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 때, 아내와 내가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던 그 다툼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혼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혼을 선택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어찌 역사뿐이겠는가?
어차피 벌어지고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가정이 있을 수 없는 걸 말이다.
레너드 쉴레인은 지나 사피엔스라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은 ‘만약에 ~하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게 된 순간부터 인류의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면, 설령 초기 원시 부족 형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오지의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하다면’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집단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언어라는 매개로 의사를 소통하는 인간은 모두 ‘만약에 ~하다면’이라는 가정을 사용한다는 말이다.
나도 인간이고, 제법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몸을 담고 있는 집단속의 인간이니 이러한 ‘만약에 ~하다면’이라는 가정을 수도 없이 사용한다.

인간만이 사용하는 화법이라고 하니, 이 화법을 빌려 오자.
‘만일 그 때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린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또 다른 문제가 생겨서 같은 결론을 내렸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행복하고 알콩달콩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남들이 보기에 지극히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아내는 저녁식사를 준비해두고 아파트 앞 벤치에서 아이와 함께 나를 기다린다. 이웃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아이와 놀아주기도 하며...
들어서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집에 들어서면 같이 저녁식사를 한다.
나는 밖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아내는 들어주었다. 아내가 이야기를 하면 나 역시 귀 기울여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TV프로그램을 함께 보기도 하고, 허리가 아픈 아내를 대신해서 내가 아이를 씻겨서 마사지까지 해주고 나면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잘 생각해보니 내 마음 한 구석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랬던 걸 보면 아내 역시 나 못지않게 단단한 응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건 어쩌면 금단의 영역이었을까? 나나 아내나 그런 응어리가 있다는 걸 내색하지 않고 살았다.
그렇다면 조금 빠르냐, 늦으냐의 문제일 뿐 그 응어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이혼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았다면 응어리가 터지기 전에 무언가 계기가 생겨서 그 응어리를 풀어버릴 기회가 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혼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일까?

아내와 이혼을 한 이후,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냥 하룻밤의 꿈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꿈의 내용이 꽤나 충격적이어서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느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꽤나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던 나는 어느 순간 장례식장에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장례식이 다른 사람이 아닌 아내의 장례식이라는 걸 알고 꽤 당황해했었다.
장례식장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었고,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 장례식장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눈앞에는 검정색 관이 놓여있었고 아내는 그 안에 잠자듯 누워 있었다.
잠시 후 무언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관에 누워있던 아내는 발목이 잘려 있었고, 그 잘려나간 발목 아랫부분은 관 밖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그걸 보고도 심하게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어?“하는 생각뿐이었다.
막상 꿈에서 깨고 나서 더 놀라고 무섭고 기분 나빴던 기억이 난다.

그 꿈을 꾸고 난 후, 꿈 해몽을 할 줄 안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모든 미련을 다 끊고 떠났나 보다. 영영 남이 되어버렸나 봐. 오죽했으면 발을 끊고 갔겠어?”

그 말을 들으며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아. 내가 그렇게 미웠나 보구나. 발목을 끊고 이승을 떠나는 모습으로 나와의 인연을 끊으려 했을 만큼...’

그래서였을까?
이혼 후, 아이 때문에 아내와 통화를 할 일이 있을 때에도 난 가급적 말을 아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그건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아이를 만나겠다고 하거나 아이가 엄마를 만나겠다고 해서 약속 장소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언제부턴가 둘은 서로를 외면했다. 눈조차 마주치치 않았고, 서로에게 건넬 말이 있을 때는 아이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아내가 나를 거부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건네거나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아내는 어떤 생각으로 그랬을까?
나와 마찬가지로 내가 거부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나와는 말조차, 눈길조차 마주하기 싫어서였을까?

