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역할의 경계를 넘어서
이윤주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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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할의 경계를 넘어서 - 이윤주 / 한국학술정보

[셰익스피어 극에 등장하는 남성적 여성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성역할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려 한 이유는 딱 하나다.
내가 요즘 쓰고 있는 글이 있다. 그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찾고 읽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 책이 결과페이지에 소개되었다.
자세한 책 소개를 읽지 못하고 제목만으로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책 두께나 디자인, 편집 수준에 비해 가격도 그리 가볍지는 않다.

그래도 셰익스피어라는 작가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의 남성적 성향을 소개하고 분석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신선하게 느껴져서 읽어보기로 결정했었다.

조금 성급하지만, 결론을 이야기하라면 [책값이 너무도 아깝다.] 라는 말로 대신하겠다.

책을 사기 전에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리 상세한 리뷰를 찾을 수 없었다. 서점에서 이 책을 찾았다면 아마도 절대 사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어쨌든 사버리고 말았으니...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넷을 분석하고 있다.

첫 번째는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포오샤
두 번째는 [리어왕]의 거너릴과 리건
세 번째는 [맥베스]의 마녀들과 멕베스 부인
마지막으로 [헨리 6세]의 죤과 마가렛

그리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아마 이 책은 저자의 논문을 출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선, 책의 목차와 전개방식, 그리고 참고문헌을 인용하는 방식 등에서 전형적인 논문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저자의 이야기 진행에서 느껴지는 전형적인 남성비하적 시각과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그리려 애쓰는 여성비상(?),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이라고 쓰고 이기적이라고 읽고 싶다.) 시각으로 바라본 왜곡된 성 역할의 정의.
뭐, 저자가 여성이고 남성 우월주의를 타파하고자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그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식의 해석도 가능하긴 하겠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점이다.
우선, 저자가 선택한 것은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셰익스피어라는 단 한 사람의 작품, 그 중에서 위에 적은 네 권 이외에도 많은 책이 있는데도 저 네 권만을 선택했다는 것.

물론 저자는 왜 하필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인지, 그리고 저 네 권만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밝히기는 했다.

서론의 앞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작기가 바로 성 역할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위협적 여성들인 남장 여인과 여인전사(Amazon), 그리고 잔소리가 심한 여성들에 대해 폭발적 관심이 쏠리던 시기였다고 지적될 정도로 셰익스피어는 어떤 작가보다 다양한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특히 전통적 성 역할을 거스르는 여성들의 면면을 극작품 속에 가장 다양하고 심도 있게 그려낸 작가다.]
문장이 너무 길어 조금 헷갈리기는 하지만 저자는 셰익스피어를 ‘전통적 성 역할을 뛰어넘는 여성’에 대한 글을 최고로 심도 있게 표현한다고 평가하는 듯하다.
이 책에서 나누는 기준은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여성, 특히 남성적 영역에 도전하는 여성을 넷으로 구분한다.
androgyne, virago, 마녀, amazon
뭐, 각각 두드러지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여성전사도 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녀도 있고...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느껴지는 저자의 남성관이 너무 부정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부정적 남성관, 그 남성관을 깨트리는 여성을 찾기 위해 이 네 작품을 선정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떠나질 않는다.

