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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고문 고시원: 괜찮아, 곧 지나갈거야> 

 

고시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반으로 접어야 한다.
색종이를 접듯이 네 귀퉁이를 똑바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저 인간의 존엄이나 고귀함 같은 단어들은 주머니에 쑤셔 넣고, 편리와 실용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럭저럭 잘 접었다 하겠다.
접거나 포기해야 할 것들은 자존심만이 아니다. 한 평 남짓한 직사각형 공간에서 살아가려면 허리와 오금 또한 접을 필요가 있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네안데르탈인을 연상하면 쉬울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던 누군가의 콧구멍처럼 깊고 컴컴하던 동굴은 어쩌면 고시원의 원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춘기 소녀의 여린 마음만큼 얇고 예민한 벽은 칸과 칸을 나눈다는 시각적인 효과가 있을 뿐 방음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리하여 ‘고시원 인(人)’들은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에서 발생하는 생활 소음을 반으로 줄이는 연습을, 원하건 원하지 않건 하게 된다. 괄약근을 조절하여 방귀를 분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소리를 완벽하게 제거한 재채기를 연발할 수 있게 된다. 김치가 떨어졌다거나 속옷을 도둑맞았다거나 하여 울음이라도 터트릴 일이 생기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을 한껏 참은 뒤, 이렇게 중얼거려야 한다.
괜찮아, 곧 지나갈 거야.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여를 달린 뒤, 마을버스로 갈아타 다시 십오 분 정도를 더 가면 작고 낡은 동네가 나온다. 도심의 외곽,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처럼 중심에서 빗겨나 있는 그곳은 번듯한 동네 이름 대신 종종 ‘변두리’로 불렸다.
변두리의 나른한 시장 통을 지나 굽이진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상점 여러 개가 마주보고 늘어선 상가가 있다. 철물점부터 시작해 세탁소, 국밥집, 양품점, 제과점, 약국 등 상가에 입점한 가게들은 손님을 보는 일보다 서로의 얼굴을 보는 일이 더 많다. 물론 상가에도 일 년 삼백육십오일 손님으로 붐비던 때가 있었다. 대형 마트가 생겨나기 전의 일이었다.
지하철 역 근처에 들어선 대형 마트는 무시무시한 육식 공룡이었다. 커다란 입에다 손님을 쓸어 담는 것까지 모자라 역에서 얼마쯤 떨어진 ‘변두리’까지 광고 전단을 돌렸다. 변두리의 재래시장과 상가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전단을 발견하는 족족 찢어버리거나 마트 화장실에 들어가 아무렇게나 똥오줌을 싸지르는 소심한 복수를 할 뿐이었다. 

 

고문 고시원은 바로 그 상가 입구, ‘소망 슈퍼’와 ‘할머니 국밥’이 자리한 건물 이층부터 사층까지를 쓰고 있다.
건물은 ‘코끼리 빌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이름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회색 콘크리트로 지어진 낡은 건물은 늙고 병든 코끼리가 엎드린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코끼리 빌라에 고문 고시원이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일이다. 그때는 코끼리 빌라도 제법 쌩쌩한 모습이었고, 변두리이긴 했으나 동네에도 사람의 왕래가 꽤 많았다. 재래시장도 호황이었다.
“병신 같은 것들만 빌빌 싸는 거야. 나처럼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빛을 발하는 거지. 아엠에프? 웃기지 말라고 그래. 조금만 기다려 봐. 대박이 날 거니까.”
고문 고시원의 초대 사장이자 원장이자 총무였던 양반은 성긴 이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자로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찍이 변두리 바닥에 스티커 사진 전문점을 들여와 대박을 쳤던 그는 IMF가 터진 후 가진 재산을 몽땅 털어서 고시원을 차렸다.
“이런 쪽방에 누가 와서 살아요?”
모기가 길을 잃을 듯 어지럽게 얽힌 파마를 자랑했던 그의 아내는 생전 처음 보는 고시원 모습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말았다.
“시내 쪽에 가 봐. 방이 없어서 줄을 선다니까. 망할 놈의 아엠에프 때문에 길에 나앉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어? 집도 절도 없는 그 인간들이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바로 여기란 말이야.”
과연 그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고문 고시원은 탄생과 동시에 인기를 끌었다. 시내보다 삼만 원 싼 방값도 인기의 한 원인이었다. 그의 아내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남편과 함께 고시원을 관리하는 게 귀찮긴 했지만 원장 사모님 소리를 듣는 건 퍽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짧지만 굵은, 고문 고시원의 황금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그때는 고시원의 이름이 ‘고문’이 아니었다. 그와 아내가 삼박 사일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지은, ‘공문 고시원’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있었다.
공부의 문이라는 뜻인 ‘공문’이 ‘고문’이 되기까지는 오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오년 동안 세월이 쌓이듯, 페인트가 벗겨지듯, 동네가 쇠락하듯, 침대가 삐걱대듯, 고시원의 빈 방이 늘어가듯 여러 일이 있었다.
그리고 2002년 9월, 태풍 루사가 미친년 머리카락처럼 불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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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키 1 - 스티븐 킹 장편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8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무섭다

