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 안드리치 단편집 - 지만지고전천출 34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 단편집 / 김지향 역 / 지만지 고전선집

우선, 이 리뷰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짧게 적자면, 도서출판 지만지에서 꽤 많은 분량의 고전을 시리즈로 펴내나보다.
그리고 그 출간 기념 이벤트 중의 하나로 리뷰어를 모집했다. 6개월간 매달 한 권씩의 신간을 리뷰어가 선택하면 출판사에서 보내주고, 다 읽고 리뷰를 작성하는... 뭐 그런 거다.
그 첫 번째로 선택해서 받은 책이 바로 이 [이보 안드리치 단편집]이다.

우선, 이보 안드리치라는 다소 생소한 지은이에 대한 설명을 보도록 하자.
이보 안드리치는 1892년 10월 10일 보스니아의 작은 마을 트라브니크에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 안툰과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 태어났다. 두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는 죽고 그는 어머니를 떠나 고모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는 9세이던 1911년, 사라예보의 월간 문학지 <보스니아의 요정>을 통해 시를 발표하고, 26세인 1918년 산문시집 <흑해로부터>를 발표하며 등단했다고 한다.
두 번째 시집인 <불안>을 마지막으로 시는 더 이상 쓰지 않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외교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역사학 박사학위도 받았으며, <드리니 강의 다리>라는 소설을 발표하고 196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5년 3월 13일 사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보 안드리치라는 소설가가 있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그의 작품 경향이 어떤지도 몰랐다.
이 책은 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맞물리는 느낌이 강한 단편 여덟 편을 담고 있다.
[나는 어떻게 책과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는가?]라는 긴 제목을 갖고 있는 지극히 짧은 단편부터 [파노라마], [서커스], [아이들], [창], [탑], [책], [아스카와 늑대]까지...

이 책의 저자인 이보 안드리치는 보스니아 출신이라고 한다. 보스니아라는 말은 당장 내게 [보스니아 내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 떠오를 그 어떤 낱말도 없다. 보스니아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느낌은 이렇게 빈약하다.
그나마 기껏 떠오르는 것이 내전이라니...
결국 나에게 보스니아는 그냥 신문 기사로 가끔 읽는 '내전'이나 일으키는 나라였나보다. 그들의 문화나 언어, 민족의 특성이니 하는 것들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소수민족, 비주류 국가, 민족 간의 유혈사태 정도나 겨우 꿸만한 정도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런 나라 출신 작가의 단편 소설을 읽었다.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닌 나라 출신 작가가 쓴 작품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리 두껍지 않은 그의 단편집을 다 읽고 난 느낌은, 머언 추억 여행을 하고 온 느낌이다. 마치 나 어릴 적 동네에서 벌어진 짧은 이야기들, 그리고 그 속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나의 뒷모습... 이런 걸 들여다 본 느낌, 내 어린 시절의 흑백사진이다.
이것이 이보 안드리치의 단편집에서 읽어낸 내 감상평이다.

첫 번째 단편인 >[나는 어떻게 책과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는가?]는 참 짧다. 단순히 짧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게 단편소설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냥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 그 궁핍하던 그 시절에 어떻게 해서 문학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떠올리는 가벼운 수필 같은 느낌이다. 단편집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첫 번째 단편인 [나는...]은 작가의 과거 회상이라는 생각일 뿐이다.
그는 길거리 서점의 진열대를 통해 들여다 본 책의 표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들여다 본 책의 표지와 제목은 상상을 자극했고, 그 상상의 나래를 통해 문학적 감수성을 기르게 되었다는, 그 상상 속에서 스스로 문학을 짓고 허무는 시기를 보냈다는 일종의 자기고백같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가난하고 배고팠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과도 그 맥이 닿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두 번째 이야기인 [파노라마]는 우리도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이다. 책에 나오는 파노라마는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인데, 책에서는 커다란 가게 안에 여럿이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동시에 다른 사진을 보는 형태이고, 내가 기억하는 것은 망원경처럼 생긴 곳에 두 눈을 가져다 대고 레버를 누를 때마다 한 장씩 새로운 사진이 나타나는 차이가 있다.
주인공은 새로운 파노라마가 들어올 때마다 그걸 보기 위해 동전을 준비해야 했고 그걸 통해 절대 갈 수 없는 외국, 그 곳에 대한 간접경험과 ‘정지된 사진’을 통해 만나는 상상 속에서 ‘움직이는 일상’을 이야기한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보았던 ‘레버를 눌러가며 사진을 보는’ 파노라마를 기억하고 있고, 그 사진을 통해 즐거움을 얻었던 기억이 있다.
[서커스]는 주인공의 마을에 새로 들어선 서커스 쇼를 구경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서커스 단장 부부와 단장의 정부에 대한 -결국 비극으로 종결되는- 이야기, 그리고 성인이 되어 그 시절을 추억하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인이 된 주인공과 어린 시절의 주인공의 시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약간 난해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어린 시절에 보았던 서커스의 추억, 그리고 그 멋진 쇼를 보여주었던 그들도 결국 사랑과 미움이 있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고 끝을 맺는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아이들, 창, 탑, 책은 모두 주인공의 시점에서 어린 시절, 더구나 음울하고 궁핍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엇이든 풍족하지 못한 시절,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아가야 하는 주인공과 그의 가족,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한 톤 가라앉고 탁한, 뿌연 먼지를 날리는 창가의 모습 같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제본이 풀어져서 한 학기 내내 고민만 하고 있는 심약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책]의 경우는 가볍게 보자면 내성적이고 소심한 주인공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이 이야기도 가난의 시대이기에 가능한 에피소드일 것이다.