물론 지은이의 말대로 셰익스피어의 이 네 작품에서 남성이라는 이미지가 부정적일 수도 있다.
그 부정적 남성관, 쪼다 같고 병신 같은 남성, 여성의 속삭임에 넘어가는 줏대 없는 남성이 세상의 모든 남자의 모습은 분명코 아닐진대 이런 식의 분석과 그에 따른 결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더 중요한 것은 네 작품이 모두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소설이란 그 발표된 시기의 세상을 풍자하고, 고발하고, 비틀고 꼬집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서도 아니고 소설이라는 형식의 허구의 글에서 나타나는 것은 결국 작가의 편견일 수도 있고 오해일 수도 있다.
아무리 좋게 말하려 해도, 작가가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위해 얼마나 자료조사를 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실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지은이의 해석이 얼마나 셰익스피어의 [집필의도]를 세세하게 집어냈는지 모르겠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 책(이라 적고 논문이라 읽는다.)의 결론 첫머리에 이런 글을 볼 수 있다.
[근대 초기 영국은 경제, 정치, 인구 등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맞이 했는데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들 가운데 전통적인 성 역할을 거부하는 여성들은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문학은 여성의 남성다움, 남성의 연약함,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본질”에 대한 전반적 질문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이런 점은 또한 당대의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도전을 받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근대 초기 영국이라...
지금은 셰익스피어라는 작가가 활동하던 시기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간극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지금도 읽히고 있고, 여전히 고전문학의 진수라고 평가받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하지만 문학작품이 위대하다고 해서 그 내용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고, 작가의 정신과 사상이 그 시대의 보편적 반영이라고 보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만일 지은이가 이런 식의 분석을 하고 싶었다면, 단지 셰익스피어라는 작가 하나, 그의 작품 달랑 네 개가 아니라...
시대별로 작가 하나와 그의 대표작 한, 두 권씩 잡아서 적어도 네댓 명의 작품 열 종 이상은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그렇게 분석을 꼼꼼히 한다고 해도 그 내용은 [시대별, 작가별 여성관의 차이와 그 이해]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의 작가와 같은 분석과 연구라면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도 가능하지 않을까?
[인류의 멸망과 그 후의 전개에 관해] - 헐리웃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미래 예측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터미네이터 1, 2, 3, 4편]을 분석하는 것...
터미네이터 1편, 2편은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했고 3편은 조나단 모스토우, 4편은 뭐 아직 개봉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맥지라는 감독이 제작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하나의 시리즈 영화로 각가 다른 세명의 감독의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니 오히려 더 포괄적이고 현실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성 역할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지은이의 주관적인 내용으로 꾸며진 논문을 이렇게까지 길게 말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살 때 참고할 자료가 별로 없었기에 이 책을 구입하는 실수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처럼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한 사람쯤 있다는 것을 알고 구입하든 말든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나는 이 책의 지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따라서 그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 [성 역할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책만큼은 별로 좋게 평가하게 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저자의 개인적, 주관적인 성적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작품을 방패막이로 내 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하는 말이야.’라고 말을 하면서 그 작품을 순전히 자신만의 색안경을 통해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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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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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 - 코맥 매카시 / 정영목 / 문학동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동기는 이렇다.
어머니께서 책 읽기를 참 좋아하신다. 그리고 수민이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시며 특히 수민이가 공부할 때는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신다. 물론 TV고 뭐고 다 끄고 조용히...
우리 집엔 책이 좀 많은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두 권씩을 읽으시는 어머니의 독서량을 보자면 늘 읽을만한 책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가끔 서점엘 들르거나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할 때는 어머니께서 읽으실만한 소설도 몇 권 같이 구입한다. 물론 나 역시 짬짬이 읽고 있고...

이 책은 얼마 전에 동네에 있는 홈플러스에 생필품을 사러 갔다가 서적 코너에 놓여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 구입했다.
띠지에 노란 색의 고딕체로 [감히 <성서>에 비견되는 소설!]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구 위, 아래로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느니 아마존과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셀러 1위라느니 유명한 사람들이 선정한 소설이라느니 하는 소위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라는 문구가 가득하다.

이 책은 일단 어머니께서 먼저 읽으셨다.
소감을 여쭈어보니, 동양에서 말하는 ‘고행’, 또는 ‘진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서양식 해석이 아닐까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책을 펴 들었다.
그리고 조금 짜증이 났다. 요즘 영화로 개봉했다고 해서 다시 유명해진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이 생각났다.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을 때 조금 불편했던 것이 모든 문장이 그냥 주욱 주욱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물음표와 마침표 정도로만 구분되어있고, 대화든 설명이든 모조리 똑같이 취급하고 따옴표니 쌍따옴표도 없는 그런 문장, 게다가 아마도 등장인물의 이름도 제대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이 그와 같다.
그냥, 그 남자와 아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이것도 최신 트렌드인지는 모르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꽤나 불친절하다는 생각이다.
보통 소설이라고 하면 이야기 중간에라도 전후관계와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왜, 어떤 일이 있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고 어쩌고 하는 설명이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
읽는 사람은 그냥 막연하게 ‘아, 뭔가 대단한 사건이 터져서 전 인류가 멸망하고 겨우 살아남은 몇 몇 사람은 생존을 위해 어딘가로 이동을 하는구나. 그리고 그 가운데에 이 등장인물이 있는 거구나.’라는 정도의 예상을 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사전지식도 설명도 없이 이 책을 읽어나가야 한다.