어린 시절, 전설의 고향만 봐도 오금이 저려 쩔쩔매던 그 시절엔 왜 그토록 귀신 이야기가 좋았던 걸까요? 화장실 가기가 두려워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를 걸 알면서도, 뒤숭숭한 꿈에 잠을 설칠 걸 뻔히 알면서도 여름밤만 되면 할머니 앞에서 귀신 이야기 타령을 했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요.

 

그때 들었던 귀신 이야기는 하얗게 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단지 오슬오슬 소름 돋던 그때의 긴장감만이 아련하게 남아있지요.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이야기 내용 때문에 무서웠던 건 아니었나 봅니다. 어둑한 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소리, 할머니의 낮은 음성처럼 심장을 옥죄는 분위기가 무서움의 근원이었지요.  

스티븐 킹의 신작 <듀마 키>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가 일품입니다. 공포의 근원은 ‘분위기’입니다. 그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귀신 이야기처럼 공포를 유발하는 각종 장치들이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펄쩍펄쩍 널을 뛰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스티븐 킹의 장기야 말로 분위기로 이어가는 공포 소설이죠. 초능력을 쓰는 왕따 소녀 이야기나, 어린 시절의 악몽에 시달리는 친구들 이야기, 그리고 점점 미쳐가는 가장의 이야기 모두 공포 소설이라고 하기엔 밋밋한 소재에서 출발해 종국에는 압도적인 공포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물론 킹의 이야기 중에도 좀 더 직접적인 공포, 예를 들면 사지를 절단하고 괴물이 등장해서 우걱우걱 사람을 먹어치우는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만 탁월한 묘사를 통해 획득하는 끈적끈적한 공포야말로 그를 호러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이유이지요. 그리고 이 책 <듀마 키>는 파도가 자갈을 건드리는 소리에서, 무성하게 자란 풀숲에서 불쑥불쑥 공포를 던집니다. 씨줄과 날줄로 탄탄하게 짠 탈출구 없는 진짜 공포를요.

 

에드거 프리맨틀. 한 때는 잘나가는 건축업자였으나 끔찍한 사고를 당한 후 오른팔을 잃어버린 지금은 인생의 패배자일 뿐입니다. 그의 오른팔과 함께 아내도, 지위도, 명예도, 그리고 삶의 의욕도 모두 사라져버린 프리맨틀은 듀마 키라는 섬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섬에서 새로운 인생을 발견합니다. 바로 화가로서의 인생이죠. 하지만 살벌할 정도로 빛나는 그림 그리는 재능은 어쩐지 불안해 보입니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프리맨틀은 자신의 재능과 듀마 키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 나갑니다.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비밀을…….

<듀마 키>가 던지는 공포의 근간은 1권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비중이 높은 프리맨틀의 삶과 듀마 키에 대한 묘사입니다. 스티븐 킹은 공포라는 불꽃을 피우기 위해 일견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들로 차곡차곡 제단을 쌓습니다. 사고를 당한 후 서서히 무너져가는 프리맨틀의 모습, 가족들과의 관계, 와이어먼과 나누는 우정,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그림 그리는 모습 등은 2권에서부터 시작되는 섬뜩한 공포를 위한 포석입니다. 장담하건데 1권을 꼼꼼히 읽을수록 마지막에 맞이하는 공포는 더욱 극대화 될 것입니다.

