “우리 꼭 강을 헤엄쳐 건넌 것 같아” 라고. 굳이 고르자면 나는 이 말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 같다. 실제로 와타나베와 미도리는 시간의 강을 헤엄쳐 건너오면서 상처와 아픔을 극복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미도리는 와타나베를 통해,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통해 극복했으니 저 장면은 어쩌면 핵심이기도 하면서 복선이기도 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노르웨이 숲’을 가장 최고라고 한다. 그의 여러 작품 중 가장 먼저 최고의 것을 읽어서 굉장히 기쁘다. 이제 또 다른 그의 작품을 읽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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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 세계문학전집 싱글 에디션 1 세계문학전집 싱글 에디션 2
F. 스콧 피츠제럴드 저/한은경 역 / 민음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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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최근도 아니다. 2009년 영화로 벌써 4년이나 되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고 해서 영화도 나왔던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신기할 만큼 굉장히 짧은 단편소설이다.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짧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하지만 분량에 비해 내용은 꽤 심오하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일생이 거꾸로 흘러간다는 상상 자체가 매우 충격적이다. 사실 너무 짧은 분량이라 피츠제럴드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잡아내기가 힘들었다.

인생에 대한 조롱일까?

보편적인 인생방식이 진리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벤자민의 아버지가 그렇다. 처음에 70대 노인으로 태어난 아들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아기’처럼 대우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것에 집착한다. 그런데 그것은 벤자민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벤자민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역전되어 벤자민이 ‘아기’가 되어가는데 아들은 받아드리지 못한다. 이러한 그들의 꽉 막힌 모습은 심지어 우스꽝스럽고 한심해보이기 까지 한다. 피츠제럴드는 사회적인 틀에 갇힌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인생에 대한 허무주의가 아닐까?

우스게 농담으로 사람의 일생은 아기에서 시작되어 다시 아기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것은 농담같은 사실이다. 피츠제럴드는 이 사실을 나름대로 각색해서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벤자민 버튼은 ‘아기’로 태어나서 ‘아기’로 돌아간다. 두 ‘아기’의 개념이 다르긴하지만 어쨌든 사실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죽음과 탄생이 겹쳐지면서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이 소설은 그림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다. 아주 간단하지만 독자에게 강한 이미지를 남긴다. 조금은 난해하지만 매우 심도깊고 인상깊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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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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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월 개봉했던 영화 ‘안나 카레니나’ 를 보고 망설임 없이 책을 구매하였다. 그 정도로 영화는 매우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고 인상 깊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영화가 작품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고 또 소화해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로 ‘안나 카레니나’는 내용이 아주 심오하고 방대한 작품이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이유만으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한 세기가 넘도록 스테디셀러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고전' 이라고 말하는 작품들, 특히 그 중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작가의 작품은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공감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처음 ‘안나 카레니나’ 라는 영화와 소설을 접했을 때는 유부녀의 문란한 연애사와 그에 따른 윤리적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단순한 연애소설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전 권을 완독하고 난 이후 이 작품은 당대의 풍자와 비판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철학이 집약된 굉장한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그는 작품 속에서 레빈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빈을 통해 보여준 철학 사상 중 동양철학도 담겨있다는 것이다. 레빈이 농사일을 하는 장면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한창 일을 하는 동안, 그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까맣게 잊게 되고 갑자기 일이 쉬워지는 순간이 찾아들곤 했다. 바로 그 순간에는 그가 벤 줄이 치트가 벤 줄처럼 고르고 훌륭해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억해 내고 더 잘해 내려고 애쓰는 순간, 그는 노동의 힘겨움을 고스란히 느꼈고 줄도 비뚤비뚤해지고 말았다.”

이 부분은 중국 고대의 철학 개념인 ‘이아관물(以我觀物)’과 ‘이물관물(以物觀物)’을 떠올리게 한다. ‘이아관물(以我觀物)’이 유아지경의 상태로 자신의 잣대로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이물관물(以物觀物)’은 무아지경의 상태로 자연의 본성 그 자체를 이해하고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레빈은 농사일을 하면서 이 철학적 관념을 깨닫는다. 즉, 레빈은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지면 일이 쉽고 능률도 오르지만 유아지경의 상태에서는 노동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개념이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면서 레빈은 장자의 철학까지도 깨닫게 된다.