대낮에도 제대로 빛이 들지 않으며 불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낡은 판잣집, 그리고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 그마저 제대로 비추지 못하게 날리는 먼지, 그 뿌연 느낌...
이 소설의 주인공이 처한 환경에 대한 묘사를 보며 머릿속에 그린 모습이다. 그렇게 답답한 모습, 하지만 탁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는 마치 캄캄한 동굴 속에서 만나는 빛줄기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가능성, 그 희망이 아닐까 싶다.
음울하고 어려운 현실과 대비되는 미래에 대한 희망...
이보 안드리치의 우울해 보이는 단편들 속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기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 단편인 [아스카와 늑대]는 조금 생뚱맞지만 우화이다. 이솝 우화와 같은 그런 것 말이다.
아스카라는 어린 양, 발레를 배우고 호기심이 많은 아스카, 그가 막다른 곳에서 마주친 늙고 교활한 늑대,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아스카의 춤...
삶을 위한 춤, 혹은 죽음을 앞에 둔 춤, 아스카의 춤은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너무도 짧은 단편 우화라 아쉽기는 하지만 결국 아스카가 맞닥트린 죽음,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우화로 이보 안드리치가 평생 동안 간직하게 되는 그의 작품을 꿰는 맥을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다른 작품들도 접해보고 싶다.
단지 여덟 편의 짧은 단편만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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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 신드롬 -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김진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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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타트 신드롬 - 김진세 / 위즈덤 하우스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스타트 신드롬, 저자인 김진세는 여성 심리와 스트레스에 관한 전문가라고 한다. 저자의 소개에는 여자보다 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정신과 전문의로 알려져 있다고 적고 있다.
여자보다 더 여자의 마음을 잘 알면... 흠, 나 같으면 카사노바가 될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무엇인가 새로운 시작을 할 때 겪게 되는 심리적인 고통과 그 고통을 피하려는 갖가지 증상을 다루고 있다.
우선, 크게 네 가지 분야를 정해서 각각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형태로 구성되어있다.

성격, 사랑, 관계, 일...
생각해보니 한 사람에게 있어서 위의 네 가지 분야에서 성공적이라면 그 삶이 그다지 불쌍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몇 가지를 꼽자면...
우선, 부드럽고 속삭이는 느낌이 드는 가벼운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 어디를 펼쳐봐도 강하게 주장하거나, 목소리 큰 느낌이 드는 문장이 없다.
그냥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 좋은 선배의 이야기 같은 느낌...

게다가 저자가 겪은 다양한 사례를 적절하게 소개하는 형식이다 보니 공감대의 형성도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아마도 저자가 소개하는 사례들은 저자가 경험했던 다양한 사례의 특징을 가상의 인물의 성격으로 묘사한 것 같다.
하지만 기본적인 특징이 뚜렷하다보니 나, 또는 내 주위의 어떤 사람과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니 책을 읽는 데에 몰입이 잘 된다.