<듀마 키>를 읽는 내내, 어린 시절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자꾸만 등 뒤를 살펴야 했습니다. 어느새 검은 그림자 하나가 쑥 다가와 나를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파도가 철썩이며 죽은 자들이 걸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스티븐 킹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항상 악몽에 시달리건 만, 이상하게도 그의 신작만 나오면 열렬한 독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 참,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아니, 프리맨틀아 자기 오른팔 긁는 소리입니다. 물론, 잘린 오른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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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자, 당신은 지금 태평양을 지나고 있다. 시원한 바람, 부드러운 햇살, 더위를 식혀주는 적당한 비, 배를 따라 헤엄치는 돌고래. 하지만 낭만적인 풍경은 여기서 끝이다. 당신이 탄 배는 그만 가라앉고 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발 때문이다. 컴컴한 밤, 검게 넘실거리는 파도, 싸늘한 공기. 불과 몇 시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다. 다행히 당신에게는 오렌지색 구명조끼가 입혀졌고 너무나도 다행히 구명보트를 타게 된다. 가족들은 모두 잃었다. 구명보트에는 오직 당신뿐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구명보트에는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 마리가 타고 있다. 이런! 자세히 보니 얼룩말뿐만이 아니다. 검은 털이 무성한 오랑우탄도 한 마리 타고 있다. 당신은 애써 자위한다. 얼룩말과 오랑우탄 정도라면 말동무도 되고 비상시에는 식량이 되어 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저쪽 구석에 다른 놈이 더 있다! 머리가 벗겨진 하이에나다. 놈이 노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다. 두려움에 떨새도 없이 이번에는 구명보트 밑에서 우렁찬 포효소리가 들린다. 이런 젠장 맞을! 200킬로그램은 족히 넘어 보일 듯한 크기, 아름다운 줄무늬,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바로 벵골 호랑이다! 이제 당신은 이 모든 녀석들과 함께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해야 한다. 배 주위에서 헤엄치는 상어는 덤이다. 어떤가? 가슴 뛰고 흥미진진하지 않는가!

이 최악의 상황에 부딪친 주인공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16세의 인도소년이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줄여서 스스로를 ‘파이’라고 부른 덕에 이 이야기의 제목은 『파이 이야기』가 되었다. 『파이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의 외양 속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있다. ‘파이’의 표류가 주된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얀 마텔’은 제1부에서 ‘파이’의 종교생활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며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두를 믿는 ‘파이’의 태도는 희망과 긍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희망’과 ‘긍정’이 ‘파이’가 기나 긴 표류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사실, 즉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사실이 ‘파이’의 표류가 기록된 제2부에서 잘 표현된다. 물론 『파이 이야기』는 모험소설로서의 미덕도 잘 갖추고 있다. 생동감 넘치는 문장과 재치 있는 묘사들은 물론이고 흥미로운 장면들이 가득하다. 특히 벵골 호랑이와 상어와의 싸움이나 ‘식충섬’에 대한 부분은 압권이다. ‘파이’의 실명, 어쩔 수 없는 살생 등 가슴 아프고 등골 서늘한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우리들의 삶은 끝없이 표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표류의 중간에 우리들은 얼룩말이나 오랑우탄이라는 짐을 짊어져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그 짐이 하이에나로 바뀌기도 하고 가끔은 벵골 호랑이라는 무겁고도 거대한 짐이 될 때도 있다. 그 짐의 무게에 짓눌리는 순간 우리들의 표류는 끝나 버리고 망망대해에 가라앉게 된다. 『파이 이야기』는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파이’는 ‘리처드파크(벵골 호랑이의 이름이다.)’를 배에서 몰아내려고만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리처드파크’와의 공존을 선택한다. 그 공존에의 선택 속에 언젠가는 이 표류가 끝나리란 희망의 빛이 서려있다. 짐(벵골 호랑이)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파이’의 표류는 한결 편해진다. ‘파이’와 ‘리처드파크’가 교감하고 이해하는 장면들은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 된다.

