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파놉티콘(Panopticon)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레미 반담이 제안한 일종의 감옥 건축양식을 말합니다.  파놉티콘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것으로, 벤담이 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용자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을 제안하면서 이 말을 창안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에서는 파놉티콘은 문제 청소년들을 수감하는 시설의 이름인데, 시설의 정중앙에 꼭대기 층과 맞먹는 높이로 갑시탑이 솟아있는, 숨을 구석이 하나없는 완전 개방형 구조로 되어 있어 파놉티콘의 실제 어원과 같은 형태입니다.


그런데 파놉티콘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SF를 연상시키는 지, (파놉티콘이라는 단어가 뭔가 <엘리시움> 그런 영화같은 분위기를 연상시키지 않나요?) 저는 이 소설이 조지오웰의 소설 <1984>의 21세기 버젼이라고  무심코 생각하고 SF를 기대하였는데 현대물이었습니다.  그리고 24시간 내내 감시받는, 사생활이 없는 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책일 줄 알았는데, '감시받는다'는 것의 의미가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별로 없다는 것이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나이스 헨드릭스라는 13세정도의 소녀인데, 어린 나이지만 살인미수 혐의를 비롯하여 수많은 범죄 전력이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전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소녀가 파놉티콘으로 수용되면서 이미 이곳에 있는, 역시 희망이 없는 친구들을 만나고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인데, 어린 소녀의 이야기이지만 성장소설이라고는 전혀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과 추락만을 거듭하는 모습이 보여 읽는 내내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소설인데 주인공이 마약 등 약물을 사용하는 내용도 많이 나오면서 비현실적이고 환각적인 장면도 나오는 것이 영화 <트레인스포팅>하고 무척 닮아 있습니다. 다만, 영화 <트레인스포팅>은 그 타락한 과정 속에서도 젊음의 힘이 느껴지고, 이에 따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엿보이지만 이 작품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사실주의 영화 감독인 켄 로치가 영화화하기로 했다는데 어떤 작품이 나올 지 궁금합니다.


아나이스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따뜻한 말과 충고를 해주는 앵거스라는 사람이 주위에 있지만, 그보다는 한번 삐뚤어진 길을 걷고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에 대한 냉대를 이겨내지 못하면서 추락하는 모습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이야기의 중간에 나오는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의, 파놉티콘에서 지내는 아이들에 대한 차가운 시각이 아나이스를 비롯한 아이들의 추락과 타락을 촉진시키는 모습을 보면 파놉티콘은 불량청소년을 수용하고 감시하는 시설이 아니라 이 청소년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 신자유주의 경제의 무시무시한 경쟁사회가 우리들에게 누군가를 희생자로 만들고, 누군가를 미워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하게 되는데, 그러고보면 우리들도 우리들을 차갑게 감시하는 파놉티콘의 감시하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소설 <파놉티콘>이 타락한 비행 청소년들의 이야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6-02-0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드류대디님, 좋은밤되세요.^^

서니데이 2016-02-0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드류대디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설연휴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2016-02-05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