이 두 가지 특징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된다.
장점으로는, 편하고 쉽게 읽히고 공감이 잘 된다는 점이다. 당연히 책장도 잘 넘어가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그로 인해 ‘아, 내가 갖고 있던 고민이 이런 요인이 있어서 그렇구나. 나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겠네.’ 또는 ‘음, 알고 보니 이런 거였군. 그렇다면 나도 시도를 해볼까?’와 같은 결심을 하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몇 부분에서 크게 공감하게 되고 밑줄까지 긋게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아쉬운 것은 위에 언급한 이런 부분이 다른 한 편으로는 단점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마음 편하게 읽고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배려의 마음에서 가능한 한 딱딱하지 않고 심각하지 않게 글을 풀어쓴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저자의 마음 씀씀이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문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하는 부분과 해결하고 싶다는 욕구는 충분히 이끌어내는데 반해 그 해결책으로 내놓은 부분이 약하다는 생각이다.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당사자는 너무 힘들고 고민이 됩니다. 성격마저 부정적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문제는 크든 적든 누구나 겪는 것입니다. 너무 심각한 고민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시고, 현재 처한 상황을 조금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세요. 사실 당신이 갖고 있는 문제는 당신만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해결책은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단지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훨씬 좋아질 수 있습니다. 혹시 아무리 하려고 노력해도 안 된다면, 전문가의 상담과 함께 적절한 약물을 복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됩니다.]
이 책의 전반적인 논조는 바로 위의 글과 같다.
따라서 책을 읽다보면, ‘내가 갖고 있는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증상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해결을 위한 조언이 너무 피상적이지 않나 싶다.

만일 해결을 위한 조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가령,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기 위한 3주간의 훈련] 뭐, 이런 식의 제목에 날짜 별로 시도해 볼 다양한 방법들을 알려준다던가, [나쁜 남자에게 끌리지 않기 위한 자가 진단법 - 나는 나쁜 남자의 먹이가 되기 쉬운 타입인가?] 이런 식의 제목과 함께 자가 진단을 위한 문항을 나열하고 점수 별로 구체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와 같은 조언도 함께 있었다면 실생활에 응용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서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눈에 띄는 몇 가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관계에 관한 소개에 나오는 분노조절에 대한 부분에 분노를 관리하기 위한 네 가지 검토 항목이 나온다.
중요한가, 정당한가, 변경가능한가, 가치가 있는가...
이 네 개의 질문 중에서 하나라도 ‘아니오’에 해당한다면 분노를 가라앉히도록 하자. 뭐 이런 이야기이다.
그리고 에필로그에는 처음 걸음을 걷게 되는 아기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의 유머러스함을 엿보게 된다.
“한걸음 떼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꽈당’하고 넘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아기는 생각하지요. ‘젠장, 다시는 걷지 말아야지.’”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그림은, 퉁퉁한 아기 하나가 책상다리로 앉아서 얼굴 잔뜩 찡그리고 얼굴이 벌게지는 그런 모습이다.
각 장 별로 저자는 자신이 경험한 스타트 신드롬을 간략하게 적었다. 전문가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런 ‘스타트 신드롬’을 겪고 있으니, 우리의 고민은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그런 메시지일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평소에 심각한 문제라고 고민하던 것들이 사실은 나만의 문제도 아니고 평생 해결할 수 없는 기질적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자각과 함께 조금만 노력하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조언과 응원의 메시지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가까운 책장에 잘 꼽아두고서, 가끔 힘겹거나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 그냥 아무 곳이나 펼쳐들고 편하게 읽다보면 저자가 옆에서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싶다.

“당신,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되요.
자,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그 힘든 짐을 내려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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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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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없는 세상 / 엘런 와이즈먼 / 이한종 / 렌덤하우스

이 책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인류가 사라진다면 지구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황당한 문장을 화두로 던지고 시작한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날한시에 쏙 빠져나가버린다고 가정하면 이 지구는 그 날부터 어떻게 변할까?
생각해보니 꽤 그럴듯하고 재미있는 가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보는 중에 우연찮게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을 볼 기회가 있었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우주에서 외계인이 지구인들을 없애기 위해 날아온다. 그 영화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이런 말을 한다.
“지구가 멸망하면 인간도 사라지지만 인간이 사라지면 지구는 살 수 있다.”
어쩌면 이 말이 이 책의 가장 큰 주제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저자 엘런 와이즈먼은 유명 저널리스트이고 애리조나 대학의 국제저널리즘 교수라고 한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그는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를 비롯하여 폴란드-벨로루시 국경 원시림, 터키와 북키프로스의 유적지, 체르노빌, 미크로네시아, 아프리카, 아마존, 북극, 과테말라, 멕시코 등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직접 취재를 했다고 한다.

이 책의 중간쯤에는 우리나라 비무장지대를 취재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외국 사람이 쓴 책에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과 지명 등이 나오니 꽤 눈길을 끈다.