우리의 삶도 비슷하다. 내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짐을 인정하고 기꺼워 할 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괴로움의 대상도 미움과 증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리처드파크’가 ‘파이’의 활력소가 되어주고 표류를 마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감당하기 힘든 짐도 때론 살아가는 이유가 될 때가 있다.

『파이 이야기』에는 가장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파이’가 ‘리처드파크’와 공존하기로 마음먹은 후 한 말이다.

“마음 한 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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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모두가 하루키를 읽을 때, 나는 김훈을 만났다. 유독 눈이 많이 내렸던 2000년 겨울이었다.
그해 여름에 찾아온 사랑이 그랬듯이 김훈의 문장은 낯설고 생경했다. 단단하게 여문 견과류처럼 김훈의 문장은 씹기 어려웠고 삼키기는 더 어려웠다. 부드럽게 자판을 두드리면 매끄럽고 보드라운 문장이 완성되는 시대에 몽당연필로 눌러 쓴 문장들은 투박하게만 보였다. 대신에 김훈의 문장은 인생에 대해 농담하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 섣부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값싼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연애의 한 가운데서 김훈의 글을 읽었다. 어떤 날은 사랑하는 이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충동에 휩싸여 김훈의 글을 읽어주기도 했다. 이런 문장들이었다.

 

 

 - 낭가 파르바트를 동행 없이 혼자서 오르는 과묵한 등반가들이 눈 속에 박힌 새의 시체를 눈물겨워하는 것은 그 유선형의 주검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되 만년설에 묻힌 날개의 꿈은 그 떠도는 종족의 운명 속에서 부활하는 것이어서 모든 새들은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다. - <자전거 여행 중에서>

 

 

 

훗날에야 그 충동이 보고픔의 다른 표현임을, 그리움의 소리 없는 아우성임을 알았지만 당시에 나는 전화 통화만으로도 가슴이 헐거워지는 청춘, 이십대였다. 시베리아 기단이 흩뿌리고 간 그해의 무수한 눈송이들처럼 빛나고 시린 사랑을 했고, 명예로운 훈장이라도 되는 양 도서관 구석에서 찾은 김훈의 책들을 한쪽 옆구리에 잔뜩 끼고 다녔다. 유치했기에 아름다웠던, 더없이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7년, 길지도 않고 딱히 짧지도 않은 그 세월동안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었으며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이십대의 초입에서보다 고민이 한 두 가지쯤 늘었으며, 배가 약간 나왔고, 아부라는 걸 터득했다. 경제경영 실용서적 코너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많아졌고, 재테크에 부쩍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어느 날 아침,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남한산성>이라는 제목보다 ‘김훈 장편소설’이라는 글귀가 더 눈에 들어오는 연분홍빛의 예쁜 책이었다. 표지를 넘기니, 근엄하기 짝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김훈의 사진 옆으로 아내가 쓴 메모하나가 딸려 나왔다.

“여보. 김훈씨가 새 소설을 쓰셨나봐. 우리가 연애하던 시절에 당신이 김훈이 쓴 글이라며 자주 읽어줬잖아. 솔직히 그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당신이 읽어 주는 게 좋아서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꼭꼭 씹어 먹어야 제 맛을 느끼는 멸치볶음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글귀들이 생각나더라. 좋더라고. 김훈씨의 그 문장도, 그리고 당신도. 바쁘고 힘들겠지만 김훈씨 책 읽으면서 잠시 옛날로 돌아가서 쉬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다 읽으면 꼭 나한테도 읽어주기! 알았지?”

오래 사귀다 결혼한 아내는 김훈의 문장만큼이나 좋은 여자였다. 나는 오래 잡고 있으면 손  끝에 물이 들것만 같은 그 예쁜 책을, 그 옛날의 언제처럼 옆구리에 끼고 출근길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책을 펼쳐 들었고, 이내 포화와 피비린내 대신 인간의 살 냄새가 진동하는 병자년 겨울의 남한산성으로 빠져들었다.

