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모두가 하루키를 읽을 때, 나는 김훈을 만났다. 유독 눈이 많이 내렸던 2000년 겨울이었다.
그해 여름에 찾아온 사랑이 그랬듯이 김훈의 문장은 낯설고 생경했다. 단단하게 여문 견과류처럼 김훈의 문장은 씹기 어려웠고 삼키기는 더 어려웠다. 부드럽게 자판을 두드리면 매끄럽고 보드라운 문장이 완성되는 시대에 몽당연필로 눌러 쓴 문장들은 투박하게만 보였다. 대신에 김훈의 문장은 인생에 대해 농담하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 섣부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값싼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연애의 한 가운데서 김훈의 글을 읽었다. 어떤 날은 사랑하는 이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충동에 휩싸여 김훈의 글을 읽어주기도 했다. 이런 문장들이었다.

 

 

 - 낭가 파르바트를 동행 없이 혼자서 오르는 과묵한 등반가들이 눈 속에 박힌 새의 시체를 눈물겨워하는 것은 그 유선형의 주검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되 만년설에 묻힌 날개의 꿈은 그 떠도는 종족의 운명 속에서 부활하는 것이어서 모든 새들은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다. - <자전거 여행 중에서>

 

 

 

훗날에야 그 충동이 보고픔의 다른 표현임을, 그리움의 소리 없는 아우성임을 알았지만 당시에 나는 전화 통화만으로도 가슴이 헐거워지는 청춘, 이십대였다. 시베리아 기단이 흩뿌리고 간 그해의 무수한 눈송이들처럼 빛나고 시린 사랑을 했고, 명예로운 훈장이라도 되는 양 도서관 구석에서 찾은 김훈의 책들을 한쪽 옆구리에 잔뜩 끼고 다녔다. 유치했기에 아름다웠던, 더없이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7년, 길지도 않고 딱히 짧지도 않은 그 세월동안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었으며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이십대의 초입에서보다 고민이 한 두 가지쯤 늘었으며, 배가 약간 나왔고, 아부라는 걸 터득했다. 경제경영 실용서적 코너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많아졌고, 재테크에 부쩍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어느 날 아침,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남한산성>이라는 제목보다 ‘김훈 장편소설’이라는 글귀가 더 눈에 들어오는 연분홍빛의 예쁜 책이었다. 표지를 넘기니, 근엄하기 짝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김훈의 사진 옆으로 아내가 쓴 메모하나가 딸려 나왔다.

“여보. 김훈씨가 새 소설을 쓰셨나봐. 우리가 연애하던 시절에 당신이 김훈이 쓴 글이라며 자주 읽어줬잖아. 솔직히 그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당신이 읽어 주는 게 좋아서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꼭꼭 씹어 먹어야 제 맛을 느끼는 멸치볶음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글귀들이 생각나더라. 좋더라고. 김훈씨의 그 문장도, 그리고 당신도. 바쁘고 힘들겠지만 김훈씨 책 읽으면서 잠시 옛날로 돌아가서 쉬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다 읽으면 꼭 나한테도 읽어주기! 알았지?”

오래 사귀다 결혼한 아내는 김훈의 문장만큼이나 좋은 여자였다. 나는 오래 잡고 있으면 손  끝에 물이 들것만 같은 그 예쁜 책을, 그 옛날의 언제처럼 옆구리에 끼고 출근길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책을 펼쳐 들었고, 이내 포화와 피비린내 대신 인간의 살 냄새가 진동하는 병자년 겨울의 남한산성으로 빠져들었다.

1936년 겨울,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그 공허한 말들 속에서 인조는, 일찍 와서 오래 머문 그해의 겨울처럼 밀려오는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에 숨었다. 작전 상 후퇴도 아니었고, 어둠속에서 도사리며 이빨을 가는 들짐승의 잠복도 아니었다. 어찌할 수 없는 도망, 도피, 틀어박힘이었다. 그것은 남루한 민초들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이었다. 코를 땅에 처박고 옹송그리는 누더기 같은 백성들의 삶은, 그러나 살아있기에 또 아름다운 치욕의 나날들. 인조의 어가행렬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던 그날, 임금은 민초와 같아졌고, 그리하여 그는 하루를 견디는 것만큼 치욕을 쌓아가는 ‘백성’이 되었다. 개개인의 삶이 그렇듯이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이었고, 임금도 그러하였으며, 척화와 주화를 외치는 신하들 또한 그러하였으며, 백성들 역시 고립무원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임금이 청의 칸에게 머리를 찧으며 치욕을 당하기까지의 47일간의 기록은 아름답다. 날카롭게 아름답다. 삶을 견디는 자들의 냄새로 치가 떨리게 아름답다. 김훈은, 그 아름다움을 명징한 문장으로 도려내어 훤하게 벌려 놓는다. 그 속살은 겉표지의 연분홍만큼이나 예쁘다. 그래서일까, 눈물이 흐른 것은.