대형 마트에서 보는 큼직한 카트를 밀면서 해안가로 가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들 앞에 펼쳐진 죽음의 세상.
그 가운데서 그들은 살기 위해 뒤지고, 시체를 넘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과 마주치는 몇 명의 다른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이의 물품을 빼앗거나 훔치거나, 살인을 하고 가져가거나...
생존을 위해 아기를 꼬챙이에 꿰어 불에 익혀 먹거나...

그런 다양한 모습을 그냥 담담하게 적어내리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남자는 죽고, 아들은 다른 생존자 집단과 함께 하게 된다.

중간에 아주 짧게 남자의 과거 회상에서는 이 재앙 이전의 가족의 모습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그냥 ‘등장하나보다.’ 정도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회상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냥 회색의 죽은 도시, 또는 무채색의 폐허 풍경화...

지은이가 글을 잘 쓴 건지 책장은 잘 넘어간다.
그리고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문장에 숨은 함의가 무엇인지 고민을 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플 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다면, 이런저런 생각 없이 그냥 읽겠다고 해도 책장은 꽤 잘 넘어가니 책 읽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

책은 읽는 사람의 감정과 상태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가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문장을 이용해서 독자 개개인의 상상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전혀 다른 감동을 전할 수 있는 독특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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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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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이 책은 미국인인 지은이가 전 세계의 축구 클럽을 직접 인터뷰하고, 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쓴 글이다.

중요한 점은 지은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축구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낮은 나라에 속한다.
여전히 미국은 축구보다 미식축구에 더 관심이 많고, 썩 뛰어난 축구클럽도 없는 편이다.

그런 나라에서 나고 자란 지은이는 조금은 특이하게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축구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인터넷의 발달로 축구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접할 수 있게 되고 케이블 채널과 위성방송 덕분에 조금 더 쉽게 축구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은이는 거실 소파에 누워 축구경기를 관전하며 깨달은 것이 ‘축구야 말로 어느 경제기구보다 앞서서 세계화를 이끈 주역’이라는 사실이라고 한다.
 

저자는 잡지사에 근무하던 중 8개월 동안 휴직을 하고 전 세계의 축구 경기장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참 부럽다. 8개월을 쉴 수 있다니...)

목차를 보자.
갱스터들의 천국 - 세르비아 서포터스의 민족주의 부활
종파의 포르노그라피 - 셀틱과 레인저스의 종파 전쟁
유대인 문제 - 현대 유럽의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
감상적인 훌리건 - 로맨틱한 반란군인 영국의 훌리건
카르톨라스의 존속 - 정치 부패로 위축된 브라질 축구
카르파티의 흑인 선수 - 우크라이나 선수들 사이에서의 인종차별
이탈리아의 과두재벌 - 스포츠 정책, 여론 조작, 부패한 정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매력 - 바르샤를 둘러싼 민족주의와 문화적 특색
이슬람 세계의 희망 - 중동의 미래를 여는 열쇠, 축구 혁명
미국의 문화 전쟁 - 세계화가 가져운 미국의 문화 분열

위에서 보다시피 이 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럽과 그 클럽만의 독특한 문화, 심지어 영국의 유명한 훌리건까지 다 이유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것은-어쩌면 그런 정보를 이 책에서 처음 접한 나에게만 특이한지는 모르지만- 거의 대부분의 축구 클럽과 그 나라의 정치권력, 경제 권력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한다.

민족주의, 자국 문화 우월주의, 인종차별, 정치와의 밀착...
심지어 ‘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쓰인’ 축구라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는 국내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지 않나 싶다.
물론 우리나라는 축구보다는 야구가 먼저 프로야구를 출범시킴으로써 약간은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결국 독재를 위한 3s정책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 책에서 축구가 전 세계적으로 어느 시기에는 각 나라별로 정책적으로 사용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는 적어도 축구에서만큼은, 다른 나라는 상관없어도 일본에게 만큼은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절박감을 갖고 있다.

사실 축구에서 일본에 지거나 이기거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있을 수 없는데도 우리는 축구에서 일본에 지는 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축구 선수들은 참 죽을 맛일 것이다. 실력 차이는 어떨지 몰라도, 축구라는 게 어차피 질 때도, 이길 때도 있는 스포츠인데, 일본에 지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 책에서, 지금은 나라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과거의 어느 시기에는 분명, 그리고 일부 국가는 지금 현재까지도 축구는 정치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우민화 정책’을 펼치는 데에 기여를 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제일 마지막에 미국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그리 공감이 가지 않는다.