그는 저자 서문에도 우리나라 비무장지대를 취재한 소감에서 50년이라는 세월동안 방치된 그 곳에서 ‘인간없는 50’년이 주는 감동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쨌든 저자는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인간이 별 큰 고민 없이 만들어서 사용하고 버리는 각종 쓰레기라고 말한다.
플라스틱과 고무류 등의 각종 화학제품들은 인간이 사라지고도 한동안 이 지구를 뒤덮고 있을 것이며 어쩌면 그로 인해 인간 이전의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을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시간의 단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인간이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시간은 길어야 백년 조금 넘어선 그 언저리다. 하지만 그 정도의 기간을 살고 떠나는 인간들이 이 지구에 뿌려놓은 온갖 화학제품들은 인간이 사라지고도 오래도록-몇 십 년이나 몇 백 년 수준이 아니다. 몇 천 년에서 몇 만 년, 아니 그 이상의 사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아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전기 공급에 의해 유지되는 온갖 장비, 기기, 그리고 발전소와 같은 거대한 시설들이다.
핵연료를 다루는 시설들, 댐과 같은 거대한 물막이를 조정하는 기기들이 모두 전기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사라지고 이런 것들을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제일먼저 시작되는 것은 밤의 암흑이다.
도시의 모든 건물은 일주일에서 길어야 몇 달, 몇 년 수준이면 전기가 끊기게 되고 밤이면 암흑이 찾아올 것이며 전기 공급의 중단은 앞서 언급한 시설과 설비의 가동 중단을 가져온다.
그렇게 되면 핵은 터지거나 노출될 것이고 방사능은 지구를 오염시킬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는 체르노빌까지 직접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 물을 막아두고 있는 온갖 댐들은 결국 물이 넘쳐흐르다가 터져버릴 것이고 그렇게 온갖 난리가 지구를 흔들게 될 것이라고 한다.
사방에서 상상할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불을 끄겠다고 나설 수 없으므로 엄청난 수준의 비가 내리거나, 더 이상 탈 것이 없을 때까지 화재는 지구를 휩쓸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구의 이쪽에서는 초대형 화재로 사라지고, 반대편에서는 거대한 댐이 터져서 물난리가 날 것이다.
사람이 키우는 애완동물은 제일 먼저 야생동물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온갖 비극이 지구를 휩쓸고 난 다음에 이 지구는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체르노빌, 최악의 핵폭발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는 그 도시를 다녀온 저자는 방사능에 의해 초토화된 도시를 취재하면서 희망을 보았다고 한다.
도시 전체가 사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건물과 시설들이 멈춰버린 그 곳, 나무와 풀들이 타버리고 방사능에 고사하고 만 그곳에서 그는 새로 시작하는 생명을 보게 된다.
절대 복구될 수 없던 체르노빌은 사람이 떠나고 나니 스스로 알아서 생명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다큐멘터리 영화 [인류 멸망 그 후]라는 작품에서 영상으로 확인을 했는데, 죽어버린 나무, 시커멓게 타들어간 흙과 돌 사이로 새로운 싹이 돋고, 무언지 모를 동물들이 살고 있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악의 사고를 내고 도망가 버린 인간의 무책임함을 비웃듯이 체르노빌의 생명은 꿈틀거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책의 결론은 이렇다.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오래도록 이 지구는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그게 얼마나 오랜 시간일지는 저자 스스로도 단언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몇 만 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지구는 인간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 되어 있을 것이고, 인간 이전의 세상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겠지만 여전히 꿈틀대는 생명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었다.
인간이 없어지고 나면 과연 이 지구에 인간이 있었던 흔적이 얼마나 오래 남아 있을까?
만일 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진화를 통해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날이 온다면 그 때의 그 지적 생물체는 과거에 인간이라는 종이 살았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모든 것들, 컴퓨터니 뭐니 하는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기록매체들은 절대 오래도록 남아있지 못할 것이고 우리의 기록을 보존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이렇게 문명을 발전시켰는데, 점토판에 새긴 상형문자만큼 오래도록 남길 수 있는 저장매체는 없다고 한다.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건축물처럼 오래 갈 건물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장은 미래에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화학제품들마저 모두 분해되고 말 그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마 인간이 살았던 흔적은 전무하다고 말해도 될 만큼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그 대통령 네 명의 얼굴이 새겨진 바위산, 그 조각은 어쩌면 그 오랜 세월을 견디어낼 것이라고 한다.
그 바위의 재질은 화강암인데 이게 마모에 대한 내구성이 꽤 세다고 한다.
만일 벼락이나 뭐 그런 게 떨어져서 조각을 내버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바위산은 그 오랜 기간 동안에도 마모되는 양이 생각보다 적어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걸 대단하다고 감탄해야 할지, 그토록 깊게 팬 흔적이 안타깝다고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만일 새로 출현한 지적 생명체가 그 바위산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냥 자연의 일부로 생각할까?
아니면 신의 모습?
어쩌면 저렇게 생긴 사람들이 과거에 살았었다는 걸 알아챌까?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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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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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리처드 도킨스 / 이한음 역 / 김영사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이 책은 워낙 이슈가 되었고, 찬반 의견이 팽팽했던 데다가 반론을 펼친 책도 나올 정도로 유명하니만큼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몇 권 주문할 때 같이 주문했다.
제법 두툼한데다가 빨간색과 흰색을 적당히 나눈 표지가 제법 강한 인상을 풍겼다.

