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 역사학자 이덕일, 공자와 논어를 논하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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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메모처럼 시시때때로 등장하던 공자의 명언들이 공자의 나이듦을 따라 그 맥락을 잡았다.

공자보다 서른이나 적었지만 동지로 여겼던 제자 안회.주변 살필 겨를 없이 피신했을 때 네가 죽은 줄 알았다며 살아 돌아온 안회를 반가워하던 스승에게 스승님이 살아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느냐던 안회.학문을 좋아하며 노여움을 옮기지 않으며 허물을 두번 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41세의 나이로 공자 보다 한 해 먼저 떠난 제자.그가 죽자 세상이 나를 버리는구나라며 공자를 비통하게 했던 제자.그와 비교하면 행동가였던 제자 자로(그도 안회 떠난 이듬해 떠났다) 안회를 떠올리면 어질 인이 생각나고 자로를 생각하면 웃음이 떠오른다.

 

나라와 가문을 가진 자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고 들었으니

무릇 고르면 가난하지 않고,화하면 부족함이 없고,편안하면 위태로움이 없다. 

결핍에만 집중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가 아닌가 싶다.

안철수님이 언급한 부분들로 공급보다는 분배에 유의해야 하는데 평등보단 공정함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원수를 덕으로 갚으면 어떻습니까?

원한을 덕으로 갚으면 덕은 무엇으로 보답하겠느냐 되물었다.

원수에게 덕을 베푸는 것은 말은 좋지만 악인과 선인이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뜻이다.그렇게 하면 의는 실종된다. 그래서 공자는 그러면 덕은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라고 묻는 것이다.

원한은 곧음으로 갚아라.원한은 개인적 감정으로 대하지 말고 공정함으로 갚으면 된다

그러면 의가 실현 된다. 그리고 덕은 덕으로 갚아라.

얼핏보면 기독교와 배치되며 훨씬 설득적으로 들린다.

 

백성을 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서 다스리면 형벌은 면해도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움도 있게 되고 또 바른 데 이르게 될 것이다.

도덕적 수치심보다 윤리적 죄의식을 느낄때 속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들었다.

곱씹을 수록 새로운데 원문으로 보면 또 다른 맛이 난다.

 

나는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며 정치에 뜻을 품었으나 쉰 다섯부터 14년간 천하를 주유한다.

이런 사실이 이천여 년 넘어 여기 앉았는 내 맘을 짓누른다.

나는 행운이구나.진실로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아는구나,라고 사진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스승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무조건 옳다고 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며

(공자 학단에는 스승의 잘못도 거리낌없이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있었는데 그 권리를 잘 이용한 제자가 자로였듯 싶다)

안될 것을 알면서 하는 사람이며

공자의 외양이 상갓집 개같다는 말에  형상이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상갓집 개와 같다 이른 것은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반복하며 웃던 사람

되는 일 없이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조롱을 받는 그 사람과 그의 제자

공자의 주장에 당대에 쓰이지 못한 것이 아깝고 아깝다.공자의 인생도 아깝다.

 

자신을 살해하려는 노론 송시열이 집권한 상황에서도 업적을 남겼기에 위대한 정조,문무겸전이라는 선비정신을 지켰던 남명 조식,중종에게 버림 받은 조광조,정도전과 이성계,이익 등을 들어가며 공자의 문장을 풀고 공자의 처지를 조선의 이들과 함께 푼다.

공자라는 거대함에서 두려움이 걷혔다. 인간적인 만남이었고 문장들을 하나 하나 외워갈 때마다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지속적으로 논어를 익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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