역사가 오래된 다른 나라에 비해 미국은 상대적으로 민족적 공감대 형성이 그리 높지 않은 나라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오래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 그네들의 선조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문명의 인디언을 쫒아내고 그 넓은 땅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라고 해야 남북전쟁이라고 불리는 국내 전쟁 정도?
 

그러다 보니 그들은 다른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들만큼 치열하게 민족을 지키고 고수해야 하는 시기가 없었지 않나 싶다.

물론 내가 잘못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른 어떤 나라도 미국보다는 민족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고행하던 시기가 다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그런 특성을 가진 미국에서 그리 치열하게 민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각되고, 저자의 눈으로 본 축구와 민족 어쩌구 하는 부분에서는 미국이 그만큼 자유롭지 않나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한 사람의 이름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이 축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이 책의 저자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다름이 아니고...
축구 좋아한다고, 국회의원 하면서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아보이는 'J' 그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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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전쟁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로빈 베이커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학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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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전쟁 [sperm wars] 로빈 베이커 지음 / 이민아 옮김 / 이학사
이 책의 부제는 이렇게 되어있다.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이 책의 초판 서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 우리는 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관계 속에서도 가끔씩 외도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는가?
- 남자는 왜 한 번 성교할 때마다 전 미국 인구의 두 배를 수정하고도 남을 정자를 사정하는가?
- 그리고 그렇다면 왜 이중 절반이 여자의 다리 사이로 흘러 나가버리는가?
- 왜 우리는 그 대부분의 시간에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자주 성욕을 느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적절한 해답이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어이없는 서문이라니...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과연 저자는 어떻게 이런 의문에 답을 할 것인가?'라는 호기심으로 책을 펼쳤다.

이 책은 남녀간에 있을 법한 다양한 성적 사건을 사례 형식으로 소개를 한다. 그리고 그 사례를 중심으로 인간의 신체가 그 때 왜 그렇게 반응을 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과연 어떤 유전적 승리, 또는 패배를 안게 되는지 설명한다.

첫번째 사례는 어느 집안의 모계 가계도를 이야기한다.
증조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모계 구성도, 그리고 그 구성도가 계속 이어져나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성공적으로 신체가 반응을 했기에 이렇게 성공적인 족보를 형성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뒤로 갈수록 사례는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부부간의 의무방어전이라 일컫는, 규칙적인 성관계는 왜 필요한지 설명한다. 그 설명을 읽고나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외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설명을 하고 있다.
결혼한 여자가 외도를 하는 경우에 임신할 확률이 본 남편과의 관계에서 임신할 확률보다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왜 외도가 더 임신의 확률이 높은지에 대해서도 꽤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남녀가 성적으로 겪을 수 있는 온갖 상황이 다 나와있다.
부부관계, 외도, 외도에 따른 가정의 파국, 동성연애는 친절하게도 남자간의 동성연애와 여자간의 동성연애, 심지어 양성애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또 뭐가 있었더라...
모든 연령대의 남자들은 20~35세 사이의 여자를 선호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집단성관계, 밤거리에서의 강간, 전쟁에 의한 집단윤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적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해석하는데 꽤 그럴듯하다.
아, 맞다. 자위행위와 몽정 - 남자는 물론이고 빈도수는 높지 않지만 여자의 경우까지 - 는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도 알려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성관계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남자가 폭력적 섹스, 또는 강간을 하는 경우도 사실은 신체적으로 후손을 남기기 위한 전략적 행동과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성격이 맞물린 것이라는 해석이고 보면 모든 남자와 여자는 궁극적으로 좋은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며 그 자녀의 양육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다.

콘돔을 사용하는 경우와 같은 피임은 어떨까?
일단 이 책에 의하면 인공적인 피임을 하는 집단과 피임을 전혀 하지 않는 집단 사이에 임신율이 그리 관심을 보일만큼의 차이가 없다고 한다.
결국 인공적인 피임을 하지 않을 경우, 그 집단은 자연적인 선택에 의해 신체가 알아서 임신율을 떨어뜨린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강간에 의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는 어떨까?
뭐, 좀 예민한 문제이니만치 상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경우에도 여성의 신체가 알아서 임신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주위에서 가끔 보이는 불임부부 중에서 양쪽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임신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남자, 여자 혹은 둘 다 신체적으로는 임신을 원하지 않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하지 않나 싶다.

