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 - 한 시골교사의 희망을 읽어내는 불편한 진실
황주환 지음 / 생각의나무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최근 정말 강렬한 책을 만났다.  

 

학부모들이 말하는 공교육 부실이란 단지 사교육과 경쟁지 못하는 비효율을 말할 뿐이다. 학교 교사들이 몰입교육,수준별 교육을 한다해도 사교육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이 원하는 것은 학력이 니라 남보다 앞아선 석차이기 때문이다. 모두 잘하게 된 영어,수학은 의미가 없기에 순서에 앞서기 위해 또 학원을 찾게 되어 있다. 이처럼 대학입시가 중등 교육을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사교육 대책도 실패 할 것이다. 오히려 열심히 가르치고 채찍질 할 수록 전체 상황은 더욱 악화 될  뿐이다. 이는 몇 개의 먹이를 놓고 다람쥐들을 채찍질하면 모두 그 먹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쳇바퀴 속도만 빨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p35

 

국립대학 통합 네트워크, 교장 선출 보직제, 패스 학점제 등 교육 현장에는 대안들이 많이 있다. 국립학교를 하나의 단일 학교로 묶어 입시 경쟁을 완화할 수 있으며, 일정 기간 근무한 평교사 중 교장을 선출하고, 교장은 임기후 다시 평교사로 돌아오게 하여, 교장을 승진 개념이 아니라 보직의 개념으로 바꿔 수평적 학교 문화를 만들 수도 있다. 또, 과열된 영어 교육의 경우도 일정 부분만 성취하면 더 이상의 점수가 필요 없는 학점제 실시로 진짜 필요한 이들만 사교육을 선택하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실행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구조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이권과 자본은, 절대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합리적인 사회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독점된 기득권이 지속되기 위해서 교육은 병리적인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 조직의 근본이며  조직의 질적 변화를 일으켜 기존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교육이 지녔기 때문이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대리자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 교육을 지배한다...마르크스

 

사교육에의해 배설된 고득점자들을 모아 이른바 명문대로 배송하는 역할만 하는 특목고.  특목고의 위상은 학습효과라기 보다 선발효과로인한 허상일 뿐이며, 대학 또한 학문적 자립도 없고,국가 경쟁력도 없으면서 경쟁력있는 입시 선발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인재로 성장하며, 단련 할 수 있는 기회의 영역인 그 곳. 대학. 그 대학 교육의 부실에 대해 의문을 갖는 자, 어디있는가.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의 무한 증식. 형체 없는 시대악인 이들은 자본과 노동을 극단적으로 소외시켜 노동의 실체인 사회 구성원들에게 박탈과 무기력을 안긴다. 공정한 노동의 대가와 사회 공공성이 확보된다면 경쟁 교육 대신 각각의 직면 과업인 노동에 충실할 수 있다.

 

우리 교육의 문제는 가난과 노동임금 구조 개선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쟁과 공포가 기형적으로 증폭되어 한국사회의 교육문제 아니 입시문제는 부의 분배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노동의 대가와 임금차별과 권력독점을 외면한 그 어떤 교육 개혁도 말단 처방일 뿐이기에 교육은 이미 교육의 차원에서 개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은 정치의 영역이 된다. P62

 

소유와 증식만으로 향한 깊은 홈은 옆을 볼 수도,전체를 볼 수도 없게 만든다. 가난할 때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 버는 행위 자체가 자기에대한 존중감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고 살만해진 다음에도 계속 부를 증식하고자 한다면 그건 바보거나 광인이다.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  물질적 풍요는 반드시 정신의 가치와 함께 가야 한다. 그래야 쉬임없이 만물을 낳을 수 있다.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고미숙 P47)  베푸는 것은 하느님과 같은 일이고, 쌓아두는 것은 지옥이라고 했다. 전체 맥락 속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각성하며 성찰하고 선택하는 길만이 악의와 불의에 맥없이 복속하지 않는 방법이고 우리를 지키는 길이다.