이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나의 종교관을 정리해봐야겠다.
우선, 아버지는 어릴 적에 교회를 꽤 열심히 다니셨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시절이 있지만 고학생 시절, 어려운 생활을 하시면서 종교와 멀어지셔서 지금까지 무교로 살고 계시다.
어머니는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하기는 뭣하지만 때가 되면 절에도 들르시고 미아리 점집에도 가끔 가시는 정도... 가장 전형적인 토속신앙이 아닐까 싶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놀러간 동네 교회 마당에서 전도사의 이런저런 말을 들으며 ‘야, 너무 열심히 설득하신다. 교회 가기 싫다고 말하기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주 일요일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말은 물론이고, 토요일, 금요 철야기도, 수요저녁예배에 새벽기도까지 열심히 참여하는 상황이 되었다.
예수 믿는다는 놈이 나쁜 짓 한다거나 공부도 못한다는 손가락질을 받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성실하게 생활했던 것이 기억난다.
짬 날 때마다 성경책을 꺼내어 읽었고 아마 적어도 두세 번 정도 성경을 완독했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겠다는 목표까지 세웠었다.

그런데 그런 생활 - 예수님 욕 먹이지 않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 이 너무 힘들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적당히 교회 다니고, 적당히 세속과 어울리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교회에서 만나면 반가운 기독교 신자, 교회 밖에서 보면 그냥 기독교와는 관계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고민되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조금씩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내기도 했고 그런 생활이 나 스스로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교회에서 전도사님 한 분에게 엉엉 울면서 고민을 이야기했다.
너무 힘들다고, 원래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미리 말하자면,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뎌봐라. 신앙이란 원래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것이고 그렇게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더 많이 기도해라.’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고통스럽다고 느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전도사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러지 않아도 돼. 너무 힘들게 살지 마. 어린 나이에 그렇게 힘들게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좋은 건 아냐. 적당히 해도 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놀고 해야지.”
나를 위로한다고 하신 말씀인데, 이 말이 난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용납되지 않았다.
종교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나를 통해 세상 사람들은 신을 보는 것일 텐데 어떻게 적당히 한다는 말인가?
적당히 대강대강 한다면 그게 진실한 믿음일 수 있을까?
그로 인해 한동안 번민했었고, 결국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난 몸은 교회에 있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예수님, 하나님과 이별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한동안 나의 교회생활은 계속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유치부 선생도 했었고, 군대에 가서도 교회에 꼬박꼬박 나갔다.
그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친교 쌓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어느 누구도 나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의 그 힘들게 신앙을 지키려 몸부림치던 때보다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보아주었다.
교회에서 금하는 술과 담배를 중 3때부터 시작해서 교회에서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돌아서서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가면 나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었다.
연애를 했고, 섹스를 했다.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음란한 놀이도 하면서, 그래도 난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체 했었다.
내가 교회에서 발을 끊은 건 아마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나름대로 바쁘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교회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이 책의 원 제목은 [신의 망상]이란다. 오해나 오도 정도로 적절히 수위를 낮출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망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에 반해 [만들어진 신]이라는 번역서의 제목은 훨씬 수위를 낮춘 느낌이다.

이 책은 처음 시작부터 상당히 확실하고 흔들림 없는 논조를 유지한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 로버트 퍼시그]
이 문장을 속표지 다음 장에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내용은 진화론을 근거로 하여 창조론의 허구를 증명하고, 종교가 크고 작은 온갖 사건들로 인류에 끼친 해악, 그리고 온건한 신앙마저도 위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읽게 되면서 BBC에서 방송했다는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도 보았다. 책과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같지만, 책은 꼼꼼하게 이야기하고 있고 다큐멘터리는 전체적인 윤곽과 중요한 부분만 부각시켜서 만든 것 같다.
생각해보니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실 속에서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사건과 사고, 그리고 전쟁의 광포함은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뚤어진 종교관]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등장하지 않는가?
지금 이 시간도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전쟁에서부터, 그 유명한 911 테러사건도 결국은 종교적인 신념과 갈등, 그로 인한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벌어지거나,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개인적 수준에서 벌어지는 종교재판들 - 단군상을 훼손한 기독교 집단, 종교적 신념에 의한 살인이나 폭력 등 -이 발생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비뚤어진 종교관, 정신이상에 의한 망상...”

그런데 그 사건의 당사자가 스스로를 [비뚤어진 종교관이나 정신이상에 의한 망상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신이 그러한 계시를 내렸다고 말하고 굳게 믿는다.