갇힌 성 안에서는 삶의 난장이 펼쳐진다. 말과 말이 겨루고 삶과 죽음이 교차된다. 임금 앞에 도열한 신하들은 말로써 전쟁을 견딘다. 병사들의 젖은 몸을 말리는 일을 두고도 지루하고 끝없는 공방을 일삼는 그들은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추위에 떠는 병사들과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처럼, 신하들은 불꽃 같이 날름거리는 혀와 빙벽처럼 높은 문장으로 전쟁을 치르고 삶을 살아 낸다. 그들에게는 논쟁이 곧 일이고 삶이다.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김훈의 시선 속에는 그들에 대한 판단이 없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두지 않는다. 오직 한 개인으로 고립무원의 삶을 살다 간 당대의 삶을 전시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김상헌에게도, 그리고 최명길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다. ‘버티면 버텨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김상헌과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 줄 것’이라고 외치는 최명길은 그 나름의 치열한 삶을 살아냈다. 나는 오히려 우유부단한 인조와 한낮 대장장이인 서날쇠, 그리고 조국을 배신한 정명수의 삶이 살가웠다. 잘린 발가락을 들고 상관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병사들과 날이 풀리자 봄나물을 캐는 민초의 노인들이 아련했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김훈은 그들에게조차 냉정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결국 김훈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일인칭이 아니면 도무지 쓰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김훈이 삼인칭으로 소설을 쓴 이유, 그것은 바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고통 받는 누구의 편이라도 들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결국, 김훈은 등장인물 모두의 편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학교 3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내가 일하던 곳 건너편은 혼잡한 사거리였다. 항상 노점들이 즐비해서 밤이면 소도시의 공허한 축제처럼 묘한 정취를 풍기기도 했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꼭 노점상 단속이 나왔다. 단속반들은 무자비했다. 부수고, 때리고, 그리고 빼앗았다. 노점상들은 그때마다 악다구니로 맞섰지만 언제나 별 소용없이 끝나버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바로 다음 날이면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상인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신나는 뽕짝을 틀어놓고, 예의 그 걸걸한 목소리로 물건을 팔아대는 것이었다. 그것은 삶의 진경이었다.

살아낼 수밖에 없는 삶. 낡고 비루해서 때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해버리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 나는 그 노점상들을 보며 열심히 일했고, 학비를 벌었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그들의 리어카에서 어묵을 사 먹거나 천 원짜리 꽃핀을 사서 애인에게 선물하는 것이 다였지만 그들은 내게 삶을 가르쳐 주었다.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혹자는 김훈의 <남한산성>을 들어 역사소설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실제의 역사를 다루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니. 그러나 <남한산성>을 단순히 역사소설로만 읽는다면 그것만한 오독이 없지 싶다. 김훈은 역사를 쓰기 위해 병자년의 남한산성을 펼쳐놓은 것이 아니다. 그 옛날, 처음으로 읽었던 김훈의 책 <자전거 여행>에서 나는 그가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여러 정취들을 표현하기 위해 연필을 든 것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버렸다. 그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사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민했던 내 청춘이 김훈의 글에 불나방처럼 반응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했었고, 그리하여 살아있다는 충만한 마음에 매일이 들떠 있을 때였다. 그렇기에 삶에 대해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김훈의 문장에 솔깃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한산성>도 ‘살아있는’ 혹은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말로써 존재를 증면하는 신하들이든, 청병의 칼 앞에 쓰러지는 졸병이든, 전쟁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백성이든 김훈의 문장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모두 아름답다. 김훈은 삶이라는 일련의 전쟁을 치르는 모든 개개인에게 헌사를 바친다. 요란스럽고 현란한 문구가 아닌, 담백하고 무뚝뚝한 문장으로 그들의 밭은 숨과 진한 살 냄새를 찬미한다. 그 속에서 역사는 조연이다. 병자호란은 단지 삶의 진경을 세밀하게 비추는 돋보기일 뿐, 그 어떤 전쟁과 전쟁의 소문도 김훈의 <남한산성>안에서는 중요하지도, 그리고 거창하지도 않다. 거창한 것은 다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는 것처럼 삶을 견디는 모든 생물들의 ‘삶’ 그 자체다.

나는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남한산성>을 읽었다. 화장실에서 똥을 눌 때도 읽었다. 다 읽는데 꼬박 3박 4일이 걸렸다. 오랜만에 맛보는 김훈의 글은 여전히 소화하기 힘들었지만, 생식을 한 뒤의 그것처럼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상쾌함이 밀려왔다. 우리나라가 겪은 치욕 앞에 우울한 마음으로 완독을 한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기본적으로 김훈이 희망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머리를 숙였으나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마치 부서진 리어카를 그러안고 다시 생업의 현장으로 당당하게 나타났던 그 노점상들처럼 조선의 민초들은 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자식들을 나았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삶이 계속되는 한, 적어도 희망을 가질 여지는 있는 것이다. 절망은 생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만 조우하는 것이므로.

책을 다 읽은 후 약속대로 아내에게도 읽어줬다. 이번에는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마지막 장을 읽던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아내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후에도 책의 마지막 몇 문장을 다시 읽곤 했다. 삶에 자신이 없을 때나 희망이 안개 덮인 산맥처럼 희미할 때.

- 백성들이 날마다 몇 명씩 성 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은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 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를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 <남한산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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