중요한 것은 머리로 판단하는 상황과 몸이 판단하는 그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성적으로는 절대 임신을 해서는 안되는 상황 - 경제적 이유, 사회적 이유, 또는 개인적인 다양한 이유에 의해 임신을 원하지 않는 상황 - 에서 어쩌다 실수로 임신을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머리는 임신을 원하지 않지만 신체적으로는 그 반대의 상황을 바라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지구상의 인간들 중에서 정상적인 부부사이에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 적어도 10% 정도는 법적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라는 연구결과도 소개하고 있고, 남자는 모든 여자들에게 정자를 '뿌려야'하게끔 만들어져 있으며 여자는 최상의 유전자를 공급해줄 성잭인 상대를 물색하게끔, 다시 말해 남자건 여자건 많은 섹스 상대와 잠자리를 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다소 황당하고 어이없는 명제를 이야기한다.

조금 더 들어가보면, 남자의 그 수많은 정자 중에서 실제 수태를 위한 정자는 몇 되지 않고 나머지는 수태를 위한 정자의 호위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여성의 질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다른 남자의 정자와 전쟁을 벌이기 위한 전력도 포함되어있고, 그 용도에 따라 생김새도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이 호의를 보이는 남자의 정자가 수태되기 쉽게 반응하기도 한단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외도를 하는 여자의 경우, 현재 남편보다 훨씬 매력적인 - 유전적으로 남편보다 우세한 - 남자를 더 선호하게 되고, 만일 여자가 외도를 한 경우, 집에 돌아오면 외도에 의해 임신을 하더라도 외도 사실을 속이기 위해 남편과 다시 한번 섹스를 할 가능성이 현저히 높고, 이렇게 짧은 시간안에 서로 다른 남자와 섹스를 했을 경우에 여자의 몸은 외도한 남자의 정자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선, 우리-남녀 모두-의 몸이 머리보다 훨씬 영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 책을 쓴 저자 로빈 베이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다보니 모든 성접촉에는 이유가 있고, 그렇다면 심지어 외도나 강간마저도 비난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부부사이의 성접촉 이외의 모든 성접촉을 금기시 하는 것은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이성적 수단이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동물들이 행하는 성접촉을 인간만이 금기시 하는 것은 문화, 사회, 이성, 철학 등등의 이유를 달고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

어쨌든 이 책은 내용이 조금 낮뜨겁고 일반적인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읽어볼만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맞느냐 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비이성적인 성호기심과 행위에 대해 조금은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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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이론의 꿈 - 자연의 최종 법칙을 찾아서 사이언스 클래식 10
스티븐 와인버그 지음, 이종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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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린시절에 한번쯤은 과학자를 꿈꾼다.
나 역시 멋진 과학자가 되어 대단한 연구를 하는 꿈을 꾸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가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더라...
아마 별자리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우주과학자를 꿈꾸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6학년쯤...

블랙홀이라는, 무엇이든 그 근처를 지나가는 물체는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여 모든 것을 먹어삼키는 괴물...
그에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화이트홀...
뭔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아도 무척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아인슈타인의 멋진 콧 수염도 부러웠다. (난 이상하게 아인슈타인과 히틀러의 콧수염이 헷갈렸다. 아니 둘의 콧수염때문에 두 사람이 서로 헷갈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에디슨의 이야기에 발명가를 꿈꾸었고...

그런 멋진 꿈과 멀어지는 나이쯤 되어서 스티븐 호킹이라는 인간승리의 주인공이 쓴 책을 읽어보려다가 결국 중간쯤에 포기했었다.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얼마 전, 라디오 프로그램의 공개방송에 갔다가 기념품으로 받은 게 이 책이다.
받았다기 보다는 대충 골라서 잡은 것이다.
제목이 꽤 인상적이었다.

최종이론의 꿈...
최종이론이라...
지금까지 나온 모든 이론의 마지막에서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이론이라는 말인가?

사실 이 책을 완독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일단 한 번 시도를 해보고 도저히 안되겠으면 포기하자고 가볍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물리학자도 이렇게 멋진 에세이를 쓸 수 있구나."

