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ON .진중권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사탄이 존재하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믿는 것은 신이 아니라 사탄의 존재다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를 추구하고,화폐가 노동의 구체성을 지워버리고,인간이 아니라 자본의 자가 증식을 위해 생산이 행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성이야말로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환영,즉 유령이 아닌가

이 사회는 사정없이 균일화 시켜 기어이 맥빠진 평균으로 되돌려 놓는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덕일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서 주자소의 벽을 새로 발랐다. 아직 덜 말라 정결하지 못하지만 이달 그믐께 쯤이면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1800.6.12 정조가 정약용에게 보내 편지다.그러나 정약용은 정조를 생전에 만날 수 없었다.정조는 6.28일 사망했다.

 

당쟁싸움에 아끼는 인재를 멀리 떠나보낸후, 속히 불러들이고 싶은 군주의 안타까움.

아름다운 군신관계다.

보리 뿌리 맥근 맥근 /오동 열매 동실 동실

아침까치 조작 조작 /낮 송아지 오독 오독 등 주고 받으며 서로 마주보고 웃었을.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과 결단력이 있었기에 정조 전후 시기엔 인물들이 유독 많았나 보다.

정약용의 전방위적 학식과 능력도 새로운 사실이거니와 정조와 관련된 다감한 일화들이 내겐 더욱 흥미로웠다.정조는 인재들과 이런 아름다운 관계의 끈을 여럿 갖고 있었듯 싶다.

 

정약용의 아버지는 영조와 대면하여 영조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인연이 있었고,정약용의 어머니는 윤선도의 후손이었으며, 이가환은 정약용이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의 천재성을 지닌 벗이었다. 정조 사망후 유배지에 있던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여러 차례 학문을 권고하고 과제도 내주는데 아들들이 아버지의 지시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당대의 임금과 벗과 다름 없이 지내던 위대한 정약용도 자신의 자식 교육에있어선 나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일까.위안도 되고,내 욕심도 거둬들여 보는 기회도 되었다.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이덕일

숙중34년 1871년에 전국 확대 실시된 대동법은 임란때 이미 유성룡이 작미법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실행한 제도이며,양반도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 호포법도 대원군때가 아니라 유성룡이 이미 임란때 시행한 속오법이다. 가난한 백성들에게만 치우진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지배계급과 공정하게 나누고자 했으나 나라는 망해도 사대부들의 계급적 특권은 침해될 수 없다는 태도 앞에 유성룡의 실각과 동시에 개혁입법은 무효화된다. 그 선두에 임금 선조가 있었다. 임금이 철저히 지배계급의 논리로 백성들을 찍어 눌렀으며 나라의 위기따위는 안중에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위한 피신 궁리만으로 전전긍긍하며 전쟁 대응방법을 논의하는 중에도 다음 피신지를 닥달하는 동문서답만 반복한다.이렇게까지 비열한 군주가 있었던가.

백성의 조롱을 받는 임금.백성의 추앙을 받는 영웅.치졸한 임금은 영웅들을 시기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임금이 아닌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기에 회한 속에서도 싸울 수 있었던 이순신은 그나마 자신을 지지해줬던 유성룡의 실각 연통을 받은 당일 임금의 손에 분명 죽을 것을 예감하고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노량해전에서 북채을 들고 담담히 적의 활을 가슴으로 받았다.

유성룡은 거시적 안목과 해박한 미시적 시각,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였다. 이런 유성룡을 흠집내기 위해 노론계열 역사학자들은 있지도 않았던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창작하였고 십만양병설을 반대한 이가 유성룡이었다고 기록한다.현대 학생들은 이를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로 교육받고 있다. 역사가 진정 사실의 기록이기는 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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