생각해보면 아내와도 즐겁고 행복했던 시기가 있었다.
여섯 살의 나이차이, 비록 사설학원이기는 했지만 가르치는 강사와 배우는 수강생으로 처음 만나서 설레는 마음과 어색한 만남을 거쳐서 뜨겁고 절절하게 사랑하는 시기를 거쳐서 ‘이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둘이 함께 살기로, 법적으로 부부임을 인정받게 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육년이 걸렸다.
어색함을 달래려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떨리는 가슴으로 손을 잡았던 기억도 난다.
내 자취방, 그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곳에서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첫 키스를 했었다.
친구에게 오십만 원을 주고 덜덜거리는 소형차를 샀던 날, 우리는 밤새 드라이브를 했었다. 운전이 서툴러서 멋지고 폼 나게 달리지도 못했고 구형 승용차라 창문도 손잡이를 돌려서 열어야 했다. 아마 에어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여름철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창문 다 열고 다녀야 했으니 참 궁상맞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를 몰고 멀리 경주까지 둘만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주말에는 강화도로, 양평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그때를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제법 행복했던 추억인가 보다.
결혼을 하고 나서 오래된 주공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고, 하도 집이 좁아 옷장마저 들여놓을 수 없어서 철제 행거를 사용했지만 둘만의 보금자리는 제법 아늑한 느낌이었다.
부모님께서 돈을 보태주신 덕에 결혼 2년차에 집을 샀다. 이사 간 아파트에서 딸아이가 태어났다.
이웃들에게는 결혼 3~4년이 지났는데도 갓 결혼한 신혼부부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재미있게 살았었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취향도 비슷해서 말도 잘 통했었다.
물론 서로 다툼도 있었다. 제법 거세게 싸운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 때의 그 부부싸움은 나중에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로 기억된다. 부부싸움이긴 했지만 대부분 잠들기 전에 화해를 했었고 그다지 심각한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제법 서로 잘 맞는다고 생각하며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을 했었지만, 정작 문제는 꽤나 엉뚱한 데서 터졌다.
그리고 그 엉뚱한 문제가 우리 부부 사이를 조금씩, 아니 꽤 빠르고 급격하게 갈라놓기 시작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닌 양쪽 집 가족에 관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사자 간의 문제가 아니니 화해를 하거나 해결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냉랭해진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서 갈라서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처음 만난 날부터 헤어지게 된 그 날까지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간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난 주말, 아이가 엄마를 만나서 하루를 자고 오기로 약속을 했기에, 약속장소에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아이만 데리고 그대로 떠나는 그녀의 차 뒤꽁무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무 그렇게 매몰차게 가지 마. 우리도 한 때는 서로 죽고 못 살던 날도 있었잖아. 마냥 행복하고, 서로가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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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혼 법정에서

2005년 10월 3일 월요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정동 서울남부 지방법원 205호 협의이혼대기실.
근 한 달여 만에 아내를 만났다.
아내? 맞나? 그 호칭을 써도 될까? 아직 법적으로는 부부이니 써도 되기는 하겠다.

대기실 앞 소파에 앉아 있는데 층계를 걸어 올라오는 아내가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아내는 지난봄에 내가 사 준 작은 MP3플레이어를 듣고 있었다. 하얀 이어폰 줄이 눈에 띄었다. 아내는 무심한 듯 내 옆에 앉았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내게 물었다.
“언제 시작이에요?”
“조금 기다리면 될 것 같아.”
시간을 확인한 아내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대기실로 들어오라는 안내를 듣고 일어섰다.
안에 들어가니 제법 넓은 대기실은 이혼서류를 손에 든 남녀들로 꽉 차 있었다.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따로 앉은 부부, 여전히 감정이 날카로워서 말싸움을 하는 부부, 또는 마치 이혼하지 않을 것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손을 맞잡고 있는 부부...
우리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협의이혼확인실이라는 또 다른 문으로 한 쌍의 부부가 들어간다. 불과 오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지나면 문이 열리고 이제는 남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은 두 남녀가 나오고, 또 다른 부부가 들어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를 호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음악 소리에 못 들었는지 내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천천히 이어폰을 뺐다.

판사, 그리고 두 명의 낮선 사람들이 우리 부부의 이혼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이혼의사가 있으십니까?”
“네.”

“아이 양육에 관해서는 서로 합의하신 겁니까?”
“네.”