솔직히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의 절반 이상은 내 능력으로는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판 들어보지도 못한 무슨 희한한 물질에 관한 이야기며...
양성자, 자외선 파국, 뮤온 입자, 약력, 강력, 뭔 베네치아노의 공식이며 초끈이론??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런 말이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고 도저히 독해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이 책이...
읽히기는 한다는 사실이다.
꽤나 철학적인 느낌의 우문을 놓고 작가는 나름대로 현답이라고 말을 한다.
글쎄 나한테는 그게 우문에 현답인지 현문에 우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책은 1992년에 쓰였으니 꽤나 오래된 책이다. 그걸 우리나라는 이제야(2007년 12월) 번역해서 출간했으니 꽤 오래 걸린 셈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쓰여진 책이다.
저자도 책 곳곳에서 언급했듯이 [초전도 초대형 충돌기 (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SSC)]라는 과학 프로젝트의 연구예산을 따내고 거대한 공사를 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는 결국 예산을 따내지 못했다. (그래도 작가의 인세수입은 대단할 것 같다. ㅋ)

난 이부분이 꽤 인상적이다.
우리나라도 그런가?
과학자가 연구분야의 예산을 배정받고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이런 책을 쓴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토에서도 가능한 일일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서 만일에 이런 책을 쓴다고 하면, 설령 책으로 나온다고 해도 일반 독자가 사서 본다는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을까?
아니 그전에 연구예산을 위해 이런 책을 쓴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과학자가 있기는 할까?
더 큰 문제는 그런다고 해서 과연 저쪽 여의도에서 그런 노력을 알아주기는 할까?

뭐, 이런 다분히 정치적 장벽과 도도한 과학자연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이런 책을 쓴다는 것 자체가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내게 이 책은 정말 어렵다. 읽은 내용의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내게 주는 의미는 정말 크다.

대학에서 공학이 학생들의 기피대상이 된다는 뉴스도 새삼스럽지 않고...
대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이 수준 이하이기에 대학에서 글쓰기 강좌를 앞다투어 개설한다고 하는 뉴스도 자주 접한다.

가끔 학위 논문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기 위해 들여다 보기도 하고, 지인들의 논문을 받아서 읽어보는 기회도 가끔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논문을 읽다가 그냥 덮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꽤 많이 생긴다.

논문은 자신의 학문적 성과물이다. 저자가 그간 배우고 익히며 자신의 지식으로 쌓은 모든 것을 한 권으로 집약시켜 보여주는 것이 논문이다.
그런데 그런 논문이 아예 처음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한 경우가 맞춤법과 띄어쓰기와 같은 기본적인 문장구조가 맞지 않는 경우이다.
이런 글을 접하면 아무리 대단한 주제의 논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한숨만 나온다.
그리고 조용히 책장을 덮고 한쪽에 던져두게 된다.

또는 읽다보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읽고 읽고 또 읽어도 해석이 되지 않는 그런 글들이 있다.

외서를 읽다가도 번역상의 오류로 인해 논점이 흐려지거나 명확하지 않으면 짜증이 나는데, 하물며 같은 한국인이 한국말로 쓴 글이 이러면 환장한다.

외국어 번역물을 너무도 많이 접해서 한글이 헛갈리는 건지는 모르지만. 이러면 글을 쓰는 최소한의 규칙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 아닌가? 그런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시간낭비이다.

이 책도 몇 군데 어색하거나 문맥이 흐트러지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내 생각엔 그건 저자의 잘못은 아닌 듯 하다.
각 장마다 짤막하게 적절한 글을 발췌하는 능력도 그렇고 전반적인 흐름을 보아도 저자의 글쓰기 능력을 의심할 수 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내 독해 능력의 부족일 경우가 있겠다.
내가 이런 류의 책을 자주 접하지 못하다 보니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같은 단어가 분야에 따라 약간씩 다른 뜻을 갖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설령 번역상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이 역자의 잘못은 또한 아닐게다.
언어 별로 특성이 다르고, 표현의 차이가 있겠고... 뭐 그런 걸 것이다.

어쨋든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분명하게 한가지 자극을 받았다.
이제는 전문분야가 있는 연구자도 이렇듯 대단한 글쓰기 능력을 가져야 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자신의 글쓰기 능력으로, 그 어려운 연구분야에 대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개특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재미있게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나처럼 유별난 능력같은 건 절대 보이지 않는 사람은 어쩌란 말이냐?
유별날 것이 없으니 그럴듯한 글을 쓸 일도 없으려나? 만일 그렇다면 그건 더 슬플 일 아닌가...

아...
이 책을 읽으며 또 하나 알게 된 사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등장하면서 실명이 알려지고 유명해진 이휘소 박사...
이 책의 저자는 이휘소 박사를 좋은 친구, 자신보다 더 대단한 과학자, 그 죽음이 너무도 안타까운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휘소 박사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면 어쩌면 함께 파트너가 되어 연구했을 수도 있는 내용으로 노벨상을 받았다고 한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그런 박사 하나를 지키지 못해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만들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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