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완두콩은 꼬투리에서 터져 바닥에 떨어진 개체만이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수확할 수 있었던 콩은 꼬투리가 터지지 않고 매달려있던 돌연변이 개체였다. 이처럼 인간이 재배하게 된 작물들은 편리에의해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돌연변이들이라는 재밌는 사실. 현재 쓰고 있는 쿼티 자판배열이, 초기 타자기가 나왔을 당시, 빠른 속도로 타자할 경우 글쇠가 엉켰기에 타이핑 속도를 늦추기 위한 의도로 배치되었었다는 사실. 유럽의 분열과 중국의 통일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역사등 흥미로운 소재들이 풍부하다.

기술은 발명된 이후에 용도가 발견된다든가,문명에는 우열이 있으나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든가...

 

'올가의 반어법'에 등장하는 요네하라 마리의 친구들과의  실제 만남을 보고한 프라하의 소녀시대. 요네하라 마리가 잠시나마 혜택을 누렸던,면밀하게 계획하여 수업을 예술작품처럼 진행하는 알렉산드로브나 선생님과 개인의 재능에 대해 시기,경쟁 아닌 모든이의 재산으로 여기는 러시아의 사고방식. 그녀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지만 여전히 인상적이다.

인도인을 노예처럼 혹사시켜 생산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매하여 청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파탄에 빠뜨려가며 은을 긁어 모으자 이에 대항하여 청나라가 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니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합법적으로 불평등 조약까지 맺으며 지금의 세련된 자본주의 나라가 된 영국,아직도 남태평양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고 거기서 태연하게 핵실험을 하면서 안전하고 무해하다고 떠벌리는 프랑스,원주민 살육과 흑인 노예 착취로 사회 인프라를 정비한 미국 등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그림자를 들춰준다. 문화 다양성에 대한 그들의 무자비한 독선을 꺼리낌없는 그녀의 억양으로 서술한 마녀의 한 다스. 두 권 모두 가볍고 개운하게 읽었다.

 

 실명하면 시각적 자극을 처리하던 뇌의 부분인 시각피질이 그냥 멈추는 것이 아니라 즉각 청각처리를 위한 회로로 채워진다는 뇌의 신경 가소성. 뇌의 재정비 능력등 알면 알수록 신체는 절대 대체불능 신비의 총체인데, 이런 뇌의 잠재력을 버리고 기계에 의존하면서 인간은,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특성인 사고력을 퇴화시키고 있다. 사소한 정보에 갈급을 심화시키는 환경 이면에 숨겨진 경제논리, 산만해짐으로 인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인 공감,열정이 점차 침식당하고 독창적인 사고로 도전하기보다 관습적인 생각과 방법만을 쫓기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쉽게 제어 당할 수 있는 세계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지식이 될 수 없는 정보만이 부유한다. 

외부적인 자극의 폭격을 받고 있지 않을 때 뇌는 실제로 휴식을 취하면서 집중력이 회복 되는데 자연과의 단순하고 짧은 교류만으로도 인지 통제에 대한 진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단지 고요한 시골 풍경 사진 한 장이 집중력에 대한 강력한 통제능력을 부여해 준다니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효과적인 인지 기능에 있어 필수적으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누구든 사색이라는 회복 마법을 경험해 볼 수 있다.

 

 

 윤구병 선생은 너무나 바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농사일들. 농한기 농번기의 구분 없이 줄이은 일거리에 나도 숨이 막히건만 마지막엔 개꼬리처럼. 그래도 행복하다...는.완료 불능인듯한 소망형은 농촌생활의 평안과 고요는 부서뜨리고, 고단함만 한껏 던지니 내내 맘이 무겁다.

도시 사회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산 공동체를 안고 있지 못하므로 끊임없이 외부에다 빨판을 대고 기생하는 삶을 도모할 수 밖에 없으니 나라안의 생산 공동체를 식민화하고 나아가 더 큰 식민지를 찾아 국외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이는 제국주의적 생존전략을 취하던 역사의 고통을 상기시킨다. 

<잡초는 없다>와 내용 중첩이 과하고,시간적으로도 정돈이 필요해 보였다.

야마오 산세이 그의 시간엔 진정 여유와 자연,느긋함이 느껴진다. 헬렌 니어링도 오후 시간은 개인 자유시간 확보를 원칙으로 하는 일상을 추구 했는데 이분도 오전 시간을 그러한 지적 작업의 시간으로 늘 보장해 놓는다.

15년에 걸쳐 자란 나무가 불과 서너 번의 목욕탕물 데우는 데 쓸 땔감이 되어 처마밑에 쌓이는 풍경에선 허망무상함을, 자유란 하늘과 땅 그 자체의 생물과 무생물을 통해 드러나는 섭리를 통찰하는 데서 찾아온다는, 곧 자유란 곧 필연의 통찰(프리드리히 엥겔스)이라는 이해를 얻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