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도 내겐 선명한 자국이 있다.

그를 만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였던 거 같다.  원태연님의 시집을 그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비교적 쉽고 구체적인 표현들이 많아서 문학을 소 닭보듯 하는 그에게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으리라 여겼다.  좋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건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그걸 알게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집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찾아간 덕분에.  그날 난...그날 난....못 볼 것을 봤다.  나의 야리야리하고 사랑스러운 시집이,내가 건넨 시집이, 잘 간직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시집이 방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게 아닌가.   이 장면만으로도 난 무지 열받았더랬다. 그런데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 예쁜 겉장이 심상치 않았다.  1/4가량 잘려나간 둥그런 테를 이고 있는게 아닌가. 뜨거운 냄비.  아뿔싸.  어찌 이런 참혹한 사태가.  분노는 점점 참담함으로, 그리고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이 상황에서 난 어찌해야 하는가.  너무나 부끄러웠던 난  잽싸게 내 가방속에 그 가여운 것을 집어 넣었다. 여긴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닌가 보다하고. 

아마 그 당시 그는 그 책이 없어졌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집 책장에서 몸을 사리고 있고 있다는 것도.

나에겐 발작을 할만큼 화가 나는 일이 그에겐 아무 문제가 안되는 상황들이 있다.  그는 물론 내가 어떤 상황을 싫어 하는 지  안다.  그래서  일을 저지르면 무조건 용서를 빈다.  그러나 다음에 또 무조건 용서를 빌 일을 저지른다. 10년이 넘었어도 내겐 선명한 냄비 테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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