“90일 이내에 관할구청에 서류를 제출하시면 이혼이 성립됩니다. 동일한 내용의 서류를 두 부 드립니다. 이 서류는 둘 중의 한 분만 가셔서 제출하시면 됩니다. 제출하신 날짜로 두 분의 이혼은 성립되는 겁니다. 만일 정해진 기일 안에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시면 본 이혼 건은 무효가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만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셔서 정해진 날짜까지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면 이혼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이혼의사가 있으시다면 다시 이혼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네.”

참 빠르다.
저렇게 중요한 사항을 모두 알려주고 친절하게 ‘부부가 남이 되는 방법’을 설명해주는데 오 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대기실을 거쳐 층계를 내려가며 물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전 회사 들어가 봐야 해요.”
“응. 내 차로 데려다 줄까?”
“아뇨. 그냥 갈게요.”
“전철역까지라도...”
“됐어요. 알아서 갈게요.”

아내는, 아니 그녀는 그렇게 돌아서서 갔다.

난 안다.
그녀는 지금 태연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그녀, 12년이라는 시간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 생활을 하며 알게 된 그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아까 대기실에서, 음악을 듣는 그녀의 손을 보았었다.
그녀의 긴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지 태연한 척하는 것뿐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돌아서 가는 그녀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아마도 그녀는 눈물을 참기 위해 커다랗게 심호흡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 내 아이의 엄마, 내 인생에서 12년을 함께 했던 그녀는 그런 여자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일이 닥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여자.
아니 그렇게 차분한 것처럼 애써 꾸미는 여자,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냉정한 척 하는 여자가 그녀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래왔다. 그리고 그런 애씀이 버티기 힘들 때, 그녀는 항상 내게 안겼다.
내 가슴에 안겨 엉엉 울었고, 넋두리를 했으며, 그렇게 떨리는 가슴을 달랬다.

지금 그녀가 떨고 있다.
눈물을 참고 있다.
후들대는 두 다리를 애써 달래며 서둘러 걷고 있다.
그녀를 안아주어야 하는데...
그녀를 다독여주어야 하는데...
그녀를 달래주고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는데...
난 그냥 서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서류를 뒤적이며 이혼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들은 나를, 그녀를 모른다.
그들은 벌써 우리를 잊었다. 아니 애초에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런 그들이 우리의 이혼을 결정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생각해보니 그들은 제대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자신들의 말 몇 마디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남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에게 제대로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 그 사람들이 우리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앉아서 창문을 열었다.
가을이지만 날씨는 제법 더웠다.
담배를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천천히 더 천천히...
그렇게 담배를 한 대 다 피우고 나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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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 역사를 이루는 과정에서 또 다른 아픔이 있고, 그 아픔으로 깨어지는 가정이 생긴다.
사실, 깨어지는 가정의 대부분은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오해는 불신을 낳고, 불신은 믿음을 배반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와 함께 사람이 겪는 비극은 모두 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수만 년을 이어온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그 오랜 기간 동안 함께 했던 남자와 여자의 오해로 쌓아올린 벽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쌓여가는 오해의 벽이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오해는 풀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오래된 오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도 도장을 찍고 판사 앞에서 갈라서는 ‘이혼’이라는 이름을 선택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나에게서 떠난, 아니 내가 떠나버린 아이엄마에게 이 글을 선물하고 싶다. 비록 인연이 짧아 오래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이 글은 이혼한 전 아내에게 하는 나의 구차한 변명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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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 공식적인 통계수치는 이혼율이 54%라고 보고하고 있다. 더불어 서울, 경기, 인천 지역의 이혼율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한다.

혼례를 치르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이어가는 성스럽고 의미 있는 행사이다. 그런데 그렇게 혼례를 치른 100쌍 중에서 54쌍이 다시 남남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인구증가율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면에는 분명 이혼하는 가정이 한몫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혼을 결정하는 과정에는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부부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홧김에 하는 이혼이든, 오랜 기간 고민 끝에 내린 이혼이든, 이혼을 하게 되면 그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문제가 앞을 막아선다.
사실 이혼을 하게 되면 이혼을 하는 순간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장벽이 앞을 막아서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다.
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고 이혼을 하게 되었고, 부딪히면서 깨지면서 후회를 하기도 하고 이를 악물기도 한다.
나의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조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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