그들 역시 그런 사건 이전에는 보통의 온건한 종교 신자였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왔다는 점을 간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창조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구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과학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훨씬 짧게 산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이 책은 기독교, 가톨릭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종교를 논박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저자는 그 이유를 기독교, 가톨릭교가 특히 더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들 종교가 더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종교적인 잘못은 꽤 큰 충격을 주었다.
가령, <에드가르도 모르타라의 유괴>라는 제목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사건이 그렇다.
종교적인 이유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부유한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게 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를 보모로 두게 된다. 그리고 그 보모는 부모의 눈을 피해 몰래 [손가락에 물을 찍어 아기의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세례의 의식을 행한다.
나중에-언제가 되었든 상관없다. 설령 몇 년이 지나도...-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가톨릭 성직자들이 알게 되면 그 아기, 혹은 나이를 먹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의 어린이가 된 그 아이를 납치해서 가톨릭 학교에 강제로 입학시킨다.
세례를 받은 가톨릭의 아이를 다른 종교를 가진 부모에게서 양육시킬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란다.
그리고 그 아이의 부모는 절대로 그 아이를 다시 데려오지 못한다. 데려오려면 자신의 종교를 부인하고 가톨릭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 부모 역시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도 무수히 다양한 [종교적 폭력과 그 피해]사례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온건한 종교인은 결국 [비틀어진 종교에 의해 비상식적인 일을 저지르는] 잘못된 종교인이 자라날 토양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므로 애초에 온건한 종교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사실 절대 타협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종교적 신념이다.
내가 믿는 절대자가 진리를 설파했고 나는 그것을 믿는데 어떻게 타협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건 내가 기독교를 믿던 그 때에도 내가 가장 힘들어하고 고민했던 부분이다.

그리고 종교를 믿거나, 스스로는 믿지 않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결국 종교에 의한 피해를 묵인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어떠한 이유를 들이대더라도 신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을 한다.
창조론은 다양한 가설을 내놓고 있다.
지적 설계론이 최근에 각광받는 이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킨스는 이렇게 반문한다.
‘지적 설계를 할 정도로 뛰어난 존재는 결코 먼저 만들어질 수 없다. 그 대단히 복잡하고 뛰어난 설계자는 [지적 설계론]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도대체 누가 만들었다는 말인가?’ 뭐 대충 이렇게 반문한 걸로 기억한다.
창조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은 신의 의지에 따라 꼭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창조된 피조물은 절대 멸종할 수 없다. 멸종을 한다면 그것 자체가 신의 뜻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이 책에서 읽은 것은 아니고 다른 책에서 읽은 부분인데 창조론의 맹점을 가장 적절하게 지적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영혼이 없고, 내세가 없고,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만일 신이 없고, 인간도 그냥 죽는 순간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라면 도덕과 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도 내세가 있고, 천국이 있다고 믿는 것이야 말로 인간에게 구원과 힘이 되는 것이 아닌가?

설령 위의 말이 모두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이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 저자의 반론이고, 나 역시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종교가 필요하고, 신이 있으면 좋을 이유는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신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이렇게도 가능할 것 같다.
[돈도 없고, 벌 능력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밥 끼니 걱정하며 살아야 하고 아이에게 무능한 부모가 되어야 하고 영원히 그 가난을 대물림하는 건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부자이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왜? 인간은 존엄하니까...]

어쨌든 이 책은 종교가 주는 긍정적인 요소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긍정적인 요소가 진실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리는 절대 없지만, 만일에 죽어서 신을 만나게 된다면 자신은 떳떳하게 이렇게 말하겠다고 한다. [신이여. 증거가 부족했습니다. 너무나도...]
종교에서는-아마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다 그렇겠지만- 이렇게 말한다.
[무조건 믿어라. 증거가 없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증거를 보아야만 믿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믿음을 버리지 말라. 그 댓가는 바로 죽은 이후의 천국이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종교의 가장 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에서 믿는 신에 대한 명확한 증거와 자료를 구비하고 그것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모습이 아니다.
종교는 ‘[그렇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 아니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는 것’을 최대의 미덕으로 삼는다.