1936년 겨울,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 공허한 말들 속에서 인조는, 일찍 와서 오래 머문 그해의 겨울처럼 밀려오는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에 숨었다. 작전 상 후퇴도 아니었고, 어둠속에서 도사리며 이빨을 가는 들짐승의 잠복도 아니었다. 어찌할 수 없는 도망, 도피, 틀어박힘이었다. 그것은 남루한 민초들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이었다. 코를 땅에 처박고 옹송그리는 누더기 같은 백성들의 삶은, 그러나 살아있기에 또 아름다운 치욕의 나날들. 인조의 어가행렬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던 그날, 임금은 민초와 같아졌고, 그리하여 그는 하루를 견디는 것만큼 치욕을 쌓아가는 ‘백성’이 되었다. 개개인의 삶이 그렇듯이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이었고, 임금도 그러하였으며, 척화와 주화를 외치는 신하들 또한 그러하였으며, 백성들 역시 고립무원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임금이 청의 칸에게 머리를 찧으며 치욕을 당하기까지의 47일간의 기록은 아름답다. 날카롭게 아름답다. 삶을 견디는 자들의 냄새로 치가 떨리게 아름답다. 김훈은, 그 아름다움을 명징한 문장으로 도려내어 훤하게 벌려 놓는다. 그 속살은 겉표지의 연분홍만큼이나 예쁘다. 그래서일까, 눈물이 흐른 것은.

갇힌 성 안에서는 삶의 난장이 펼쳐진다. 말과 말이 겨루고 삶과 죽음이 교차된다. 임금 앞에 도열한 신하들은 말로써 전쟁을 견딘다. 병사들의 젖은 몸을 말리는 일을 두고도 지루하고 끝없는 공방을 일삼는 그들은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추위에 떠는 병사들과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처럼, 신하들은 불꽃 같이 날름거리는 혀와 빙벽처럼 높은 문장으로 전쟁을 치르고 삶을 살아 낸다. 그들에게는 논쟁이 곧 일이고 삶이다.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김훈의 시선 속에는 그들에 대한 판단이 없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두지 않는다. 오직 한 개인으로 고립무원의 삶을 살다 간 당대의 삶을 전시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김상헌에게도, 그리고 최명길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다. ‘버티면 버텨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김상헌과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 줄 것’이라고 외치는 최명길은 그 나름의 치열한 삶을 살아냈다. 나는 오히려 우유부단한 인조와 한낮 대장장이인 서날쇠, 그리고 조국을 배신한 정명수의 삶이 살가웠다. 잘린 발가락을 들고 상관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병사들과 날이 풀리자 봄나물을 캐는 민초의 노인들이 아련했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김훈은 그들에게조차 냉정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결국 김훈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일인칭이 아니면 도무지 쓰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김훈이 삼인칭으로 소설을 쓴 이유, 그것은 바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고통 받는 누구의 편이라도 들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결국, 김훈은 등장인물 모두의 편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학교 3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내가 일하던 곳 건너편은 혼잡한 사거리였다. 항상 노점들이 즐비해서 밤이면 소도시의 공허한 축제처럼 묘한 정취를 풍기기도 했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꼭 노점상 단속이 나왔다. 단속반들은 무자비했다. 부수고, 때리고, 그리고 빼앗았다. 노점상들은 그때마다 악다구니로 맞섰지만 언제나 별 소용없이 끝나버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바로 다음 날이면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상인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신나는 뽕짝을 틀어놓고, 예의 그 걸걸한 목소리로 물건을 팔아대는 것이었다. 그것은 삶의 진경이었다.

