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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의 아들
에셀 릴리언 보이니치 지음, 김준수 옮김 / 마마미소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반 기독교 문학의 걸작이며, 버트란트 러셀이나 잭 런던 등이 극찬하였던 작품이라 해서 무척 기대를 하고 읽은 소설입니다. 한국어 판 제목 <추기경의 아들> 자체가 스포일러 역할을 해서 전반부의 이야기 진행은 대략적으로 예상한 바와 유사하게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 이유가 훗날 추기경이 되는 로렌초 몬타넬리 개인의 잘못과 다른 사람들의 음모 등으로 인한 것이기에 기독교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책을 읽었습니다.
이야기는 반정부운동의 조직원이었던 대학생 아서 버튼이 자신의 실수로 반정부 조직이 와해되고 책임추궁을 당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신부의 숨겨진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고 남미로 망명을 떠났다가 엄청난 어려움을 겪은 후 다시 돌아오면서 진행됩니다. 그 사이 그의 아버지 로렌초 몬타넬리는 추기경이 되었으며, 아서 버튼은 갯플라이라는 필명을 가지고 반정부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두 부자는 다시 대면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게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위한 무대를 만든 것으로, 저자가 만든 이러한 상황에 대한 사고실험을 해보자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되는데,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이슈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아직 죄수가 자신의 아들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수가 처형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 살려줘서 그 이후 그를 구출하기 위한 폭동이 나고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방조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선택을 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신부의 질문에, 갯플라이는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자기 짐은 자기가 지고 다녀야 한다면서 신이나 성인에게 매달려 징징거리는 기독교를 비난합니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서양철학의 시각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이슈는 자신도 신부의 원죄때문로 인해 고통받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보다 더했으면 더한) 심지어는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부활까지 했는데 왜 자기보다 (실제로 본적도 없고 그와 대화한 적도 없는) 예수를 사랑하냐고 묻습니다. (자신을 예수보다 사랑한다면 추기경이라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도우라는 이야기같습니다) 하지만, (책에 나온 표현을 인용하자면) 갈리리 사람이 이깁니다. 결국, 로렌초 신부에게는 아들보다 자신의 명예, 자리, 그리고 구원이 더 소중하였던 셈입니다. 즉, 어떤 가치있는 것을 핑계댈 수 있지 모르지만, 결국은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하던) 아들보다 자신을 중요시여기는 이기심이 바로 기독교의 정체라는 것을 말한셈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핵심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대표되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아닌 외부 사회에 속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조건없는 사랑이지, 자신의 복(크게 봐서 구원이나 영생도 포함됩니다)을 비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결국은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위선적인 기독교를 고발한 것이지, 예수를 통한 사랑의 실천을 권하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자신과 자신 가족들의 복을 위해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리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이 말하는 바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