“레빈은 풀을 베면 벨수록 망각의 순간을 더욱더 자주 느끼게 되었다. 그럴 때는 손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낫 자체가 생명으로 충만한 그이 몸을,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그의 몸을 움직였으며, 그가 일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일이 저절로 시원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럴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구절에서 레빈은 무아지경의 상태로 낫과 하나가 되었다. 앞서 얘기했던 ‘이물관물(以物觀物)’의 상태로 레빈은 낫이라는 본성을 이해하고 그 관점에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행복하게 했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동양의 철학적 개념을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독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소설 속 인물들의 섬세한 부분까지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이 대단했다. 따라서 독자는 완전히 인물과 하나가 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안나에게 진심으로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소설을 접했을 때 안나라는 캐릭터는 이성적이지만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그러한 위선을 강조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설의 시작을 안나가 돌리를 위로하는 것으로 택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안나의 애인과 남편의 이름은 알렉세이로 똑같았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는 이러한 설정에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그러한 설정이 주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안나에 대한 나의 태도와 생각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그녀를 '평면적인 민폐 불륜녀'로만 묘사하지 않고 '입체적인 안나 카레니나' 로 묘사하고 있었다. 즉, 톨스토이는 안나를 안나답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안나는 불륜녀이기 이 전에 세료자의 '어머니'이고, 카레닌의 '아내'였고, 브론스키의 '연인'이며 스티바에게는 '동생'이고 돌리에게는 '친구'인 것이다. 톨스토이가 대단한 작가로 칭송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작가가 그녀의 이러한 입체적인 성격과 입지를 너무나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독자가 마치 그녀가 된 것처럼 그녀의 캐릭터에 빠져버리도록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무조건 안나를 미워하고 비난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안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여자다. 하지만 그녀는 다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녀가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아주 양심적인 여자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나 양심적이었기에 바람을 피웠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보통 사람들은 '양심적인 사람은 선량하며 착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안나는 그 공식을 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녀를 미워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이기 이전에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평범한 여자라는 것을 독자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능력은 안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에 적용된다. 그래서 독자는 읽으면서 한 인물에게 하나의 감정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인물에 대한 감정이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이 끝날 때 까지 제 3자의 시선을 꾸준히 유지할 수가 있다. 톨스토이가 이처럼 독자의 관점을 의도적으로 객관화 시켰던 것은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이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심지어 중국 고대 철학 사상을 레빈을 통해 은연중에 보여줌으로써 주제를 풀기위한 하나의 실마리도 제공한다. 소설은 안나의 죽음과 그 이후의 레빈의 독백을 통해서 그 주제에 대해 독자가 직접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인가.

그런데 그 와중에 깨달은 점은 가장 대조적인 삶이라 느껴졌던 안나와 레빈은 사실 공통점이 많다는 것이다. 레빈이 그랬듯이 안나도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데 집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스티바 때문에 상처받은 시누이 돌리를 진심으로 위로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가정을 버렸고 아들 세료자를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브론스키를 사랑하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스티바는 인생을 굉장히 쉽고 단순하게 살아간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삶에 선과 악을 부여하지 않고 심지어 동생 안나가 자살 한 이후에도 큰 동요없이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해 보이는 한편 주어진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지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소설의 후반에 레빈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잠정적 결론이 스티바의 삶과 어떤 부분에서는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레빈의 이러한 고민은 너무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라 이해하기 어려웠다. 레빈의 삶에 대한 고민은 의무와 소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신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확장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 즉, 신의 진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과 인간은 주어진 삶을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삶이 옳고 그른지는 결국 신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약간은 모호한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결국 안나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그 누구도 감히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안나와 레빈이 이와 같이 삶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나 둘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레빈은 삶의 옳고 그름을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반면 안나는 자신의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그러한 원인을 브론스키에게서 찾는다. 그녀는 브론스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가 죽음에 대한 의지를 보이는 장면에서 문득 알렝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보았던 글이 떠올랐다.

클로이와의 이별에 대한 아픔과 배신으로 ‘나’는 클로이를 복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살을 결심한다. 그 방법만이 자신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클로이에게 증명하고 그녀를 후회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수면제를 가득 먹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때 ‘나’는 불현듯 죽음은 상대방이 후회하는 모습을 지켜 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깨닫는다. 즉, 슬퍼하기를 바랐던 이가 슬퍼하는지 조차 알 수 없다면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이다.