살아낼 수밖에 없는 삶. 낡고 비루해서 때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해버리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 나는 그 노점상들을 보며 열심히 일했고, 학비를 벌었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그들의 리어카에서 어묵을 사 먹거나 천 원짜리 꽃핀을 사서 애인에게 선물하는 것이 다였지만 그들은 내게 삶을 가르쳐 주었다.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혹자는 김훈의 <남한산성>을 들어 역사소설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실제의 역사를 다루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니. 그러나 <남한산성>을 단순히 역사소설로만 읽는다면 그것만한 오독이 없지 싶다. 김훈은 역사를 쓰기 위해 병자년의 남한산성을 펼쳐놓은 것이 아니다. 그 옛날, 처음으로 읽었던 김훈의 책 <자전거 여행>에서 나는 그가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여러 정취들을 표현하기 위해 연필을 든 것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버렸다. 그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사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민했던 내 청춘이 김훈의 글에 불나방처럼 반응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했었고, 그리하여 살아있다는 충만한 마음에 매일이 들떠 있을 때였다. 그렇기에 삶에 대해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김훈의 문장에 솔깃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한산성>도 ‘살아있는’ 혹은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말로써 존재를 증면하는 신하들이든, 청병의 칼 앞에 쓰러지는 졸병이든, 전쟁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백성이든 김훈의 문장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모두 아름답다. 김훈은 삶이라는 일련의 전쟁을 치르는 모든 개개인에게 헌사를 바친다. 요란스럽고 현란한 문구가 아닌, 담백하고 무뚝뚝한 문장으로 그들의 밭은 숨과 진한 살 냄새를 찬미한다. 그 속에서 역사는 조연이다. 병자호란은 단지 삶의 진경을 세밀하게 비추는 돋보기일 뿐, 그 어떤 전쟁과 전쟁의 소문도 김훈의 <남한산성>안에서는 중요하지도, 그리고 거창하지도 않다. 거창한 것은 다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는 것처럼 삶을 견디는 모든 생물들의 ‘삶’ 그 자체다.

나는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남한산성>을 읽었다. 화장실에서 똥을 눌 때도 읽었다. 다 읽는데 꼬박 3박 4일이 걸렸다. 오랜만에 맛보는 김훈의 글은 여전히 소화하기 힘들었지만, 생식을 한 뒤의 그것처럼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상쾌함이 밀려왔다. 우리나라가 겪은 치욕 앞에 우울한 마음으로 완독을 한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기본적으로 김훈이 희망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머리를 숙였으나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마치 부서진 리어카를 그러안고 다시 생업의 현장으로 당당하게 나타났던 그 노점상들처럼 조선의 민초들은 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자식들을 나았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삶이 계속되는 한, 적어도 희망을 가질 여지는 있는 것이다. 절망은 생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만 조우하는 것이므로.

책을 다 읽은 후 약속대로 아내에게도 읽어줬다. 이번에는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마지막 장을 읽던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아내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후에도 책의 마지막 몇 문장을 다시 읽곤 했다. 삶에 자신이 없을 때나 희망이 안개 덮인 산맥처럼 희미할 때.

- 백성들이 날마다 몇 명씩 성 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은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 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를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 <남한산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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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당신의 추천 도서는?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 제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하철을 탄다. 그 사각의 공간, 불이 환하다. 자리에 앉는다. 눈을 들면 마주볼 수밖에 없는 긴장의 공간 사이로 초점 잃은 눈들이 허공, 어느 한 점씩 세 들었다. 책을 꺼낸다. 무언가를 읽을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허공에서 시선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위안이다. 낡아빠진 위안들이 무가지라는 이름으로 선반 위에 걸려있다. 그것은 흡사 명태. 늙은 사내가 그것들을 걷는다, 말없이. 책을 본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제목 아래로 벌거벗은 몸에 지하철 노선을 새긴 남자가 가드를 올린다. 그이의 가드를 뚫고 책장을 넘긴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지하철이 달린다.