 

***

 

일상은 끊임없는 선택을 요구한다. 필요에 의한 소비가 됐건 기호 소비가 됐건 물품의 선택에는 지나치게 신중하여 때론 피곤을 부르건만, 정작 중요한 가치 선택 앞에서는 기회의 존재 자체를 의식 못하는 듯하다. 경쟁적인구매만 있으며 그런 맹목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을 희안하게 취급한다. 사교육. 그런 의미에서 내겐 희안하다.

물질이건 가치이건 대체할 무언가를 내가 이미 갖고 있다면 구태여 그것을 구매할 필요가 있는가. 서랍 속에 쓰던 연필이 많다면 연필은 살 필요 없고, 내가 떨어진 단추를 달 수 있다면 수선집의 도움은 받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소비의 기본 원리 아니던가. 그런데 왜 교육면에서는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색 없이 구매로 직행하여야 하는가 말이다.

 

초등생을 가르친 엄마라면 중학생도 가능하다. 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임을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나의 지식은 물론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해결 의지가 있다.  엄마가 과제에 접근하는 능동적인 태도를 목격하는 순간, 지식 이상의 것이 아이들에게 옮겨 간다.  몰랐던 것을 안다는 것이 참으로 기특한 경험임을 아이들이 깨닫는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가 논어의 첫 줄을 이끌고 있는 이유와  인간에게 배움 처럼 지속적이고 강력한 동력을 지닌 에너지는 없다는 것도, 우린 차차 함께 깨달아 갈 것이다.

 

금성 출판사의 과학 교과서의 경우가 요네하라 마리가 말했던, 한번 펼치면 덮을 수 없었다던 바로 그 교과서였다. 책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우린 홀딱 반했다. 그에 비해 사회 교과서는 터무니 없이 허약하다. 이 시점에서,각 학교의 교과서 출판사 선택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담당 교과 교사마저도 무가치함을 공공연히 언급하는 선택을 과연 누가 하고 있는 걸까.

하여튼, 나는 사교육을 선택하지 않은 덕분에 중학교 시기를 다시 살고 있다. 딸아이와 함께  나는 가족이 공유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것을 공유하는 동료가 되었다. 시험 당일엔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를 혼자만 전쟁터에 보내는 심정이다. 아이에게만 그 시간의 압박을 혼자 감당하라고 하는 건 불공평한거 아닌가 생각이 들고...

 

현재,아이의 성적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다. 하지만 사교육으로 만든 점수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긍지를 얻고 있으며, 본인이 자신을 신뢰하고, 본인의 잠재성을 확신한다.  나는 학습 결과보다는 과정과 태도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성적엔 다소 편안한 편이다. 그저 아이가 지나게 될 각각의 시점마다 존재의 충만을 경험하며 통과하길 바랄 뿐이다. 사회적 통념으로 우리 삶의 질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중 3이고 비평준화 지역이기에 고등학교 입학 문제로 고민이 많다. 아이가 영어권에서 생활한 덕분에 영어 성적이 좋았고, 영어 원서 읽기에 꾸준히 흥미가 있었다. 그러던 중 토론식 수업과 교과외 다양한 활동,영어로 수업 진행등 아이가 선호하는 교육과정을 갖춘 국제고를 염두해 두었는데 .....전원 기숙제다. 여태 난 특목고들이 대부분 기숙제인줄 몰랐다. 학부모로써 이런 무신경이 있는가.

 

궁금해졌다. 특수고에 아이를 보낸 부모들에게.

그 연령대 아이들이 부모와 나누어야 할 교감과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 시대적 감성은, 갈등 없이 포기 할 수 있는 가치였느냐고.  또 부모가 생활 속에서 가르쳐야 할 것들이 가장 많은 시기인데, 특목고에 보낸 부모들은 기숙제라는 강제에 저항감이 없었느냐고. 이런 고민을 특목고 학부모에게 털어 놨더니 그런 고민하는 사람 내가 처음이란다. '....'

그러던 중 고민을 덜었다.

지난 중간고사 영어 성적이 훌륭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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