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자, 당신은 지금 태평양을 지나고 있다. 시원한 바람, 부드러운 햇살, 더위를 식혀주는 적당한 비, 배를 따라 헤엄치는 돌고래. 하지만 낭만적인 풍경은 여기서 끝이다. 당신이 탄 배는 그만 가라앉고 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발 때문이다. 컴컴한 밤, 검게 넘실거리는 파도, 싸늘한 공기. 불과 몇 시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다. 다행히 당신에게는 오렌지색 구명조끼가 입혀졌고 너무나도 다행히 구명보트를 타게 된다. 가족들은 모두 잃었다. 구명보트에는 오직 당신뿐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구명보트에는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 마리가 타고 있다. 이런! 자세히 보니 얼룩말뿐만이 아니다. 검은 털이 무성한 오랑우탄도 한 마리 타고 있다. 당신은 애써 자위한다. 얼룩말과 오랑우탄 정도라면 말동무도 되고 비상시에는 식량이 되어 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저쪽 구석에 다른 놈이 더 있다! 머리가 벗겨진 하이에나다. 놈이 노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다. 두려움에 떨새도 없이 이번에는 구명보트 밑에서 우렁찬 포효소리가 들린다. 이런 젠장 맞을! 200킬로그램은 족히 넘어 보일 듯한 크기, 아름다운 줄무늬,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바로 벵골 호랑이다! 이제 당신은 이 모든 녀석들과 함께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해야 한다. 배 주위에서 헤엄치는 상어는 덤이다. 어떤가? 가슴 뛰고 흥미진진하지 않는가!

이 최악의 상황에 부딪친 주인공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16세의 인도소년이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줄여서 스스로를 ‘파이’라고 부른 덕에 이 이야기의 제목은 『파이 이야기』가 되었다. 『파이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의 외양 속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있다. ‘파이’의 표류가 주된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얀 마텔’은 제1부에서 ‘파이’의 종교생활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며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두를 믿는 ‘파이’의 태도는 희망과 긍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희망’과 ‘긍정’이 ‘파이’가 기나 긴 표류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사실, 즉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사실이 ‘파이’의 표류가 기록된 제2부에서 잘 표현된다. 물론 『파이 이야기』는 모험소설로서의 미덕도 잘 갖추고 있다. 생동감 넘치는 문장과 재치 있는 묘사들은 물론이고 흥미로운 장면들이 가득하다. 특히 벵골 호랑이와 상어와의 싸움이나 ‘식충섬’에 대한 부분은 압권이다. ‘파이’의 실명, 어쩔 수 없는 살생 등 가슴 아프고 등골 서늘한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우리들의 삶은 끝없이 표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표류의 중간에 우리들은 얼룩말이나 오랑우탄이라는 짐을 짊어져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그 짐이 하이에나로 바뀌기도 하고 가끔은 벵골 호랑이라는 무겁고도 거대한 짐이 될 때도 있다. 그 짐의 무게에 짓눌리는 순간 우리들의 표류는 끝나 버리고 망망대해에 가라앉게 된다. 『파이 이야기』는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파이’는 ‘리처드파크(벵골 호랑이의 이름이다.)’를 배에서 몰아내려고만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리처드파크’와의 공존을 선택한다. 그 공존에의 선택 속에 언젠가는 이 표류가 끝나리란 희망의 빛이 서려있다. 짐(벵골 호랑이)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파이’의 표류는 한결 편해진다. ‘파이’와 ‘리처드파크’가 교감하고 이해하는 장면들은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 된다.

우리의 삶도 비슷하다. 내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짐을 인정하고 기꺼워 할 때부터 그것은 더 이상 괴로움의 대상도 미움과 증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리처드파크’가 ‘파이’의 활력소가 되어주고 표류를 마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감당하기 힘든 짐도 때론 살아가는 이유가 될 때가 있다.

『파이 이야기』에는 가장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파이’가 ‘리처드파크’와 공존하기로 마음먹은 후 한 말이다.

“마음 한 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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