그 이유로 저자는 이렇게 말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종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누가 봐도 명백하게 [신의 증거]는 없는데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건 종교가 고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종교의 경전에서는 무수히 많은 [신에 의한 사건들]을 나열하지만 그 사건들을 우리의 눈으로 또 다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신에게 올리는 기도 역시 비판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심지어 이런 실험도 있었다고 한다.
환자들을 여럿 모아 놓고 기도에 따라 병이 낫는 데에 차이가 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실험 대상이 된 환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A는 종교인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를 해준다. B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C에게는 기도를 해주고 그 사실을 알려준다.
A와 B는 전혀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C의 경우는 놀랍게도 오히려 더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 때문에 빨리 나아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작용해서 오히려 환자가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과연 그렇게 무섭고 괴로운 일인지 반문한다.
신을 믿지 않고,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은 종교인이 종교에 투자하는 시간만큼을 자신의 현재 삶과 주변에 투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영적이고 고귀한 삶을 살 수 있다.
오히려 신이라는 잘못을 걷어냄으로써 더 풍요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생각해보자.
911테러도,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 간의 전쟁도 없는 세상.
종교로 인해 벌어진 역사속의 온갖 다양한 비극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신이라는 가치가 사라지면 인간은 무엇에 그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살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기독교의 신을 믿지 않게 되던 그때부터 항상 떠나지 않는 고민은 그런 것이었다.

정말 신이 있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그 온갖 일들, 신을 증명하는 그 사건들이 왜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몇 년 전 부터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다양한 고대설화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조금씩 머리를 스쳐갔다.
‘성경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참 많은 곳에서 있었구나.’

이건 둘 중의 하나다.
성경이 다른 이야기의 짜깁기던가, 정말 그런 일이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기록된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씩 윤색이 된 것이던가...

나 역시 신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다.

[신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난 지금까지 살던 것처럼 앞으로도 열심히 살면 된다는 것이다.
살다가 언젠가 신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나타난다면 그 증거를 보아서 신을 믿으면 되고, 설령 증거가 없어서 죽는 날까지 신을 믿을 기회가 없다면 역시 그대로 살면 된다.
만일 신이 [자신이 있다는 증거를 보이지 않고 믿으라고 할 만큼] 쩨쩨한 존재라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뭐.

현대의 미국, 대통령이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참 대단하지 않나 싶다.
미국은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누가 보아도 분명한 기독교 국가인데...


리처드 도킨스의 또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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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지론자 2009-02-1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기 리처도 도킨스는 옥스포드 대학 교수로 영국인인걸로 알고있는데 ^^

노랑잠수함 2009-02-1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그러게요.
제가 왜 이 책이 미국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런 어이없는...
죄송합니다.ㅠㅠ
그냥 지우는 것도 그래서... 줄을 좌악!!! 그어버렸습니다.^^

sk-1219 2009-03-1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죽은이후에 천국이 오는걸 별로 달가와하지 않아요..지금 사는 순간이 천국인게 중요한거지 사는게 고통인데, 죽은뒤에 오는 천국을 왜 기다려야하는거죠? 예수불신 지옥이라는 전도방법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1.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 권영일 옮김 - 위즈덤 하우스
2. 나이팅케일의 침묵 - 권영일 옮김 - 위즈덤 하우스
3. 제너럴 루주의 개선 - 권영일 옮김 - 위즈덤 하우스
4.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 -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내가 가이도 다케루의 소설을 읽게 된 계기는 이런 것이다.
어느 날, 자주 방문하는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서 [바티스타 팀의 영광]이라는 일본 드라마가 재미있다는 게시 글을 보았다.
검색을 해보니 11편짜리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구해서 보게 되었다.
‘11편이면 아무래도 이삼일은 걸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여유 있게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
저녁 식사를 하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꽤 잘 만든 드라마라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 마지막 편을 다 보고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다섯 시...
그냥 내리 11편을 다 보고 만 것이다.

다시 그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 가서 다 보았다는 글을 남겼는데 잠시 후, 댓글이 달렸다. 영화도 있단다, 게다가 원작이 소설이란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재미있단다.
일단 영화를 구해서 보았다.
아무래도 짧은 러닝타임의 영화로 마무리하기는 벅찼는지 조금 건너뛰는 느낌과 짜임새가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남자였던 ‘다구치’라는 얼빵한 주인공을 영화에서는 여자로 바뀌었다. 그 여배우는 [장미 없는 꽃집]에서의 간호사 역할을 했던 여 주인공.
흠, 미인이다.

결국 알라딘 사이트에 접속해서 [가이도 다케루]로 검색을 했다. 모두 네 권이 검색되었다.
모두 주문했다. 그동안 쌓인 적립금 덕분에 2만 원 정도에 네 권을 주문할 수 있었다.

