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 내 이름은 김삼순 이라는 드라마에서 재조명을 받았던 모모는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게 되다가 드디어 완독했다. 청소년들을 위한 동화 같은 소설이지만 사실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모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1970년에 출판된 책이라는 것이다. 대략 40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회색신사들의 천국이다. 분명히 과거에나 지금에나 개인에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은 변함이 없는데 왜 이리도 시간이 부족할까? 심지어 요즘 사람들은 잠자는 시간조차도 아까워한다. 이렇게 아껴진 시간이 물질적 풍요로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는 허전함을 느낀다. 더 빨리, 더 빨리 쉴 새 없이 외쳐대는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가는지 생각할 틈 따위는 없다. 시간은 한없이 부족한데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있다. 그런데 할 일이라는 그 일이 정작 ’누구‘를 위해,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 체 강박적으로 일에 대해 생각한다. 마치 마을 사람들이 회색신사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처럼 말이다.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 신사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시간이 없어지면 그냥 무(無)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영화 메트릭스의 악당 스미스 요원도 무(無) 라는 것이다. 회색신사나 스미스 요원들은 존재하는 어떤 개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이다. 그 허상은 불안, 공포, 불신 등과 같은 감정이다. 감정은 일시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 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일시적인 이러한 감정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왜 그런 걸까? 정말 회색신사가 존재해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때문일까?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이러한 허상은 한 개인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생기는 개인들의 이기심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분위기 같은 것이라고. 분위기는 말 그대로 현상이고 어떤 계기에 따라 사라질 수도 있다. 즉, 여러 사람들의 감정이 모여 현상이 된 것이다. 혜민스님도 말씀하셨다. 감정은 계속 변화한다고. 시간을 두고 바라보면 사라진다고 하셨다. 결국 개개인이 시간적 여유를 두고 스스로를 바라보면 그러한 감정이 줄어들 테고 이러한 사회적 병리 현상도 사라지지 않을까? 이것은 모모가 회색신사들에게서 다시 개인의 시간들을 찾아 돌려주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찾으면서 여유를 찾는다.

내가 여러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스테디셀러의 작가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통찰력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흥미롭고 쉬운 내용으로 세상을 이야기해준다. 혜민스님, 알렝 드 보통, 미하엘 엔데가 그랬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작가 톨스토이도 그렇다.

모모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회색신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사람들은 다시 여유로워진다. 여유로워진 사람들은 이제 자기 주변의 남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는 콧방귀 뀌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다 그래봤자 이상일 뿐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잖아. 모모처럼 살다가 딱 굶어죽기 십상이지.” 하고.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놓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곧바로 온 세상이 해피엔딩이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 허상에 집착한 나머지 실존하는 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