안나는 브론스키가 자신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상상하면서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 뿐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가 없고 따라서 그녀의 궁극적인 소망이 실현될 수가 없다. 결국 복수를 통해 상대방이 슬퍼하고 후회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나는 죽기 직전에야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죽고 난 후 브론스키가 고통스러운 후회와 슬픔에 빠질 것이라 생각했던 안나의 상상과는 달리 브론스키는 그녀의 불행하고 추악했던 모습만 기억하며 고통스러워 할 뿐이었다. 결국 그녀의 복수는 처참히 실패한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비극적 결말은 독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8부는 완결성이 결여됐다하여 당대에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8부를 자비로 출간할 만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앞서 레빈이 내렸던 결론이자 주제인 ‘끊임없이 자연스레 흘러갈 뿐인 삶’ 을 소설의 미완결적 구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한편 그는 삶에 대한 고민이라는 큰 틀 내에서 결혼, 민중, 교육, 여성 등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했던 것을 소설을 통해 담기도 했다. 비록 톨스토이의 결론이 조금 허무할 만큼 피상적이라 할지라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제기될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가상적인 상황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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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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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이지만 굉장히 미국적인 소설이다.

처음에는 번역의 문제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뒤에 글을 읽어보니 피츠제럴드의 텍스트에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전의 작가들이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글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글이 굉장히 산만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었고 또 지금 읽고 있는 톨스토이의 글이 굉장히 정리되고 이해하기 쉬웠던데 비해 위대한 개츠비는 톨스토이의 소설보다 쉬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빨리 입력되지 않아서 앞뒤를 왔다갔다 하며 읽었다.

어쩌면 허무할지도 모를 꿈을 좇는 개츠비의 모습이 현대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꿈을 좇을 때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행복을 느까는걸까? 그 꿈이 실현이 되고나면 어쩌줄 몰라 갈피를 못잡고 또다른 꿈을 찾아 좇을 수 밖에 없는게 인간일까? 영원히 꿈을 꾸는게 인간이라면 작은꿈을 꾸면서 하나씩 하나씩 이루는게 좋을까? 큰 꿈을 꾸면서 그 큰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 달려나가는게 좋을까? 모르겠다. 그냥 여러가지 생각들이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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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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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내 이름은 김삼순 이라는 드라마에서 재조명을 받았던 모모는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게 되다가 드디어 완독했다. 청소년들을 위한 동화 같은 소설이지만 사실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모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1970년에 출판된 책이라는 것이다. 대략 40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회색신사들의 천국이다. 분명히 과거에나 지금에나 개인에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은 변함이 없는데 왜 이리도 시간이 부족할까? 심지어 요즘 사람들은 잠자는 시간조차도 아까워한다. 이렇게 아껴진 시간이 물질적 풍요로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는 허전함을 느낀다. 더 빨리, 더 빨리 쉴 새 없이 외쳐대는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가는지 생각할 틈 따위는 없다. 시간은 한없이 부족한데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있다. 그런데 할 일이라는 그 일이 정작 ’누구‘를 위해,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 체 강박적으로 일에 대해 생각한다. 마치 마을 사람들이 회색신사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처럼 말이다.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 신사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시간이 없어지면 그냥 무(無)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영화 메트릭스의 악당 스미스 요원도 무(無) 라는 것이다. 회색신사나 스미스 요원들은 존재하는 어떤 개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이다. 그 허상은 불안, 공포, 불신 등과 같은 감정이다. 감정은 일시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 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일시적인 이러한 감정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왜 그런 걸까? 정말 회색신사가 존재해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때문일까?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이러한 허상은 한 개인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생기는 개인들의 이기심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분위기 같은 것이라고. 분위기는 말 그대로 현상이고 어떤 계기에 따라 사라질 수도 있다. 즉, 여러 사람들의 감정이 모여 현상이 된 것이다. 혜민스님도 말씀하셨다. 감정은 계속 변화한다고. 시간을 두고 바라보면 사라진다고 하셨다. 결국 개개인이 시간적 여유를 두고 스스로를 바라보면 그러한 감정이 줄어들 테고 이러한 사회적 병리 현상도 사라지지 않을까? 이것은 모모가 회색신사들에게서 다시 개인의 시간들을 찾아 돌려주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찾으면서 여유를 찾는다.

내가 여러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스테디셀러의 작가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통찰력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흥미롭고 쉬운 내용으로 세상을 이야기해준다. 혜민스님, 알렝 드 보통, 미하엘 엔데가 그랬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작가 톨스토이도 그렇다.

모모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회색신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사람들은 다시 여유로워진다. 여유로워진 사람들은 이제 자기 주변의 남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는 콧방귀 뀌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다 그래봤자 이상일 뿐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잖아. 모모처럼 살다가 딱 굶어죽기 십상이지.” 하고.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놓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곧바로 온 세상이 해피엔딩이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 허상에 집착한 나머지 실존하는 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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