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고문 고시원: 괜찮아, 곧 지나갈거야>
고시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반으로 접어야 한다.
색종이를 접듯이 네 귀퉁이를 똑바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저 인간의 존엄이나 고귀함 같은 단어들은 주머니에 쑤셔 넣고, 편리와 실용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럭저럭 잘 접었다 하겠다.
접거나 포기해야 할 것들은 자존심만이 아니다. 한 평 남짓한 직사각형 공간에서 살아가려면 허리와 오금 또한 접을 필요가 있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네안데르탈인을 연상하면 쉬울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던 누군가의 콧구멍처럼 깊고 컴컴하던 동굴은 어쩌면 고시원의 원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춘기 소녀의 여린 마음만큼 얇고 예민한 벽은 칸과 칸을 나눈다는 시각적인 효과가 있을 뿐 방음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리하여 ‘고시원 인(人)’들은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에서 발생하는 생활 소음을 반으로 줄이는 연습을, 원하건 원하지 않건 하게 된다. 괄약근을 조절하여 방귀를 분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소리를 완벽하게 제거한 재채기를 연발할 수 있게 된다. 김치가 떨어졌다거나 속옷을 도둑맞았다거나 하여 울음이라도 터트릴 일이 생기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을 한껏 참은 뒤, 이렇게 중얼거려야 한다.
괜찮아, 곧 지나갈 거야.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여를 달린 뒤, 마을버스로 갈아타 다시 십오 분 정도를 더 가면 작고 낡은 동네가 나온다. 도심의 외곽,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처럼 중심에서 빗겨나 있는 그곳은 번듯한 동네 이름 대신 종종 ‘변두리’로 불렸다.
변두리의 나른한 시장 통을 지나 굽이진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상점 여러 개가 마주보고 늘어선 상가가 있다. 철물점부터 시작해 세탁소, 국밥집, 양품점, 제과점, 약국 등 상가에 입점한 가게들은 손님을 보는 일보다 서로의 얼굴을 보는 일이 더 많다. 물론 상가에도 일 년 삼백육십오일 손님으로 붐비던 때가 있었다. 대형 마트가 생겨나기 전의 일이었다.
지하철 역 근처에 들어선 대형 마트는 무시무시한 육식 공룡이었다. 커다란 입에다 손님을 쓸어 담는 것까지 모자라 역에서 얼마쯤 떨어진 ‘변두리’까지 광고 전단을 돌렸다. 변두리의 재래시장과 상가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전단을 발견하는 족족 찢어버리거나 마트 화장실에 들어가 아무렇게나 똥오줌을 싸지르는 소심한 복수를 할 뿐이었다.
고문 고시원은 바로 그 상가 입구, ‘소망 슈퍼’와 ‘할머니 국밥’이 자리한 건물 이층부터 사층까지를 쓰고 있다.
건물은 ‘코끼리 빌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 이름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회색 콘크리트로 지어진 낡은 건물은 늙고 병든 코끼리가 엎드린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코끼리 빌라에 고문 고시원이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일이다. 그때는 코끼리 빌라도 제법 쌩쌩한 모습이었고, 변두리이긴 했으나 동네에도 사람의 왕래가 꽤 많았다. 재래시장도 호황이었다.
“병신 같은 것들만 빌빌 싸는 거야. 나처럼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빛을 발하는 거지. 아엠에프? 웃기지 말라고 그래. 조금만 기다려 봐. 대박이 날 거니까.”
고문 고시원의 초대 사장이자 원장이자 총무였던 양반은 성긴 이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자로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찍이 변두리 바닥에 스티커 사진 전문점을 들여와 대박을 쳤던 그는 IMF가 터진 후 가진 재산을 몽땅 털어서 고시원을 차렸다.
“이런 쪽방에 누가 와서 살아요?”
모기가 길을 잃을 듯 어지럽게 얽힌 파마를 자랑했던 그의 아내는 생전 처음 보는 고시원 모습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말았다.
“시내 쪽에 가 봐. 방이 없어서 줄을 선다니까. 망할 놈의 아엠에프 때문에 길에 나앉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어? 집도 절도 없는 그 인간들이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바로 여기란 말이야.”
과연 그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고문 고시원은 탄생과 동시에 인기를 끌었다. 시내보다 삼만 원 싼 방값도 인기의 한 원인이었다. 그의 아내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남편과 함께 고시원을 관리하는 게 귀찮긴 했지만 원장 사모님 소리를 듣는 건 퍽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짧지만 굵은, 고문 고시원의 황금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그때는 고시원의 이름이 ‘고문’이 아니었다. 그와 아내가 삼박 사일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지은, ‘공문 고시원’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있었다.
공부의 문이라는 뜻인 ‘공문’이 ‘고문’이 되기까지는 오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오년 동안 세월이 쌓이듯, 페인트가 벗겨지듯, 동네가 쇠락하듯, 침대가 삐걱대듯, 고시원의 빈 방이 늘어가듯 여러 일이 있었다.
그리고 2002년 9월, 태풍 루사가 미친년 머리카락처럼 불어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