김하진. 덜컹덜컹, 덜컹덜컹, 뉴욕 지하철에서 깬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신용카드로 자신의 이름을 짐작할 뿐, 함께 들어 있던 사진 속 여자와 꼬마애가 가족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김하진, 말이 많다. 그는 책 속에서 뛰쳐나와, 마치 싸구려 외판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댄다. 악몽에 대해서 기억상실증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의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허나 그의 쉴 새 없는 주절거림이 어쩐지 슬프다. 그는 손에 승차권 하나를 쥐어준다. 뉴욕 지하철 승차권. 그는 또 말한다. 승차권을 받게 되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한 남자가 목수가 된 딱한 이야기를, 지상으로만 나가면 정신을 잃고 다치기에 지하에 갇혀 살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처량한 이야기를, 지하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내의 기막힌 이야기를, 그저 아들의 생일을 챙겨주고 싶었을 뿐인 아빠의 슬픈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곤 속삭인다. 어쩌면 이 이야기들은 지하철 1구간 표 값의 가치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선택은 자유라고. 누군가는 그 승차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받는다. 그리고 김하진은 승차권을 받은 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김하진이 들려주는, 아니 작가인 서진이 들려주는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는 종래 한국 문학에서 볼 수 없었던, 그가 등장시키는 빨간 모자를 쓴 난쟁이처럼 이질적인 이야기다. 다른 모든 이야기들이 종점에서 종점까지, 1구간의 단일 노선이었다면 서진의 이야기는 서너 번쯤 환승을 해야 하는 복잡하고 낯선, 그럼에도 흥미진진한 복합 노선이다. 잘 만들어진 노선표처럼 어지러운 환승을 도와주는 것은 서진이 빈번이 사용하는 ‘Fade In’과 ‘Rewind’ 등의 영화 용어들이다.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이 용어들은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풀어주고, 그리하여 독자들을 안전하게 최종 목적지까지 안내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서진의 이야기에는 종착역이 없다는 사실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독자들은 끊임없이 되돌리기를 해 다시 첫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 물론 서진이 자신의 소설에서 했던 절묘한 비유처럼 독자들은 덜 감긴 비디오테이프를 앞에 두고 ‘Rewind’ 버튼을 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는 기로에 설지도 모른다. 물론 선택인 개인의 몫이다. 그렇지만 서진의 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는 몇 번을 되돌려서 읽어도 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 소설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오버그라운드에 남아 있지 못한 모든 것들이 스며드는 언더그라운드처럼 악몽과 기억상실증, 희망과 절망, 유머와 공포, 냉소와 연민, 폭력과 희생, 도망과 죽음이 가득하다. 모든 요소들이 한겨레문학상의 심사위원들이 칭찬해 마지  않은 ‘박진감 있는 서사의 전개’속에 적절히 들어가 있다. 또한 이 모든 요소들이 잘 조제된 환각제처럼 화학반응을 일으켜 독자들을 절망과 악몽이 넘실거리는 가득 찬 공허(언더그라운드)로 인도한다. 진정, 다시 깨기 싫은, 황홀경이다.

작금의 문학 위기론은 서사의 부재에 기인한다. 철학은 있으되 서사가 빠진 소설들은 뼈만 앙상한 생선처럼 독자들의 천대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젊은 작가들은 신묘한 ‘이야기’로 가득 찬 소설을 만들어 내고 있고, 이제 서진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다년 간 ‘언더그라운드’에서 내공을 닦은 그의 등장은 분명 신선한 바람이 될 것이다. 그가 온라인상에서 남긴 몇 몇 작품들에 등장한 요소들, 마술과 난쟁이 그리고 장르문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장치들은 이번 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에서도 유효하다. 이는, 서진이 앞으로 펼쳐낼 이야기도, 충분히 매력적이며 기기묘묘하고 신통방통하리란 기대를 갖게 한다. 일찍이 그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본 온라인상의 팬들이 열광한 것이 바로 그의 기기묘묘하고 신통방통한 이야기들 때문이었으므로.

책장을 넘기다, 순간, 눈을 든다. 지하철은 어둠 속을 달린다. 덜컹덜컹. 문득 불안하다. 책에서처럼 이것은 악몽이 아닐까, 주위를 둘러본다. 무심한 사람들이 무심하게 앉아 있거나 혹은 서 있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린다. 전자 피아노 소리. 창밖으로 언뜻 글자가 스쳐 지난다. Prove Yourself. 흡사 코니아일랜드에서 불어오기라도 한 듯, 한 줄기 바람에 짭짤한 바다 냄새가 섞여 있다. 눈을 감는다. 모든 것은 악몽일 것이다. 눈을 뜨려 한다. 셋을 센다.

하나,

둘,

호흡을 가다듬고,

셋.




덜컹덜컹, 덜컹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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