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김준혁 지음 / 여유당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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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같은 군왕과 한 시대를 누린다면 목숨인들 아까우랴. 20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정적에 의해 여과된 기록이 어찌 이렇게 내게 고통을 준단 말인가. 그 시대가 그에게 안긴 한계에 나,하염없이 억울하고 갑갑하여 통한의 눈물 멈추지 않는다. 답답하고 화가 끓어 올랐다. 불면과 숙고의 결정체인 화성.그 이상 실현 직전,어쩌면 진정한 정치를 눈앞에 두고 그는 어찌 눈을 감았을까.

노론의 저항과,끊임없는 신변 위협 속에서 문과 무에 빈틈없는 정진을 위해선 초인적인 절제와 긴장이 따랐을 터인데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화성이었다. 철저한 그. 유래없는 군사력,행정,교육,경제,환경,애민 등 권력 최상부에 있는 이로써 어찌 여기까지 신경쓸 수 있을까 싶은 구석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조성된 세계적 이상 도시 화성. 그는 어찌 눈 을 감았을까. 그가 군주로서의 진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화성.을 두고.

당시 20만 명이던 서울보다 더 큰 도시인 50만 명 규모의 10만호 건설을 추진했으니 ...화성 유수를 기존의 개성이나 강화 유수보다 한 품계 높은 정2품으로 정하고 ...화성 유수로 좌의정 채재공을 임명했는데 이는 국무총리를 수원 시장으로 임명한 것과 같았다 p 176

서리와 청직등 274명에게 모두 급료를 줬다.조선시대에는 서리들에게 급료를 주지 않아 그들이 백성들을 교묘하게 착취하여 배를 불린게 사실이다.이러한 폐단을 잘 알고 있던 정조는 수원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서리들에게 급료를 줘 숨은 뒷거래를 막고자 했다. p176

무릇 얻기 어려운 것이 백성이고 모으기 쉬운 것이 재물이다.재물을 모아 백성을 흩어지게 하느니 차라리 재물을 흩어서 백성을 모이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정조의 철인청치 시대 중)

나라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고민하는 군주였기에 백성들은 결집되었고 10년 가량 계획했던 화성이 3여년 만에 완성되었던 것이다.

 

 

세번을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성문을 저 백성들 집 밖으로 쌓으라 명해 민가 밖으로 물러 앉게된 장안문.감독자를 그 건축물의 기능에 맞는 전문 인력을 선발한다는 합리성에 근거 무인을 기용해서 건축된 연무대.정자이면서 군사지휘소인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조선 축성사엔 없었던 창의적인 복합물 공심돈.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등에만 설치할 수 있는 박석이 깔린 화홍문. 정조가 내려와서 살려고 했던 화성 행궁등 기능성과 아름다음과 견고함을 갖추고 있는 건축물들.

현재 70%정도만 복원된 상태라는데 전쟁과 자연재해에 유실된 화성의 일부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화성성역의궤에 화성 건설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동원된 인부들의 이름과 노동 상황 급여에 이르기까지 그 기록내역들에는 한계가 없어 보였다. 무서울 정도라고 했다. 가까이 일상에서 보아왔던 그 건축물들에 정조의 무한대 사고 영역과 세밀한 의도가 녹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과거 내 무심했던 시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 변변치 않는 제 글.꾸준히 긍정의 관심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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