드라마, 영화에 이어 소설로 만나는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은 또 다른 재미를 주었다.
우선,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른 느낌의 [다구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드라마가 가장 몰입하기 쉽게, 재미있게 만들어진 것 같다. 소설 보다 조금 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인은 쉽게 알기 어려운 외과 수술, 그 중에서도 ‘확장성 심장 어쩌구’하는 병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글만으로 이해하긴 어려운데, 드라마는 이걸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해서 아주 그럴 듯하게 설명했었다. 영화는 그래픽에 조금 더 돈을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쨌든 또 다른 밀실이라고 할 수 있는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으로 의심되는 수술 중 사망 사건’의 조사를 의뢰받은 사람은 별로 실력도 없고 쩨쩨한 ‘다구치’
거기에 후생성 소속의 조금은 엉뚱한 캐릭터 [시라토리]가 합류하고...
뭐, 시라토리라는 사람이 말하는 면담기법(?), [페시브 페이즈]와 [액티브 페이즈]가 어쩌고 하는 부분은 실제 존재하는 기법인지는 모르지만 제법 그럴 듯 하다.

그렇게 해서 범인을 찾고, 그보다 더 깊숙한 문제점을 짚어내고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나이팅게일의 침묵.
첫 번째 이야기, 바티스타 팀의 영광이 지난지 10개월...
병원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입원하게 된 전설적인 가수 [사에코]와 병원의 간호사 [사요]
그 둘의 노래와 그 노래에 얽힌 사건의 전개.
[망막아종]이라는 병으로 안구를 적출해야 하는 소년, 그 소년의 아버지는 무위도식에 애비노릇마저 포기한 인간.
그 아버지에게서 수술 동의서를 받기 위해 노력하던 간호사 사요.
그 망할 아버지는 토막살인의 희생자가 되고, MRI로 검사를 받던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간호사와 그로 인해 희한한 MRI결과를 받아들고 놀라는 의료진...

조금은 판타스틱한 부분도 있고, 이것저것 꿰어 맞춘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시 책장은 제법 잘 넘어간다.
첫 번째 이야기와 비교하자면 약간 더 상상력이 가미되었다고 할까?

여기에서 [시라토리]가 [다마고치]를 가지고 노는 부분이 몇 군데 등장한다. 한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바로 그 다마고치 게임...
내 책상 서랍에도 오리지날 다마고치가 하나 있는데...
왠지 조금은 더 친숙한 느낌?

세 번째 이야기, 제너럴 루주의 귀환.
역자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원래 [나이팅게일의 침묵]과 [제너럴 루주의 귀환]은 한 편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분량도 너무 많고 해서 출판사에서 둘로 나누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은 원래 하나였지만 둘로 나뉘어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렇겠지만 이 두 권은 처음 시작 부분과 중간 중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가이도 다케루의 소설의 특성 중의 하나가 날짜와 시간을 소제목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 날짜도 둘이 겹치기도 하고 하루, 이틀 차이로 나열되기도 한다.

날짜를 기준으로 둘을 중간 중간 삽입하면 하나의 책으로 맞출 수 있는 셈...

어쨌든 이 책은 오렌지 병동이라고 불리우는 구급병동의 책임자로 있는 [하야미]의 불법 거래를 둘러싼 이야기.
읽으면서 조금씩 커지다가 나중에 꽤 큼직하게 펼쳐지는 반전이 재미있다.

그리고 전작과는 다르게 제법 애절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특히 이 책은 전작 세편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일단 전작들은 같은 무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벌어지는 이야기들이고 등장인물들도 중복된다. 특히 [다구치]와 [시라토리]가 사건을 해결하는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하지만, 이 책은 다른 무대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이다.

조금은 복잡한 일본의 정치적 사회 복지적 이유로 대규모 병원의 의료진 충원이 대대적으로 행해지고, 그로 인해 지방의 의료진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간다.
결국 말단 지방의 의료시스템이 붕괴되고 그로 인해 오히려 서민들의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그 정책의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영역이 산부인과, 신생아 쪽이라는 설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른두 살의 아름다운 산부인과 의사 [소네자키 리에]
대학병원에 적을 두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며, 앞서 언급한 무너지는 지방의원 중의 하나인 [마리아 산부인과]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진료도 한다.

법적으로 금지된 대리모 출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투서로 사건이 커지고...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모든 직함을 버리고 [마리아 산부인과]의 원장으로 취임하고, 산부인과에서 불임클리닉으로 바꾸고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결말을 맺는데...

일본의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나라와 인식의 차이가 있는 부분 때문에 조금 불편하거나 감정적으로 동화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일본은 근친 연애나 결혼에 관해서 우리나라보다 꽤 개방적이다.
그러다보니 남매간의 사랑이야기도 종종 보이고, 부모 자식 간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딸의 불임을 위해 50이 넘은 엄마가 대리모가 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무래도 우리의 사고와는 다른 부분이기에 그다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긴 하다.

이렇게 네 권의 가이도 다케루의 소설을 읽었다.
네 권의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분량이 꽤 많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잘 넘어간다.”
다시 말해서 “재미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을 가끔 생각하며 읽어도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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